대문 / 서명순
노모가 홀로 계시는 친정집 대문을 고치느라 난리가 났다. 적당히, 녹이나 걷어내고 기름이나 먹이면 되리라 쉬이 여겼던 작업은 장정 4명이 달라붙어 꼬박 이틀이 걸렸다. 망치, 펀치, 절단기에, 전동 드릴기, 이장 집에서 빌려온 CO2 용접기까지. 왱왱거리는 기계소리가 고즈넉한 골목을 흔들며 온 동네 관심사가 되었다.
무릎이 시원찮은 팔순 노모가 우여곡절 끝에 차(車)를 구입했다. 토끼와 거북이로 속도를 조절하는 전동차는 대문 턱 앞에서 정지하고 말았다. 4m 남짓 되는 대문이 아귀가 맞지 않아 빗장을 풀기도 어렵고 닫기도 곤란했다. 빗장이 두 문짝을 쉬이 갈고리해야 하는데 앙살 맞은 소리만 낼뿐 여간해서 빗장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식이란 자가 민망한 것은, 마당에 대 놓았던 제 차가 빠져 나가면 휑하니 가느라 닫힌다는 것의 의미를 몰랐다. 부대끼던 살내음이 빠져나간 공간을 겨우 빗장질하는 노모의 심장은 얼마나 고적했을 것이며 극성스럽던 수다가 홀연히 나가버린 적요(寂寥)를 가늠이나 했을까? 자식들의 민망함이 법석을 더 부추겼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양철대문이었다. 맨 얼굴을 한 허연 양철대문은 군데군데 녹이 슬고 밑부분은 찌그러져 곤궁함을 터냈다. 비바람이라도 치는 날 양철대문은 어찌나 방정스러운 소리를 내던지, 돌로 여러번 드잡이를 해야 했다. 농사가 많고 자식 여섯이 쥐방울처럼 드나들 때 양철대문은 닫힘보다 열림이 많았다. 그 시절 무엇이든 파닥거리고 꿈틀거렸으며 공기마저도 풀기가 넘쳤다. 양철대문을 단단히 돌로 괴우는 매일 밤의 의식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영역을 확인했고, 헐겁고 볼품없던 양철대문이 대부분 골목을 마주했던 탓에 누구하나 기죽는 일도 없었다. 안과 밖의 소통, 열림과 닫힘, 영역보장, 바깥과 집의 영역을 가르는 제 역할에 하등의 모자람이 없었던 양철대문이었다.
10여 년이 흘러 입식부엌과 함께 지금의 녹색대문이 들어섰다. 철근 넣은 문주를 양쪽에 떡하니 세웠다. 바깥에서 보면 오른쪽이요 집 안에서 보면 왼쪽에 출입문이 있고 사자 머리모양 손잡이가 대롱대롱 매달린 광채나는 대문이었다. 위로는 뾰족한 화살표가 하늘을 찌르고 있어 감히 안을 넘보지 마라는 경고가 덧붙어져 있다. 너나없이 현대화 작업에 대문을 바꾸면서도 어르신들은 같은 골목에 같은 대문색깔을 만들지 않았다. 이 골목 녹색 대문 집, 하면 그건 우리 집이었다. 서서히 대문은 그 집의 내력을 품기 시작했다. 어쩌다 도시로 간 아들이 돈이라도 많이 벌었으면 대문은 더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콤바인으로 논에서 벼농사를 해결하자 대문은 가을 추수시절에도 토라진 아이처럼 닫혀 있기 일쑤였다.
대문으로 세월이 넘나들었다. 열아홉 순둥이가 마흔다섯의 아줌마가 되고 아버지 주검이 문턱을 넘었다. 바깥으로만 향하는 자식 여섯의 인생이 여물고 옹골해졌으며, 독을 덜어 낸 장독대의 빈자리처럼 대문 안은 덩그런 허전함이 살을 찌웠다. 우리 집먄이랴. 구부정한 골목마다 대문이 핏기 없이 서 있는 형국이니 마을을 들어서는 이문(里門)도 정자나무만 가지를 늘어뜨린 채 서 있다. 몇 년 전부터, 침잠(沈潛)해서 깨어질 것 같은 고요로 동네가 허하다. 한쪽으로 일그러진 대문을 철사로 겨우 이어 붙인채 녹이 주렁주렁 대문을 뒤덮은 을씨년스런 대문이 보기 싫어 서둘러 눈길을 피한다. 노모가 자리를 떠나면 친정집도 결국에는 저런 모습이 되리라,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나에게도 앵돌아진 운명처럼 어긋나 있는 대문이 있긴 하다. 다름이 상처가 되고 배신이 되는 시간이 있었다. 조그만 차이가 어깨다툼을 만들고 후배가 궁지의 시간으로 나를 밀어 넣었을 때, 사람의 눈빛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할 때가 있었다. 배신의 시간이 지날수록 삭이지 못한 분노가 치렁치렁 가슴을 덮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의 대문을 만들었고 꼭 닫았다. 문이 닫힐 때 문 밖은 철저하게 타인이 되며 안은 나만의 영역을 규정짓는다. 내 안에, 분노의 담쟁이가 무성하게 뻗었다. 내가 옳았다는 바람이 이리저리 잎사귀를 흔들어 가끔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큼직한 자물쇠를 채웠으며 날카로운 병 조각들로 시멘트를 발랐다. 나가고 들어오는 것은 끊겼고 잎사귀들은 더 무성하게 나를 불면의 밤으로 몰았다.
문주에 박힌 돌쩌귀를 떼 내 아귀를 맞춘 뒤 표적을 한다. 표적한 곳을 다시 해머로 구멍을 내고 돌쩌귀를 메달아 문짝을 끼우며 다시 아귀를 맞춘다. 아래를 맞추니 위가 어긋난다. 남감하다. 아예 어긋나는 윗부분을 갈아낸다. 불꽃이 튀고 웽웽거리는 소리는 고집스럽다. 아귀를 겨우 맞추고 빗장을 거니 이번에는 빗장이 삐거덕거린다. 빗장을 통째로 떼 내 다시 매단다. 이제는 되겠거니 했는데 맨 아래 문을 고정시키는 중심축이 손가락 한마디 정도 어긋나 있다. 이 정도쯤이여, 생각하고 고정핀을 박으려해도 대문이 당겨오지 않는다. 여간 고집불통이 아니다. 졌다. 닫힌 문을 자연스레 두고 다시 고정 핀을 드릴로 박아 낸다. 시멘트 가루가 뿌옇게 오른다. 몇 번을 열고 닫아 본다. 이 사람 저 사람. 그러고 나서야 마지막 검사관은 노모다. 노모가 빗장을 걸고 문을 여는 순가 여덟 명의 심장이 긴장한다. 대문을 혼자 연 노모가 무사히 전동차를 타고 빠져 나가는 모의실습을 통해 대문 수리는 끝났다.
잔치가 끝난 마당에서 자꾸만 대문을 열었다 닫았다. 혼자 용심을 부린다. 닫힌 것이 열리는 건, 치유이자 성장이다. 빗장을 푸는 건 오로지 내면의 주체, 나만이 행할 수 있는 의식, 앵돌아진 관계를 내 스스로 껴안을 준비가 돼 있는지? 분노의 바람을 삭여 무엇이든 인정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는지, 진땀이 난다. 용접기라도 빌려 과욕은 태우고 교만은 녹여 내안의 빗장도 저리 쉽게 열릴 수 있다면, 찌징거리는 쇠 소리가 나고 불꽃이 튀고 쿵쿵거리는 망치질이 있어야 하리라. 자물쇠를 부수고 시멘트를 걷어내려면, 무엇보다 무성하게 뻗은 감정의 넝쿨을 뽑아내려면 감정의 잔흙이 뿌옇게 날릴 것인데… 나는, 문을 열 것인가?
‘하나의 공간적 영역을 이루는 경계와 그 영역에 이르기 위한 통로가 만나는 지점’ 내 안의 문도 결국은 내 감정의 담장을 쌓고 있는 영역의 경계선일 거다. 어떤 감정이 담을 차곡차곡 쌓아 감정의 기둥과 공간을 만들고 굳게 대문으로 걸어 잠그고 있는가?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나만이 옳다는 자만감.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감. 감정의 대문을 열면 이 모든 것들이 밖으로 쏟아져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멀리 날아갈 수 았는가? 빛이 다한 녹색대문을 보며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닫는다. 내 마음이 이 대문이었으면, 하고 또 문을 연다.
문은 결국 스스로 열리지 않는 것, 늙은 노모의 손끝이라도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 결국 내 안의 문을 여는 것도 결국은 내가 해야 할 일이리라, 다시 문을 슬며시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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