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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돌갗/김정화

에세이향기 2022. 3. 10. 10:20

돌갗

 

 

 

김 정 화

 

눈가리개를 벗으니 세상이 눈부시다. 어른거리는 주변의 물체들을 제치고 하얀 천위에 놓인 콩알만 한 돌에 눈길이 꽂힌다. 그 동안 말문을 가로채고 침샘의 길을 막았던 숨은 주범이다. 몰골이 초췌하다. 몸속에서는 제 맘대로 돌아다니며 한시도 나를 편안하게 해 주지 않던 결석이 세상에 나오면서 꼼짝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사리 같은 고매한 품격과는 너무나 먼 한낱 돌조각에 지나지 않는 모양새다. 내가 수행자도 아닌 터에 내 돌은 결석일 뿐, 짝퉁 사리로도 여길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얼마 전 턱밑 침샘에 결석이 생겼다. 어쭙잖은 사람에게는 아픈 곳이 유별나다. 작은 돌이 입속 통로를 막는 바람에 며칠 동안 목이 부어올라 음식물을 잘 삼키지 못했다. 이미 몇 차례나 악하선이라는 침샘에 결석이 생겨서 고생을 겪어야 했다. 간단한 수술을 서너 번 했는지라 놀랄 일이 아니건만 이번에는 위치가 깊어서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고요 속에 잠긴다.

입 안이 얼얼해져 온다. 두어 방울 마취제가 떨어지면서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한다. 표면에 닿은 약의 위력도 대단한데 몽혼 약을 넣은 주사기까지 입속 깊숙이 꽂는다. 재갈을 물린 듯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혀는 외마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힘 준 목에 핏대가 선다. 제구실을 잃은 혀가 돌처럼 딱딱해진다. 그 동안 독설과 패설을 내뱉은 마음에게 주는 경고를 혀가 대신 받은 셈이다.

 

혼미하다. 비릿한 내음이 그나마 제 기능을 하는 코를 스치더니 목울대로 울컥 뜨듯한 액체도 넘어온다. 수족은 묶여있고, 눈가리개까지 덧씌워지니 반 식물인간과 다를 바 없다. 눈과 손발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남아 있는 후각과 촉각의 기능을 검사하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본다. 청각은 다른 감각 기관이 마비될수록 더 예민해 진다고 한다. 수술 기구들이 서걱대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다 못해 의료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의 토씨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행여 돌을 찾지 못하면 타석이 생긴 근원인 침샘을 제거해야 한다는 그들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입속을 절개해서 작은 돌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이 바싹 타들어간다. 점점 동면의 꿈에 빠져든다.

 

여름이면 자갈이 깔린 개천을 찾아 곧잘 맨발로 걸었다. 물살을 맞고 바람을 안으며 돌 위를 걷다 보면 내가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돌이 된다. 발바닥에 닿는 까슬한 돌갗의 감촉이 좋아서 개울가 바위에서 한동안 서성이곤 했다. 그 여운은 항상 한두 개의 잔돌을 주머니에 넣어와 책상 앞에 올려놓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돌멩이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값나가는 자연석이 아니어도 나에게는 사계절 내내 소쇄한 여름의 물소리를 들려주는 기품 있는 수석이 되었다.

 

돌의 숨소리를 마음으로도 듣는다. 산길을 오르다 보면 간혹 볕살 두터운 오래된 나무 틈에서 이끼로 가려진 돌을 만날 때가 있다. 그 돌을 손으로 만지면 풋솜 같은 땅의 온기와 나무의 향내가 가슴에 담긴다. 석간송이 다시 돌을 품게 되니 돌에도 초월적인 생명력을 지닌 것 같아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요즈음도 돌을 만지다 보면 세월의 상처가 보이곤 한다. 갯돌이 되기까지 바위는 낮은 시내를 흘러오느라 힘겨운 몸앓이를 했을 게다. 긴 시간 동안 돌과 물이 맞부닥치고 물과 돌이 어우르고 굴려지면 날 선 모가 부드러워지고 성긴 결도 반드럽게 윤이 난다. 모난 돌이 둥글고 유순해지려면 서로 오랜 세월 동안 부딪쳐야 한다. 사람의 마음도 자꾸 부대껴야 다듬어지는 것이 아닐까.

 

입술과 목을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한 시간째 버티고 있으려니 몸은 화석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안대 속의 힘 잃은 눈동자가 빛을 찾느라 꿈실거리지만 소용이 없다. 힘주어 뻗쳤던 손끝도 기운이 풀리어 맥없이 오므라든다. 힘꼴을 잃은 나와는 달리 입속의 돌은 더욱 유연한 몸짓으로 잘도 피해 다닌다.

 

큰 돌은 말없이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지상에서든 몸속에서든 돌아다니기를 즐기는 작은 돌멩이는 제어하기가 어렵다. 부동의 대인과 달리 잔돌은 쉽사리 몸을 움직이는 소인배랄까. 돌도 제자리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어울리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는 법이다. 무던히 기다릴 줄 아는 바위를 닮지 못하고 이리저리 나부대는 작은 돌멩이를 닮은 것 같아서 내 몸은 한껏 더 주눅이 든다.

 

유체일탈을 한 결석을 손 위에 얹어 본다. 수행자가 아닌 보통 사람의 몸에 생긴 돌들은 대부분 의사의 손에 붙잡혀 밖으로 나가게 된다. 가련한 처지라 여기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밉상이 사라지면서 정감이 새록 돋아난다. 그 동안 개천을 거닐며 주웠던 잔돌이 내 몸속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아닐까. 자갈이 시내의 배경이라면 몸에서 나온 결석도 내 생의 일부라고 여겨본다. 물기 머금은 돌에서 묘약 같은 따스한 기운이 스며 나온다. 침샘을 따라 종횡무진 얼마나 다녔으면 시골 강변에서 주은 돌갗처럼 반들반들하게 보일까.

 

무명베 위에 오롯하게 자리한 결석을 지켜보며 부대끼어 모나지 않은 마석(磨石) 같은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다시 고립무원의 석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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