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1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떨켜가 드디어 잎자루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체념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별리의 가을이 못내 아쉬워 흘리는 나무의 눈물이다. 열정의 구멍이 스르르 닫혀버린 내 몸에서 떨어진 잎들이 생의 겨울이 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의지, 도전, 끈기, 인내, 용기, 목표 그리고 믿음의 잎들. 결기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 잎자루를 야멸치게 내치는 수문장, 떨켜. 떨켜가 수문의 기척을 낼 때까지 봄은 준산빙벽을 오르내리며 오기와 극기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눈 속의 노란 복수초와 매화의 안위를 살피는 눈, 동장군보다 매서운 봄이다. 내 열정의 구멍마다 풍구를 돌려보지만 기척도 않는다. 구멍이 한 생명을 키우거나 버린다는 것을 생의 구멍을 진중히 여닫아본 사람만이 안다. 다람쥐, 청설모도 ..

좋은 수필 2021.07.23

참깨송(頌) / 이옥자

참깨송(頌) / 이옥자 한 알의 무게는 작은 새의 깃털과 같고, 크기는 모래알 다음 가나, 향미(香味)로는 따를 것이 없어 이 세상 으뜸이다. 부부의 정이 도탑거나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면 '깨가 쏟아진다'하고, 배알이 뒤틀릴 때 상대방이 코 깨질 일이라도 생기면 '깨소금 맛'이라 함은 그 까닭이다. 고기 맛만 최고인가, 산 녘과 들녘에 지천인 나물을 뜯어 삶아 참기름 한 방울 치면 밥 한 그릇도 뚝딱, 그도 저도 마땅찮을 때는 맨 간장에라도 한 방울 둘러치면 그 맛도 괜찮다. 상찬에도 깨맛과 참기름 향이 빠지면 맨송맨송 하찬으로 등락하고, 하찬도 참기름 진향(珍香)이 돌면 상찬이 된다. 곡물이나, 기묘한 향미로 그 값은 천정이다. 금값이나 사향 값보다야 못하지만, 곡물로는 최상으로 매겨지니 물물교환에 고..

좋은 수필 2021.07.22

김영미 시 모음

김영미 시모음 저물녘1 김영미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뒤란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아버지가 싸리꽃을 좋아하시던지 달이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두고 얘기하는 것을 몰래 들으시는가 했다 어둠이 성큼 마당을 기웃거릴 때 가을비속에 뒤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잔잔한 빗줄기가 오리나무를 성글게 빗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레빗은 수그린 머리와 잔등을 쓸어내리며 네 사는 건 어떤가 묻는 것이었다 나무는 잔기침을 하며 오소소 떨 뿐이었다 외등으로는 자꾸만 낡아 허물어지는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어둠을, 물리치지 못했으므로 저물어간다는 것이 왠지 두려웠고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 생각 없는 생각을 했다 싸리꽃은 내 그림자위에 붉게붉게 꽃을 토해내고 달그림자는 세상과 화해하지 ..

좋은 시 2021.07.15

누나의 붓꽃/손광성

누나의 붓꽃 손광성 시집가기 싫다고 누나가 말했다. 시집은 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싫다고 조그만 소리로 누나가 말했다. 그 사람이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먹기 싫은 밥은 먹어도 살기 싫은 사람하고는 못 사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어머니였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날 어머니는 평소의 어머니보다 훨씬 커 보였고, 그래서 그날은 어머니가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무슨 천둥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 위세에 눌려 어머니는 다시 평소처럼 조그만 헝겊인형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열 일곱 살 누나는 가망 없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누나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열 살짜리 나는 너무나 작..

좋은 수필 2021.07.15

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가끔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멸치를 깐다. 멸치볶음을 좋아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목마른 짐승 샘물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 멸치를 까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한 마리당 세 단계로 작업은 종료된다. 먼저 대가리를 딴 다음 엄지손톱으로 등을 가른다. 그 다음에 내장을 들어낸다. 그래야만 깔끔하게 끝난다. 내장이 뱃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부분을 뒤적거리다가는 낭패를 본다. 잘 갈라지지도 않지만 제일 맛있는 부분이 부스러지기 때문이다. 멸치를 까다 보면 잠시 마음이 짠할 때가 있다. 어느 한 놈도 내장이 까마헥 타지 않은 것이 없어서이다.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저지경이 되었을까 싶다. 짠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편안히 죽은 놈은 한 마리도 없다. 모두 뒤틀려 있다. 끓는 ..

좋은 수필 2021.07.15

수필의 미래, 그리고 강적들< #1. 르네상스 시대와 에세이> /박양근

수필의 미래, 그리고 강적들 /박양근 한국에서 말하는 수필을 달리 말하면 “인생 산문”이다. 수필은 산문체 문장으로 개인의 갖가지 인생 편력을 15매 전후로 담아낸다. 수필에 가까운 서양 장르로 흔히 에세이를 거론한다.『용재수필(容齋隨筆)』(74권 5집)의 서문에 ‘나는 버릇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써 두었으므로 수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와 달리 프랑스어의 에세(essai)는 “시도(試圖)한다, 시험(試驗)한다, ‘계량하다’, ‘음미하다’의 뜻이라는 점에서 출발부터 차이가 있다. 프랑스의 문필가인 몽테뉴(Michel de Montaigne)가 (1580)을 발간하고 자신의 글에 ‘에세(essais)’라는 이름을 붙인..

수필 이론 2021.07.15

아직도 못다 한 종소리의 숙제/유혜자

아직도 못다 한 종소리의 숙제/유혜자 수필은 작가의 성장 과정과 삶의 도정에서 겪은 이야기와 꿈이 녹아 있거나 변용된 모습이 담긴다. 초등학교 때 나라 사랑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선생님의 교훈적인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중 “종소리처럼 남의 가슴을 울려 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뽐낼 만한 글 솜씨도 없이 지내다가 여고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시가 우수작으로 뽑혀 대학은 문과로 진학했다. 졸업을 몇 달 앞둔 늦가을, 그때는 권위 있던 여성잡지 『여원』신인상 시 부분에 응모, 최종심 두 편에 올랐었고, MBC라디오에 입사하고서도 한 차례 K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가 원로 시인이 최종심에 올라온 두 작품 중, 내 글의 좋은 구절 몇 줄을 인용하고 ‘현대문학에 기여할 만한 ..

수필 이론 2021.07.15

냄새의 향수 / 손광성

냄새의 향수 / 손광성 냄새만큼 생생한 기억도 드물다. 약을 달이는 냄새는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고 쑥과 망초의 후텁지근한 냄새 속에는 타 들어가는 고향의 들판이 있다. 여치와 산딸기를 찾아 가시덤불을 헤치고, 게와 동자개와 그리고 모래무지 같은 것을 쫓아 질펀히 흐르는 강을 헤매었다. 물고기의 비린내와 온몸에 감겨 오던 저 미끈거리는 녹색말의 냄새. 놓쳐 버린 어린 날의 나의 강은​ 언제나 그런 냄새와 함께 꿈꾸듯 기억 속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아직도 돌아갈 수 없는 나의 고향. 유년의 꿈속에도 저 지겹도록 기나긴 신작로가 ​펼쳐져 있고, 몽롱한 의식 속으로 꽃가루처럼 날리던 벌떼의 웅웅거림. 그리고 7월의 폭양 아래 하얗게 피어 있던 찔레꽃의 진한 향기. 그 향기가 언제나 나를 멀미나게 한다. 갓 ..

좋은 수필 2021.07.15

비 오는 날의 산책 / 손광성

비 오는 날의 산책 / 손광성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낮게 떠 있는 구름,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빗줄기, 그리고 나직한 빗소리,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빗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부풀어 있던 감정의 보풀들도 비에 젖어 차분히 가라앉는다. 화창한 날에 느끼던 그런 외로움 같은 것도 없다. 비는 창가에 와서 속삭이고, 마음은 귀를 열어 그 속삭임을 듣는다. 전에 아무도 그처럼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없기에 온몸을 기울여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한 잔의 커피, 이따금 바람에 실려 오는 물보라의 찬 기운 속에 느끼는 커피의 따스한 온기와 그 진한 향기, 잠시 커피 잔 언저리에 어리는 우수의 그림자, 희미한 그림자와 함께 빗줄기 사이로 꼬리를 끌며 사라지는 긴 담배 연기의 ..

좋은 수필 2021.07.15

염장/박혜경

염장/박혜경 간잽이가 고등어의 대가리를 야물게 낚아챈다. 시퍼런 등짝이 금방이라도 철퍼덕 일어설 기세다. 무슨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패랭이 모자를 쓴 간잽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나는 간잽이의 손길이 닿자 긴 여행으로 단잠에 빠졌던 고등어가 눈알을 번뜩인다. 소매 끝에 불쑥 튀어나온 간잽이의 양손은 하얀 저고리 탓에 더욱 검붉은 빛깔을 띤다. 50여 년을 간잽이로 살아왔다니 아마 손끝에서도 하얀 소금꽃이 피어오를 듯하다. 소금꽃 속으로 그 옛날 아버지의 얼굴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안동에서도 한참 먼 두메산골에 살았다. 산골이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해산물을 구경한다는 건 할아버지 환갑잔치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임동면 챗거리 장터에 나가 마른..

좋은 수필 2021.07.14

문성해 시 모음 20편

문성해 시 모음 20편 《1》 검색 공화국 문성해 도서실 컴퓨터실에 붙박이로 앉은 사람들 젊어서 천천히 찌그러지고 있는 사람이나 늙어 한꺼번에 찌그러진 사람이나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웃거나 한숨을 쉬거나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지독한 모니터와의 사랑이다 제가 궁금하면 검색해 보세요 그 남자는 여유 있게 말했다 나는 쿠키를 오븐 없이 굽는 방법을 검색하며 쿠키도 프라이팬에 구울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컴퓨터실이 떠나가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모두들 천기를 누설 받는 결연한 표정들이기에 관두기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게 하는 법과 물속에서 물고기랑 오래 대화하는 법을 내리 검색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훔쳐본 옆 사람의 모니터에서 깨알 같은 활자들이 기어 ..

좋은 시 2021.07.13

희망/송정란

희망 / 송정란 ​ 저어두운바닥깊이 가라앉을때마다 끊임없이나를 밀어올리는 내영혼의 부력 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종환 ​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틀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ㅎ안에서 젊아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좋은 시 2021.07.13

한지에 들다/정상미

?한지에 들다 / 정상미 저녁을 우려 넣은 매실주 놓고 한지에 연서를 씁니다 한지의 속살은 뿌리를 머금을 줄 알아 애인은 한지에 쓴 편지를 좋아하죠 한지국國에 들어갈 때는 닥나무국國을 거쳐야 해요 닥나무국은 나의 산골, 우듬지에서 하품하던 흰 구름이 여권을 검사하고 파수꾼 딱새는 포르르 내려와 안내를 하죠 닥나무 아래 풀 뜯던 홍보담당 노루, 종이는 품격,이라 외치네요 한지에선 닥나무를 키우던 바람소리가 배어 나와요 이파리 끝까지 적셔주던 빗방울 소리 들려요 나는 색감 자욱한 몽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노을 한 됫박, 달빛 서너 줌 입고 참매미 소리 접어 선녀라도 되고 싶어요 누구라도 나무꾼 되어 내 연서 받아줬으면 ?푸른 볼펜으로 시를 읽다 / 박남일 문학평론가 이적의 손바닥만 한 양상추는 구운 고깃점 ..

좋은 시 2021.07.13

은어밥 / 안도현

은어밥 / 안도현 아직 한 번도 맛보지 못했지만 내심 벼르고 있는 음식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은어밥’이다. 지금은 독일에 가 있는 하수정 시인이 20년 전쯤에 예찬하던 맛. 은어는 수박 향이 나는 물고기예요. 그녀의 말을 듣던 우리가 귀가 단번에 길쭉해졌다. 후각은 원초적인 감각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그녀의 고향인 경남 진주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말하다가 은어밥 이야기가 나왔다. 남강에서 아버지가 은어를 잡아왔어요. 여름밤 모래사장 위에 불을 피워 은어밥을 지어 먹었죠. 밥물을 평소보다 낙낙하게 잡아야 해요. 은어는 배를 따서 손질해두고요. 냄비 속의 쌀이 한소끔 끓어 익을 때쯤 뚜껑을 열고 재빨리 은어를 넣어야 해요. 밥물이 걸쭉해질 때쯤이죠. 그때 은어를 밥 속에 한 마리씩 수직으로 박아 넣는..

좋은 수필 2021.07.13

바다의 기별/김훈

바다의 기별 / 김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 바다는 멀리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닫는다. 김..

좋은 수필 2021.07.13

마흔 살의 동화/이기철

마흔 살의 동화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

좋은 시 2021.07.12

봄도 없이 삼월/김병호

봄도 없이 삼월 봄도 없이 삼월 김병호 사람이 사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무릎보다 낮은 반지하 쪽창에 핀, 손바닥만 한 보행기 신발과 앞코 해진 운동화 봄빛을 모아 출렁이는 두 켤레 꽃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봄도 없이 그 앞을 지나던 수백의 연분홍 맨발들도 한 번씩 발을 넣어보겠습니다 얼굴 없는 걸음들이 지나칠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햇살 미끄러지는 아이의 잠을 덮겠습니다 봄이 혼자만 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햇살에 힘줄이 돋습니다 ―김병호(1971~ ) 둘러보니 벌써 서울에도 매화꽃 만발했습니다만 가만 서서 웃으며 바라볼 여유는 없습니다. 꽃 얘기, 봄 소식 맘 놓고 나누지도 못하는 삼월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올해처럼 실감하기도 처음입니다. 가난한 골목에는 반지하의 삶들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시..

좋은 시 2021.07.12

별을 세다/김아인

별을 세다 김아인 무거운 소식일수록 빠르게 날아온다. 어제 저녁설거지를 하다가 사촌동서의 별세를 받았다. 지난 삼복더위에 문병을 다녀왔으니 그리 황망한 일은 아니다. 나는 별세란 말을 들으면 별을 세라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명백한 내 잘못이지만 내 잘못이 아닌 것이 엄마가 죽은 밤에 막내고모가 나를 업고 자꾸 별을 세라 했다. 자다 깬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우물우물 별을 셌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말랑해지도록 열심히 셌다. 하지만 내 불안은 처마 끝 고드름으로 자라고 너덜거리는 문풍지 위로 울음이 번식을 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놓친 엄마의 숨결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안다는 듯이 번식된 울음은 소리로 완성되고 있었다. 소리는 차츰 제 몸피를 키워 ..

좋은 수필 2021.07.12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듣다/문태준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듣다 문태준 오늘 한낮에는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오늘은 일기日記에 기록할 것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행복합니다. 저녁답에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올려 보았습니다. 가을도 아주 깊은 가을입니다. 가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나의 마음과 손이 닿아 있습니다. 밤에 촛불을 켜면서 경허스님의 게송을 생각했습니다. 정청어독월靜聽漁讀月. 사방이 고요해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조차 들을만합니다. 찬방에 앉으니 방에 가득 내가 들어찼습니다. 마치 항아리 하나에 물이 들어와 물만으로 항아리를 가득 채우듯이. 덜어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좋은 수필 2021.07.09

무언가를 새롭게 기다리는 손/문태준

무언가를 새롭게 기다리는 손 문태준 이 저녁에 나는 내 무릎 위에 가만히 올라앉아 있는 손을 바라봅니다. 손은 지금 잠시 쉬고 있습니다. 곧 다시 움직일 테지만, 이 손은 매일매일 누군가를 만나면 그이의 손을 덥석 붙잡던 손입니다. 손은 가장 바깥에 있습니다. 화초의 제일 바깥에 꽃이 있듯이. 손은 몸 가운데서 가장 바깥으로 가서 세상을 쥐고, 흔들고, 만지고, 당기고,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뿌리칩니다. 오늘 나의 손은 세상에 가서 토닥이는 일을 했습니다. 토닥인다는 것은 집작이 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배어든다는 뜻입니다. 이 저녁이 뒤에 오는 밤에게 배어들듯이. 처진 어깨를 토닥여주는 손은 초승달처럼 곱고 환합니다. 토닥여주는 손은 당신의 부름에 내가 응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검은 구름에게 ..

좋은 수필 2021.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