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1

빈집/박종희

빈집/박종희 알맹이를 빼먹어 속이 빈 소라껍데기가 어항 속에 있다. 쫄깃쫄깃한 소라 살을 빼 먹고 나니, 그 큰 소리는 속이 비어 빈집이다. 내장까지 모두 비운 소라껍데기를 씻어 어항 속에 넣어 두었더니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 때는 바다에서, 바다가 키워주는 대로 짠 소금물을 받아먹으며 늙어 갈 것이라 생각했던 소라가, 이젠 어항 속 금붕어들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몇 해 전에 남편이 어릴 때 살았던 집에 갔었따. 생전에 아버님이 많이 아꼈던 집이라 남편은 늘 그 집을 다시 사고 싶다고 했었다. 터가 좋아 그 집으로 이사한 후 돈도 모으고 집안일이 잘 풀렸다고 했던 집은, 남편이 떠나온 후 30여 년이나 지나 앙상하게 뼈만 남아 널브러져 있었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빈집에는..

좋은 수필 2021.09.02

풀각시/고윤자

풀각시/고윤자 상두꾼이 매기는 회심곡이 구슬프다.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하늘 길 가시는 고모할머니를 태운 상엿소리에 애절함이 묻어난다.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으랴만, 고모할머니의 죽음은 더욱 비감을 자아낸다. 산천에 울려 퍼지는 회심곡은 그녀의 이루지 못한 한이 있어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간다. '북망산천 멀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초성 좋은 사람이 선소리를 메기고 상여를 멘 여러 사람이 뒷소리를 받는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 일러주오.' 불행을 등에 지고 태어나신 고모할머니였다. 할아버지가 겨우 아들 하나(아버지)만 달랑 얻고 손을 보지 못하자, 초조해지신 증조할아버지가 서둘러 여자를 보고 거기서 얻게 된 여식이 바로 그녀였다. 같이 자라면서 고모할머니와 우리 아..

좋은 수필 2021.09.02

종이 위의 집 / 김응숙

종이 위의 집 / 김응숙 사무실의 문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공인중개소 앞 사 차선 도로 너머에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단독주택들이 좁은 골목을 끼고 어깨를 맞대던 오래된 동네였는데 재건축이 된 모양이다. 하긴 전철역이 가깝고 나름 학군이 좋은 곳이니 개발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 아파트는 한낮의 햇살 아래서 거대한 트리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반짝거리는 아파트가 깨끗이 닦아놓은 사무실 통유리에 그대로 얼비친다. 통유리에는 일정한 크기의 흰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종이마다에는 ‘00 아파트 00평, 00억’ 등의 매매정보가 쓰여 있다. 평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정 가격 아래의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통유리가 또 하나의 아파트 단지이기라도 한 ..

좋은 수필 2021.09.02

바퀴의 궤적/신영연

바퀴의 궤적 신영연 바퀴 위에서 흔들리는 소리, 그 진동에 따라 바람은 시시각각 태어난다 출생의 비밀이 거기부터라는 듯 바람에 풍경을 실은 바퀴가 굴러간다 수세기의 무게가 휘황휘황 열린 구멍에 한 생을 끼우자 바퀴는 휘청 궁구른다 소란한 길 위에서의 둥근 멀미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온전한 참말이라고 바퀴는 궤적을 그린다 시끄러운 일자 입을 막으며 투명한 바람의 자식을 낳으며 간다 한 시대의 무게와 상생의 중력으로 울퉁불퉁 쿨렁쿨렁 바퀴가 굴러간다

좋은 시 2021.08.29

바퀴의 독백

바퀴의 독백 -물방울에도 상처가 있다 김자희 시인의 두번째 시집을 축하하며 나는, 한세상 길 엿보는 바퀴라오 애초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태어난 목숨 천길 벼랑에서 아픔 달래고 발버둥칠수록 새벽빛 멀어진 날 참으로 많았다오 모질고 모진 길 끌고 다닌 몸뚱이 지문 허물어지고 누추해졌다 해도 가엾다 말하지 마시오 얼룩진 生생 밀어올린 부레옥잠 그 꽃길 제 살갗 찢고 보랏빛 꽃등 밀어올린 가시연 그 꽃길 눈물겨워 더 아름다운 내 길이었다오 물방울에도 상처가 생기듯 내게 상처 더께로 앉았지만 어딘가에 숨겨둔 연한 피 끌어올리는 사월의 숲 그 뜨거운 봄길로 나아가려오 더러는 겨울같은 인생길일지라도 바싹 마른 겨울담 움켜쥔 담쟁이처럼 앞으로 나아갈 시간 기다리는, 나는 세상길 호시탐탐 노리는 푸른 바..

좋은 시 2021.08.29

대문이 말한다 / 김원순

대문이 말한다 / 김원순 그 집은 또 하나의 견고한 성(城)이었다. 바람과 구름조차 비켜가는 집. 잿빛 하늘이 바위처럼 누르는 날이면 성 안은 우물보다 깊은 침묵의 늪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곤 했다. 온갖 새들이 그 성을 무시도 넘나들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더욱 견고하게 빗장을 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성 안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과연 살고 있기나 하는 걸까 몹시도 궁금했다. 단 한 번도 가슴을 활짝 열고 우물보다 깊은 침묵의 정원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색색의 타올이 가끔 옥상의 빨랫줄에서 해바라기 하는 걸 보긴 했다. 움츠렸던 몸을 펴고 긴 기지개를 켜는 듯, 불면으로 뒤척이던 밤을 툭툭 털어내는 듯 바람에게 몸을 맡기는 타올에서 한웅큼의 체온을 읽기도 했다. 때..

좋은 수필 2021.08.28

새벽의 힘 / 김원순

새벽의 힘 / 김원순 밤의 끝엔 언제나 그가 있다. 검푸른 빛 연미복으로 단장하고 댓잎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귀를 여는, 긴 고통 끝에 분만한 밤의 옥동자다. 층층이 쌓인 어둠의 지충을 뚫고 움을 튀은 적요의 꽃이며, 슬그머니 빗장을 푼 어둠의 은밀한 미소다. 그 미소를 맞이하려고 긴 기지개를 켜며 두꺼운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다. 이슬로 막 세수를 끝낸 새벽과 마주선다. 그의 싸늘한 체온이 내 혈관 깊숙이 스며들어 잠자는 의식을 하나, 둘 깨우기 시작한다. 깨어난 의식들이 제자리를 찾느라 잠시 부산스럽다. 어제의 절망과 체념은 이제 묻어버리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으라며 가슴을 활짝 열어보인다. 새벽과 깍지 낀 내 손가락 사이로 별보다 많은 희망의 날들이 은하수 강물되어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은 모든 이에게..

좋은 수필 2021.08.27

무종(霧鐘) / 이지원

무종(霧鐘) / 이지원 회색빛 바다는 하늘과 한 몸을 이루며 경계를 허물었다. 태풍이었다. 성난 파도는 울부짖으며 날뛰고, 바닷새는 갈 길을 몰라 바삐 날아다녔다.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뭍으로 튀어 올라 하얗게 물보라를 뿌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음에 이는 파고를 견디지 못해 나선 길이었다. 흐린 날이면 마음도 함께 사나워진다. 잊은 듯 살고 있다가도 불쑥 밀려드는 기억으로 극도의 불안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언덕 위에서 바다와 마주 섰다. 무섭게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는 가슴속의 멍에를 쓸어가듯 오히려 시원하다. 하지만 몰아치는 바람은 옷자락을 붙들고 기어이 쓰러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몸부림쳤다. 거센 바람을 피해 등대 안으로 몸을 피했다. 나선형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오르자 ..

좋은 수필 2021.08.24

웃기 돌 / 김은주

웃기 돌 / 김은주 끝물 김치 사이로 봄이 오고 있다. 군둥내 나는 김칫독을 비우고 묵은 된장독도 작은 곳으로 옮겼다. 갖추 담아 놓은 장아찌 독도 함께 내다 놓는다. 두어 달 바람을 치게 한 후 오뉴월 풋것이 성해지면 그때 새롭게 장아찌를 담글 요량이다. 장아찌 독을 열자 맨 먼저 내 눈을 사로잡는 게 있다. 새까만 돌고래의 눈알 같은 웃기* 돌이다. 일 년 내도록 장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 그런지 새까맣다 못해 햇살 받은 몸이 눈부시다. 들기름을 먹인 듯 반들거리는 웃기 돌은 처음 우리 집에 데리고 올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져 있다. 돌의 살갗이 한결 매끄럽고 고와진 것이다. 피안을 건너듯 어두운 장독 안에서 끝없이 부유하려는 내용물을 지그시 누르고 앉아 있었을 웃기 돌을 생각하니 고행 승려 못지않..

좋은 수필 2021.08.24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박월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박월수 한 줌 남은 가을도 저물었다. 집 없는 새들은 바람 자는 풀숲에 무더기로 깃들이고 좁은 골목 어귀에는 연탁 화덕을 놓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살 오른 양미리를 굽고 있다. 이른 저녁부터 소주잔을 기울일 모양이다. 조락의 시기가 지나고 속이 그득한 열매를 거둬들인 지금은 성숙의 계절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동시에 소유하고 지배한다. 그 둘 모두를 내면에 품는다. 마음 구석구석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배어난다. 풍족함이 넘쳐서 차라리 사무치게 외로워지는 날, 나는 낮은 첼로 음률이 가슴을 적시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듣는다. 이은미의 목소리로 듣는 이 노래는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 계절의 하늘빛을 닮았다. 아득하기도 하고, 막막한 입맞춤이 ..

좋은 수필 2021.08.23

칠단/김은주

칠단/김은주 고요를 밀치며 아이가 숲에 들었다. 숲에 든 아이는 잡목 사이 낭자한 칠단풍의 혈흔에 홀려 제 몸에 드는 붉은 물은 모르는 듯하다. 습자지에 꽃물 번지듯 아이 등에 스며드는 저 환한 빛깔. 그 붉은 빛에 잠시 현기증이 인다. 아이가 숲에 든 것은 알밤을 물어 나르던 청솔모를 보고서다. 혹 청솔모가 놓친 밤이라도 있나 싶어 숲 안으로 들었을 터인데 가을 숲은 금방 아이를 삼키고 만다. 숲은 아무 기척이 없다. 미동도 없는 숲을 응시하며 아이의 머리가 어디쯤서 떠오를까 꼼짝없이 바라보고 섰다. 보이지 않으니 만질 수 없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소리를 따라 시선만 물 흐르듯 숲을 쓰다듬고 있다. 해가 지도록 산을 돌아 다녔으니 배고플 법도 한데 아이는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팽팽하..

좋은 수필 2021.08.23

절구불佛 / 김은주

절구불佛 / 김은주 떡집 앞 어두운 곳에 백발의 절구 불佛이 있다. 방도 아닌 그곳에서 깨어 있을 때 보다 졸고 있을 때가 더 많지만 감은 눈으로 절구질만은 잘도 한다. 짧게 자른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가시 같은 손목으로 나무공이를 움켜 쥔 채 쉼 없이 절구질을 해 대고 있다. 난만하게 핀 저승꽃이 손등에 가득해도 살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절구질은 그치지 않는다. 기계적인 반복이 지루해질 즘이면 울도 없는 가게에 손님이 찾아 든다. 금방 볶은 통깨를 앉은 자리에서 빻아준다. 노쇠한 팔목은 언제 졸았냐 싶게 빨라진다. 앉은뱅이 의자를 끌어당겨 바빠진 손놀림에 맞추어 수다를 떠는 손님도 있고 장을 봐 올 터이니 빻아놓으라 부탁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손님이 곁에 있으면 나무공이는 더욱 세게 춤을 춘다..

좋은 수필 2021.08.23

능 陵 / 김은주

봄날 한나절을 잘라 내어 주산에 올랐다. 바쁘게 삶의 노를 저어가다 보니 마음속 웅덩이에 괴는 것이 없다. 고여서 깊어 진 것이라야 내 것이 될 터인데 말이다. 마흔을 넘기고 나니 삶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오롯이 쌓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형해形骸같은 아지랑이 속에 옛 가야의 도읍인 고령 시내가 봄 안개 속에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다. 능을 찾아 오르는 길은 완만하고 적당히 호흡이 가쁜 산책로이다. 길 초입에 늘어선 대나무 숲에서는 오소소 소름 돋는 바람이 일고 길 따라 늘어선 배롱나무, 산수유에는 봄이 한껏 부풀고 있다. 죽음의 집을 찾아 가는 길이 이리 몽롱한 따사로움이 느껴져도 되는가? 푸르게 녹이 올랐을 오랜 시간의 발효醱酵를 찾아 지금 나는 주산을 오르고 있다. 먼데서 우륵의 가야금..

좋은 수필 2021.08.23

활/김은주

활 / 김은주 말간 국물에 *졸 복이 몸을 뒤집고 누워있다. 중심이던 머리를 버리고 배를 가르고 나니 온몸이 활처럼 휘었다. 딱 새끼 손가락만한 크기다. 콩나물과 미나리만 동동 떠 있는 국물에 등을 보이며 엎어져 있는 놈도 몇 있다. 졸 복은 목숨이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물사이를 헤엄치고 있는 것 같다. 얇은 졸복 껍질이 뜨거운 국물을 만나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오그라 들었다. 동그랗게 말린 껍질은 제 몸을 숨기고 반대쪽 살은 수축을 견디지 못해 훤히 제 속을 열었다. 성급하게 말린 껍질 때문에 살들이 하얗게 뒤집어진 것이다. 살과 껍질이 일심동체가 되지 못한 탓이다. 하얗게 뒤집힌 살들 사이로 잔가시들이 즐비하다. 봄이라 예민해진 나는 이 부드러운 뼈마저도 입안에서 거슬린다. 우선 껍질부터 벗겨..

좋은 수필 2021.08.23

노쇠한 몸에 꽃을 피우려니 / 김은주

노쇠한 몸에 꽃을 피우려니 / 김은주 나이 먹은 백일홍이 술을 마신다. 일 년에 한번 거창하게 한 잔 하는 날이다. 보살님이 날 선 곡괭이로 백일홍 발치의 살을 파낸다. 둥글게 파낸 골을 따라 술이 흐른다. 흐르던 술이 서서히 스며들고 난 자리에 다시 한통이 더 부어진다. 둥근 흰 띠는 강물처럼 백일홍을 감싼다. 족히 스무 통도 넘어 보이는 막걸리가 화단가에 늘어서 있다. 저걸 다 마시려나보다. 배포도 크지. 너 댓 통 붓고 나니 가지가 부르르 몸을 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푸르다 못해 시리다. 가을의 끝자락이다. 득달같이 달려올 겨울이 코앞이다. 한 줄금 이는 바람에 혈관 같이 뻗은 잔가지에서 서서히 피가 돌기 시작한다. 취기가 도는가 보다. 휘청거리는 가지의 모습이 유연하다. 그리 마셨는데도 안..

좋은 수필 2021.08.23

본포 나루터/김은주

본포 나루터/김은주 강물이 긴 한 숨을 돌리고 있다. 태백 황지에서 시작한 물길은 구무소를 지나 굽이굽이 긴 여정에 든다. 그 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 낙동강 하구. 완만해진 강폭에 속도가 느려진 강물은 본포 나루에 닿아서는 제법 해찰을 부리며 쉬어 간다. 어디서부터 갈고 부서졌는지 본포나루의 모래는 분가루 같다. 보드라운 모래 위에 겨울바람이 스치니 촘촘히 모래주름이 생긴다. 멀리 카페 지붕위로 미루나무 한그루 우뚝 솟아 있고 그 위에 까치집이 걸려 있다. 그 아래 낡은 함석지붕이 바람에 덜컹거린다.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집도, 흔들리는 카페의 추녀도, 다 위태로워 보인다. 위태로운 카페 저 너무 겨울이라 물길이 마른 강은 바닥을 드러낸 채 낮은 쪽으로만 흐르고 있다. 황량한 이 나루 끝에는 작은 ..

좋은 수필 2021.08.23

죽담/주인석

죽담/주인석 담에도 성격이 있다. 글자나 꽃그림을 넣어 쌓은 화초담은 화려하고 꼼꼼한 성격에 귀족적이고 싸리나 갈대를 엮어 만든 바자울은 소박하고 엉성한 성격에 서민적이다. 흙에다 잘게 썬 짚을 섞어 쌓은 흙담은 소극적이며 여성스럽고 자연석을 그대로 가져와 얼키설키 쌓은 돌담은 적극적이고 남성적이다. 흙과 짚 그리고 돌을 적당히 섞어 쌓은 죽담은 흙담과 돌담의 성격을 잘 어울러 만든 담이다. 호젓한 시골길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담은 죽담이다. 흙에 듬성듬성 박힌 돌과 꼬리를 마저 거두어들이지 못해 삐죽 나온 짚은 꾸미지 않아 풋풋함이 그대로 살아 있는 옛 친구를 만난 듯 정감이 간다. 죽담의 흙과 짚과 돌은 서로 억누르는 듯하면서 치켜세워 주는 사이이고 밀어내는 듯하면서 보듬어 주는 사이이며 이질적인 성격..

좋은 수필 2021.08.23

육십 촉 전구 / 김은주

며칠 전부터 몸 구석에 검은 띠를 두르는가 싶더니 끝내 숨이 멎었다. 요 며칠 조짐이 좋지 않았다. 영 희뜩하니 밝지 않고 가끔은 푸르르 떨 듯 빛의 균열이 심하기도 했다. 전류의 영양을 영 받아들이지 못한 듯 어둑하더니 예고도 없이 화장실을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집에 전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둠을 더듬에 밤길에 나섰다. 발길에 채는 돌들이 어둠 속으로 금방 나선 탓인지 낯설다. 어둠을 어둠인 채로 단 일 초도 견뎌 보지 못한 문명화된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며 슈퍼로 향했다. 골목길을 벗어나 가로등 아래 섰다. 잠시 빛을 잃었을 뿐인데 가로등의 불빛이 반갑다. 무엇이든 눈으로 확인되어야만 편안해지는 심리는 불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디지 않는 세대라 그런 것 같다. 슈퍼에 들러 전구를 고..

좋은 수필 2021.08.23

산촌의 봄/김애자

산촌의 봄/김애자 산촌에서 살면 말벗이 그립다. 거실을 화랑으로 꾸민 것은 말벗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서다. 빈 벽이 없어 다소 협소해 보이기는 해도, 소장품 태반이 작가들에게 직접 선물로 받은 것이어서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자신의 혈점이나 다름없는 작품을 선선히 내준것도 고맙고, 작품에서 슬몃 풍겨 나오는 개개인의 개성과 체취와 온기, 내지는 비장미悲壯美를 통해 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된다. 특히 작품에서 느끼는 비장미란 예藝를 이루기 위해 사제처럼 살아온 그들의 삶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제단 앞에 새로운 제물을 올리려는 신성한 갈증으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창작에 몰입하였을 터이다. 벽에 걸린 금강경은 한 서예가의 몸으로 전사轉寫한 것이다. 십수 년을 사바에서 부처의 세계로..

좋은 수필 2021.08.23

시접/정경자

시접/정경자 밤이 이슥하도록 시댁은 시끌벅적했다. 어머니 혼자 계셔서 고적하던 집안이 시동생의 때늦은 결혼으로 모처럼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뒤풀이도 끝나고 시댁에 남아 주무시고 가실 몇몇의 친척들만 남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눕거나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무리 속에 미동조차 않는 이가 이었다. 잔칫집이면 으레 질펀한 술자리 끝에 노랫가락과 한바탕 춤사위로 어우러질 만도하련만 큰댁의 형님은 하루 종일 침묵할 뿐이었다. 누구보다 작은 집 '막내 되림'의 혼사를 학수고대했던 손윗동서였는데 가타부타 말이 없다. 질부姪婦가 저고리를 벗겨주는 대로 멍하니 몸을 내맡기는 형님은 치매를 앓고 있다. "저고리 이리 주게." 그녀의 저고리를 받아 쥐고 옷걸이에 걸려던 내게 문득 적삼의 옆선이 눈에 들어왔다. ..

좋은 수필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