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7/23 2

하얀 소묘/서숙

하얀 소묘/서숙하얀색은 가장 많이 드러내며 동시에 가장 넓게 가려주는 바탕색이다. 꿈과 환상의 길목을 열기도 슬픔과 체념으 조용히 가누기도 하는 색, 솔직하면서도 은밀하고 세심하면서도 대범하고 흔하면서도 귀한, 색 아닌 색, 아니 색중의 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름철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유난히 내 마음속의 흰색이 아롱아롱 눈부시다.    내 안의 흰빛을 따라 시간을 거스르면 바지랑대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너울거리던 흰 무명천이 눈앞을 가득 막아선다. 온 폭을 이은 이불잇은 빨랫줄을 다 차지하고 정오의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났다. ​길게 누워 어른대는 그림자를 거느리고 옥양목의 홑청이 꾸득꾸득 마르면 나는 그 천을 동그르르 작은 몸에 감았다 폈다하며 들락거렸다. 그럴 때 하얀 천은 범선의 흰 돛이 되..

좋은 수필 2024.07.23

질그릇 / 배종팔

질그릇 / 배종팔     옛것이라 손을 타면 쉬이 깨질까 싶어 찬장 깊숙이 묵혀 둔 것이 잘못이었다.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설거지가 귀찮아 찬장의 그릇을 죄다 꺼내 썼다. 티끌만한 생채기도 큰 흠집이 되는 데 그릇만한 게 있을까.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마냥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찬장 한켠에 갇혀 딸아이에게 대물림될 뻔한 그릇이 세상 밖으로 나와 한 식구가 된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아이 손 한 뼘 정도의 아가리에 굽이 짧고 허리가 배흘림인, 국수집에나 있음직한 그 질그릇은 이제 다른 그릇과 나란히 찬장에 자리 잡고 있다.거죽이 거무튀튀하고 모양마저 볼품없는, 골동품으로도 실생활 용기로도 쓰기에 어중간한 저 막사발을 아내의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또 아내에게 어떤 의미로 물려주..

좋은 수필 2024.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