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소묘/서숙하얀색은 가장 많이 드러내며 동시에 가장 넓게 가려주는 바탕색이다. 꿈과 환상의 길목을 열기도 슬픔과 체념으 조용히 가누기도 하는 색, 솔직하면서도 은밀하고 세심하면서도 대범하고 흔하면서도 귀한, 색 아닌 색, 아니 색중의 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름철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유난히 내 마음속의 흰색이 아롱아롱 눈부시다. 내 안의 흰빛을 따라 시간을 거스르면 바지랑대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너울거리던 흰 무명천이 눈앞을 가득 막아선다. 온 폭을 이은 이불잇은 빨랫줄을 다 차지하고 정오의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났다. 길게 누워 어른대는 그림자를 거느리고 옥양목의 홑청이 꾸득꾸득 마르면 나는 그 천을 동그르르 작은 몸에 감았다 폈다하며 들락거렸다. 그럴 때 하얀 천은 범선의 흰 돛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