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7/25 5

홀로서기 / 장수영

홀로서기 / 장수영아침 안개가 들녘위에 이불처럼 누워있다. 안개 속에 잠긴 절집을 기대하며 팔공산 자락에 구름처럼 머무는 거조암을 찾았다. 절 초입에 들어서면 가지런한 담장너머로 반쯤 가려진 영산전이 단아하게 앉아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 마음이 바빠진다.영산루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한 발 돌계단에 올라서려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구름 한 점이 내려앉은 돌확에 감로수가 찰랑거린다.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속세에서 찌든 영혼을 말끔히 씻어내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석탑 뒤로 영산전이 민얼굴을 드러낸다. 단청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따뜻한 남편의 품 같이 느껴진다.영산루를 거쳐 계단을 오르면 석탑이 영산전 앞에 단아하게 서 있다. 석탑에는 불자들이 한 장 한 장 매듭을 지어놓은 소원 띠를..

좋은 수필 2024.07.25

구두 / 정경자

구두 / 정경자벗어놓은 구두에도 표정이 있다. 작고 하찮게 생각하는 신발에도 주인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이다.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첫 대면일수록 인상은 참으로 중요하다. 첫인상이라면 흔히들 얼굴이나 옷차람일 떠올린다. 얼굴이나 옷차림이 의도된 것이라면 땅바닥에 붙어 옷에 가려진 채, 무심해질 수 있는 차림새는 신발인 셈이다. 그것으로 나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개성, 성품까지도 미루어 짐작 해본다.남편의 구두 때문에 우리 집에는 며칠째 한랭전선이다. 싸움의 발단은 남편이 구두 뒤축을 꺾어 신는데서 비롯되었다. 올바르게 착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벗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딱 남편의 유들유들한 성격을 닮았다. 모질지 않는 유순한 심성 때문에 오늘날 한 이불을 덮는 식구가 되었지만 남..

좋은 수필 2024.07.25

손 / 남영숙

손 / 남영숙금방 세수한 얼굴은 그대로 식물성이다. 일체의 상념을 씻어낸 표정이다. 톡톡 화장품을 바르는 목과 얼굴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나 수고한 손에겐 화장품이 아껴진다. 보습제 하나면 그만이다. 문득 노고에 비해 소홀히 대접받는 손에 대한 생각을 한다.사람들이 세상과 맺고 있는 모든 연결고리의 시작이 되는 신체의 부분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손이 있어 가능해진다. 인간의 인프라인 것이다. 생활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보병처럼 묵묵하다. 음식을 해내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글씨를 쓰며 반가운 이의 손을 덥석 잡고, 온갖 궂은일과 즐거운 일에 첨병으로 나선다.그렇게 세상과의 만남은 손으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엮어주는 최초의 동작도 손에서 시작된다. 처음으로 이성과 손을 잡던 따스하고 말랑..

좋은 수필 2024.07.25

누드모델 / 서은영

누드모델 / 서은영여자의 몸은 곡선이다. 부드럽게 흐르는 그 안에 뼈마디 관절이 들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둥근 아기집을 품고 지아비를 품고 세상마저도 품어내는 여자는 태생부터 곡선이어야 하는 숙명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신비로운 탄생의 공간을 품으며 동그랗게 무엇이든 갈무리하고 밖으로 내색하지 않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여자의 몸, 가히 곡선의 겹침이다.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하던 여중생 때였다. 미술 시간은 시험기간이나 되어서야 다른 과목들처럼 책을 펼치고 약간의 이론 수업을 했다. 총각 미술 선생님이 ‘누드화란 말이지….’라고 설명하자 나른하던 교실 분위기가 일순간에 긴장감 속으로 빠졌다. 나비 한 쌍만 어울려 날고 있어도 공연스레 얼굴이 붉어지던 우리는 덜 익은 풋사과처럼 ‘푸풋..

좋은 수필 2024.07.25

지중해의 여름 / 한복용

지중해의 여름 / 한복용   푸른 물감을 맘껏 풀어놓은 듯한 지중해 해변에 나는 지금 앉아 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를 따라 호텔에서부터 십여 분쯤 걸어 나왔다. 멀리 타우루스산맥이 건너다보이고 바람은 그곳으로부터 줄기차게 불어온다. 망연히 서서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을 바라본다. 그동안 내가 맞이하고 싶었던 여름과의 거리는 눈 덮인 산과 안탈리아 해변의 사이만큼이나 멀었으리라.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라도 한다는 듯 바다는 주름진 얼굴로 끊임없이 내게로 향해 달려온다.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나는 몇 년을 망설였던가. 오고 싶은 마음만큼 간절히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첫 방문은 10년 전, 겨울이었다. 그땐 성난 파도 위로 거대한 줄기를 뻗은 눈 덮인 타우루스산맥만 눈에 들어왔었다. 그 겨울에 글과 사진으로..

좋은 수필 2024.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