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조율/유현주

에세이향기 2021. 5. 14. 12:21

조율 / 유현주

 

TV채널을 돌리다‘국악한마당’과 마주쳤다. 비췻빛 한복을 입은 여자가 창을 하고 한편에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가 장구를 치고 있다. 장구는 소리를 밀었다 당기고 때때로 튕겨주며 가락과 조화를 이룬다. 화면을 응시하다 나도 모르게 흐름 따라 손가락 장단을 맞추고 있다. 이런 시간과 마주하면 한때 저 자리를 지키신 적이 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마치 수십 년 후에 찾아낸 일기장을 보는 듯 소중한 기억도 살아난다. 그중에 지금도 시골집 안방 선반에 놓여 있는 장구를 만들던 때는 더없이 특별하다. 내 바탕이며 정서의 원류가 된 날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본업은 농사꾼이지만 표면적인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당신께서 평생 업으로 여긴 것은 시조창(時調唱)이었고 동반되는 것이 장구였다. 농번기에는 피치 못해 소를 몰았어도 한 달 중 열흘 남짓 집에 계실 때는 미완성의 장구통을 끌어안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라 가라 할 것도 없이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아 재잘거리며 통나무가 변신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우선 옹이 없는 오동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그늘에 멍석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밑동은 의자가 되고 연장은 망치와 끌 뿐이었다. 아버지는 연장과 삼위일체가 되어서 통나무를 파고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 여일 공을 들이면 밑그림대로 오동나무의 잘록한 허리가 드러났다. 어느새 아버지의 손에 물집이 생기고 갈라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무리에 가까워질수록 망치가 끌을 때리는 힘이 부드러워졌다. 한결 예민해진 손끝에 끌의 조준 반경은 좁아지고 속살의 두께는 미농지처럼 투명해졌다. 지루해진 내가 그만 파도 되지 않느냐 하면 아직 소리가 둥글지 않다고 하셨다. 공명통의 빈 공간은 너그러울 것 같지만 완고해서 자칫 정신을 팔았다가는 뭇소리들이 들어앉는다는 것이었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진지함에 보채기를 그만 두곤 했다. 후로도 아버지는 사나흘 더 다듬는 것에만 몰두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양편의 공명통을 세우고 뉘어 보기를 반복하다 고개를 끄덕여야 바깥에서 할 일이 끝났다.

방에서 작업을 할 때에는 먼지가 없어서 좋았다. 거기다 굳은 접착제를 녹이거나 딱딱한 가죽을 유연하게 하는데 쓰이는 화로가 있었다. 덕분에 손이 시렵지 않아 작업하기도 수월했다. 주위에는 만물상에 미리 주문해 사 두었던 쇠가죽과 줄, 고리, 니스 등이 즐비했다. 니스를 칠할 때는 냄새가 났지만 곧 사라졌고 마르고 나면 나도 장구가 완성되는 것에 힘을 보탰다. 어머니가 가끔씩 잔일을 거들었어도 조율을 할 때만큼은 나를 앞에 앉히셨다. 먼저 공명통을 쇠가죽으로 막은 후 양쪽 테두리에 등분한 간격으로 고리를 걸었다. 줄은 은행잎 모양의 작은 가죽(조이개)을 좌우로 통과하며 之자 모양으로 고리에 연결되었다. 조율의 축이 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관장하는 것은 조이개였다. 팽팽해진 두 줄을 감싼 조이개를 당기고 풀며 아버지의 입맛에 맞추는 일이 내 몫이었다.

개체들이 장구의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오동나무처럼 자신을 버리고 바꾸며 합의를 해야 한다. 합의점을 찾아 잘 조율된 울림에선 오동나무의 바람소리와 못다 한 소 울음이 들린다고 하셨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장구 치는 이의 심성을 싣고 제대로 된 소리로 탄생하는 것이었다. 일련의 작업은 길들지 않은 황소가 부지런한 농부를 만나 훌륭한 농우가 되는 과정과도 같았다. 어느 손길에 얼마만큼의 정성을 들이느냐가 장구의 질을 가름한다면 분명 아버지에게 선택된 오동나무는 최고의 장인을 만난 격이었다.

도공이 잘못된 도기를 식기도 전에 깨버리는 건 조율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구는 원하지 않는 소리가 울리면 왔던 길을 돌아가 공명통 안을 다시 다듬고 가죽을 바꾸고 줄의 꼬임을 살펴서 바른길을 찾는다. 모양만 번듯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조율을 마치고 나서도 아버지는 미세한 간격으로 줄을 조절하며 소리의 티를 골라냈고 마침내 흡족한 미소로 매듭을 지었다. 어린 마음으로도 모든 과정이 중요하지만 조율이 제대로 되어야 시간과 공이 완벽에 닿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었다.

조율은 감이면서 경험이었다. 돌이켜 보면 성공과 실패는 그 기술에 의해 좌우되었다. 고집쟁이였던 어린 시절은 엉성했고 무턱대고 저지르고 보던 젊은 날엔 끊어질 듯 팽팽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나도 모르게 느슨해져 엇박자가 나기 일쑤였다. 굳이 여유라고 변명을 하지만 긴장감이 없다면 탄탄한 사고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수에 찔리고 베인다고 모두 상처로 남는 것이 아닐진대 몸부터 사리는 안일함도 있다. 나를 대화가 통해 알수록 좋아진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성격이라거나 주장이 강해 부담스럽다는 사람도 있다. 조율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성공하지 못한 조율은 치명적인 실수를 낳기도 하고 아쉬움과 후회로 증명되었다.

장구가 한 몸에 두 개의 공명통을 가진 건 조화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조율 장치는 그 양편을 이해하며 높고 낮은 세상 소리에 적절히 어울리라는 방편일 것이다. 넘치거나 부족함 없는 힘으로 끌을 다스리던 망치의 적당함과 거친 소리를 부드럽게 회유할 줄 아는 공명통의 둥근 사고를 가질 일이다. 보이지 않는 굴곡진 곳을 찾아내 바로잡던 아버지의 혜안처럼 내면의 모를 깎아낸다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한결 매끄러울 것이다. 그리하여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이웃에게 열린 마음으로 임할 때 사물(四物)과 잘 어우러지는 장단이 될 것이 확실하다. 더불어 낡은 집의 웃풍을 막아주던 화로의 온기까지 품고 산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부드러워질 것을 믿는다. 이것이 인성과 감성을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며 조율 장치를 맡기셨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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