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정오의 결투/송혜영

에세이향기 2023. 4. 21. 03:03

정오의 결투/송혜영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한낮의 정적을 깬다.

정수리를 녹여버릴 듯 무자비하게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 두 남자가 마주 서 있다. 부감으로 잡힌 마른 남자와 퉁퉁한 남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어깨 없는 러닝셔츠 바람의 퉁퉁한 남자는 가겟집 주인이다.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바짝 마른 남자는 물건을 사러온 사람인 듯하다. 가는 금태 안경을 낀 손님 쪽이 좀 더 흥분 상태다.

깡마른 볼을 씰룩거리면서 대뜸 부적절한 성행위를 할 의사를 드러낸다.

어디다 욕질이냐고 가게 주인이 목소리를 높인다.

네가 먼저 욕하지 않았느냐고 손님이 대든다.

내가 언제 욕했느냐고 따진다.

네가 반말 하지 않았느냐고 째진 눈을 치뜬다.

반말한 게 욕이냐고 굵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라린다.

네가 뭔데 나한테 반말하느냐며 턱을 쳐든다.

나보다 어린 새끼한테 반말하면 어떠냐며 시커먼 눈썹을 꿈틀거린다.

“ 뭐 새끼?”

깡마른 남자의 입에서 여성 성기를 비하하는 단어가 접두사로 사용된 단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사된다.

“ 뭐 새꺄?”

욕을 자제하던 가게 주인의 입에서도 부적절한 성관계를 할 적극적인 의향을 내비치는 문장이 튀어나온다.

정오의 태양 아래 욕설의 공방전이 벌어진다. 욕이 대부분 남녀 성기와 부적절한 성행위에 한정되어 있다. 다양성이 못내 아쉽다.

더 이상 들어주기 지겨울 즈음, 중재자가 나타난다. 조금만 움직여도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 날씨다. 되도록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은 듯, 말하기도 귀찮은 듯 마지못해 나선 걸음새다. 느릿한 말투로 하루 이틀 보고 말 사이도 아닌데 그만 하란다.

나이 지긋한 관리인의 권위가 잠시 먹히는 지 둘의 간격이 좀 벌어진다.

가겟집 남자가 손을 털며 외상값이나 갚아 새끼야 하며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려 한다. 그때 안경잡이가 개의 성기를 주인 남자와 동일시한다. 남자가 문 안으로 들여놓던 한 발을 빼, 홱 돌아선다.

“뭐? 씹쌔야.”

“왜? 조까튼 쌔꺄.”

다시 불이 붙는다. 이제 과격한 신체 접촉을 할 의사를 강력히 시사한다.

마른 남자가 주먹을 들어 칠 기세다.

“어쭈! 치시겠다. 너 돈 많이 벌어놨냐? 그래! 때려봐. 때려봐.”

정말 맞고 싶어 죽겠다는 듯 살찐 빡빡머리를 안경잡이의 앙상한 가슴팍에 들이댄다.

“확! 콱! 막!”

입으로 머리를, 턱을, 배를 난타한다.

 

그냥 두었다가는 난투극이 벌어질 판이다. 끝난 줄 알고 짧은 그늘로 들어간 관리실 아저씨가 미간을 접으며 다시 햇볕아래 나선다. 이번에는 입 대신 팔을 써 코가 닿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떼어놓는다.

“한 쪽이 참으면 쌈이 안 된다. 니가 참어.”

가게 주인이 먼저 머리를 돌린다.

한 대도 못 친 민망한 주먹을 허공에 휘저으며 너 장사 못하게 한다고 손님이 엄포를 놓는다.

너 같은 새끼 안와도 장사 잘하니 걱정 말란다.

캭. 가게 주인이 손님 발치를 겨냥해 가래를 뱉는다.

퉤. 손님이 가게를 조준해 침을 발사한다,

존중과 이해의 문제로 땀범벅이 된 남자들은 상호 고농축 분비물 교환으로 울분을 얼추 해소한 듯하다. 사내들의 일반적인 싸움 패턴을 성실히 따른 마무리다.

가게 주인이 문을 탁 닫고 들어간다. 손님이 슬리퍼를 직직 끌며 빈손으로 땡볕을 가로지른다. 등판이 푹 젖은 관리실 아저씨가 구시렁거리며 관리실로 들어간다.

 

8월 정오의 태양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 텅 빈 광장을 지글지글 태우고 있다.

 

 

 

 

 숲/정승윤

 

 

 

 

 

연록의 숲이 있었고 그 사이에 반짝거리는 동백의 숲도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나무마다 따로 흔들리는 숲이 있었고, 숲 전체가 함께 흔들리는 숲도 있었다. 멀리서 보면 부동不動의 숲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파리 하나하나가 다 떨고 있는 숲도 있었다. 새들이 찾아와 깃드는 숲도 있었고, 까마귀가 머리 위에서 배회하는 숲도 있었다. 몇 그루의 전나무가 기둥처럼 서 있다가 석양이면 긴 열주列柱의 신전이 되는 숲도 있었다. 뱁새, 직박구리, 쏙독새들이 우는 숲이 있었고, 오로지 뜸부기만 우는 숲도 있었다. 긴 행렬을 지어 언제나 산마루를 넘어가고 있는 숲도 있었고, 황혼이면 불붙는 자작나무 숲도 있었다. 구름이 피어나는 숲이 있었고, 구름이 그 뿌리를 내리는 숲도 있었다. 경전經典처럼 날마다 새로이 읽히는 숲도 있었고, 언제나 침묵에 쌓여 있는 숲도 있었다. 나무만이 살고 있는 숲이 있었고, 어딘가에 풀밭을 숨기고 있는 숲도 있었다.

 

고라니 한 마리가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숲이 있었고, 사람이 사람을 피해 숨어 사는 숲도 있었다. 우리는 그를 은자隱者라고 불렀으나 그는 언제나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만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스스로에게 자신을 숨길 수는 없었다. 우리가 우리를 숨기는 숲이 있었고, 우리가 우리를 찾아가는 숲이 있었다.

 

바다 같은 숲이 있었다. 원래는 바다에 잠겨 있다가 융기해 올라온 숲이 있었다. 지금도 패각貝殼이 발견되는 숲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아침이면 햇빛이 가시고기처럼 헤엄쳐 다녔다. 아침이면 햇빛이 가시고기의 뼈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숲은 비가 오면 자욱이 바다에 잠겼다.

 

바다 한 가운데 섬이 된 숲이 있었다. 그 숲은 자신이 섬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 숲 한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는 다른 나무와는 좀 다르게 보였다. 가지들이 사람의 지체처럼 보였다. 사람의 팔이 우아하게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나무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이었다. 천 개의 가지에 천 개의 잎이 달려 있었다. 그 가지들은 곧 우화羽化해서 하늘로 비상할 것처럼 보였다.

 

아침이면 숲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석양이 되면 숲 위에서 배회한다. 밤이 되면 새들은 숲에 깃든다. 숲이 끝나는 곳에 한 나무가 있고 그 나무 끝에 새집이 있다. 밤이면 새들의 꿈 위로 끝없는 성좌가 펼쳐진다. 인간의 길이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숲길을 걷는 사람은 그 끝없는 길을 걷는 것이다. 숲 안에서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고 새는 날고 구름은 피어오르고 인간은 걷는 것이다.

 

 

 

 

 

낙지/최장순

 

 

 

 

“뻘낙지 한 마리면 보약 한 첩 먹는 거랑 같지라.”

여인의 걸쭉한 사투리에서 갯내가 풍긴다. 해풍에 그을린 얼굴에 자리 잡은 세월의 굴곡이 토속적인 음성과 잘 어울리는 그녀. 마디 굵은 손으로 움켜쥐고 흔들어 보이는 낙지가 잠든 내안의 욕망을 일으켜 세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늙었을까. 두루뭉술한 몸에서 배어나오는 진한 삶의 갯내.

 

‘지쳐 쓰러진 소도 벌떡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 힘을 받아볼까?’ 그녀가 권하는 곳에 일행은 자리를 잡는다. 세련된 도회지 얼굴에 보얗게 분을 바른 얼굴이었다면 우린 아마도 다른 집으로 걸음을 옮겼을지도 모른다. 낙지와 그것을 움켜잡고 있는 그녀가 묘하게 어울린다. 음식점 넓은 창으로 성큼 바다가 다가선다. 마침 썰물 때여서 드러난 개펄이 여인의 끈적한 음성처럼 마음에 달라붙는다.

 

 주문한 연포탕이 준비되기 전 내 놓는 밑반찬. 상에 놓인 음식을 훑던 시장한 눈들이 한곳으로 모아진다. 하얀 접시위에 꼼틀거리는 도막난 세발낙지. 머리도 몸통도 구분되지 않은 마디들. 이미 칼을 받은 몸이지만 생명은 끈질긴 것. 아직도 본능적으로 꿈틀댄다. 잔인할수록 미각은 싱싱한 것이어서 바다 한 접시를 오가는 손이 바쁘다.

 

 ‘묵은 낙지 꿰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목숨이 끊어진 낙지는 다루기 쉽다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싱싱함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 고통으로 몸부림칠수록 잔인한 식감은 커진다. 토막처진 육신들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삶을 붙잡는 중이다. 뻘밭을 기던 흡반의 힘으로 접시에 들러붙는다. 쾌감이듯 돋아나는 미각. 젓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모으며,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산 입을 당해낼까, 한 토막 집어 기름장에 찍는다. 입 안 가득 참기름냄새, 뒤 이어 쏴아 바다 향이 번진다. 그렇다고 순순히 기를 꺾는 낙지가 아니어서 혀에 닿는가싶더니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혀에 휘감기는 맛을 오독오독 어금니로 씹으면 육즙이 미각의 돌기를 자극한다.

 

“사람들은 어린 낙지를 씹으면서, 앳된 여자를 품어 녹이는 것을 떠올려 말하곤 하였다”

소설 한 대목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번지는 입가의 웃음을 닦는다. 여인이 냄비를 가져와 가스레인지에 얹는다. 육수 속 박속이 하얗게 웃고 있다. 야채를 곁들이고 낙지는 접시에 따로 들고 온다. 이게 바로 여인이 말해준 보약인가보다.

 

조금 전에 먹은 세발낙지가 차지면서도 여린 맛이라면, 지금 눈앞의 낙지는 거친 파도와 닮은 성깔 있는 맛, 질퍽한 뻘의 맛이다. 세발낙지가 어린 여자라면 이 낙지는 원숙한 여자, 세상의 단맛과 쓴맛에 몇 번이고 버팅기다가 마침내 문드러진 눈물을 쏟는 중년의 여인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인과 낙지가 잘 어울려보였던 것은. 낙지를 움켜쥐고 냄비에 넣는 여인의 손놀림을 보며 이제야 낙지의 참맛을 볼 것 같은 생각에 침을 삼킨다. 그 손에서 개펄에 엎드려 평생을 사는 여인들의 삶이 쏟아진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뻘에 널을 밀고 가는 여인들의 삶은 바닥을 닮았다. 뻘은 바닷사람들의 바닥이다. 그 질퍽한 곳에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있어 아낙들은 날마다 뻘을 뒤진다. 바닥은 삶을 헤쳐 나가는 근성을 키우고, 그 근성은 뻘에서 제 냄새를 풍겨 삶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 그래서 낙지는 뻘의 맛, 진정한 바다의 맛, 단내 나는 바닥의 맛이다. 산다는 것은 낙지처럼, 세상의 바닥을 치열하고 간절하게 건너가는 것이 아니던가.

 

냄비에 입수한 여덟 개의 다리, 아니 여덟 개의 팔이 몸부림을 친다. 무엇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듯 냄비가장자리로 기어 나온다. 필사의 몸부림과 식욕은 비례하는 걸까? 낙지를 바라보는 눈은 연민과 희열의 이율배반. 금세 흡반은 꽃처럼 피어난다. 드디어 용트림하던 바다 한 마리가 숨을 거둔 것이다. 시원한 국물로 목을 축인 다음, 박속 향에 우러난 토막 난 바다를 포식한다.

 

포만감을 안고 음식점을 나오는데 몸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저 바닥의 근성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지나가던 갯바람이 뻘밭으로 내 등을 자꾸만 민다.

 

 

 

**

표현방법의 차이, 감동의 차이

 

최연수

 

 

 

1. [정오의 결투]

 

 

 

성적인 언어 혹은 비속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문학이 아니라고 하여야 하는가. 문학은 고상한 기법의 표현으로 아름다운 감동을 가져와야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탐탁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방법의 차이, 혹은 생각의 차이다.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한낮의 정적을 깬다.

정수리를 녹여버릴 듯 무자비하게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 두 남자가 마주 서 있다. 부감으로 잡힌 마른 남자와 퉁퉁한 남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어깨 없는 러닝셔츠 바람의 퉁퉁한 남자는 가겟집 주인이다.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바짝 마른 남자는 물건을 사러온 사람인 듯하다. 가는 금테 안경을 낀 손님 쪽이 좀 더 흥분 상태다.

깡마른 볼을 씰룩거리면서 대뜸 부적절한 성행위를 할 의사를 드러낸다.

어디다 욕질이냐고 가게 주인이 목소리를 높인다.

네가 먼저 욕하지 않았느냐고 손님이 대든다.

내가 언제 욕했느냐고 따진다.

네가 반말 하지 않았느냐고 째진 눈을 치뜬다.

반말한 게 욕이냐고 굵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라린다.

네가 뭔데 나한테 반말하느냐며 턱을 쳐든다.

나보다 어린 새끼한테 반말하면 어떠냐며 시커먼 눈썹을 꿈틀거린다.”

 

정오, “땡볕”아래 두 남자가 싸우고 있다. 화자는 “부감으로 잡히”는 이 광경을 묘사한다. 아니, 보여준다. 화자는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관찰자 혹은 제3자의 입장이다. 두 남자의 다툼이 “결투”가 되기까지 “정수리를 녹여버릴 듯” “무자비하게” “지글지글” 등의 부사어가 차용되고, “팽팽한 긴장감”이 오가는 두 사람의 행동을 과격화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대든다” “따진다” “치뜬다” “부리린다” “쳐든다” “꿈틀거린다” 등의 동사가 차용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욕설”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욕설은 주로 “남녀 성기와 부적절한 성행위에 한정”되어있어 화자는 “다양성이 못내 아쉽다”고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오가는 욕은 고스란히 활자화되지 않는다. 단순히 “접두사”로 사용된다든지, “의사를 드러낸다” 등으로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실제로 문장으로 옮겨온다면 얼마나 저속할 것인가. 상상의 효과 또한 여지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는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문학지침과도 통한다. 짧은 한행으로 마감하는 문장들은 긴장감을 높이는 동시에 영화의 지문 같은 역할을 해주는 효과가 있다. 독자는 마치 자신이 화자 혹은 제 3자가 되어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상상의 효과를 획득하는데, 영화의 한 장면으로 그것을 옮겨볼 수 있다.

 

“어깨 없는 러닝셔츠바람의 퉁퉁한” ‘송강호’와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바짝 마른 남자” 설경구가 다투고 있다. 그 사이, “느릿한 말투”의 ‘안성기’가 “중재”를 한다. 떨어질 듯 하다가 다시 붙는 싸움을 이층에서 ‘문소리’가 내려다보고 있다. 독자는 모두 여배우 문소리의 자리로 이동한 것이다. “확! 콱! 막!” “머리를, 턱을, 배를 난타”하는 말들. 그러나 그들의 결투는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난투극”의 실체는 그저 “성”을 빌려온 욕설. “짧은 그늘”이 지는 정오의 결투는 “캭” “투‘” “탁” 등 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그래서 관중은 오로지 화자 자신뿐, “텅 빈 광장”인 것이다.

 

 송혜영의 [정오의 결투]는 자칫 외면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수위의 단어들을 아슬아슬하게 사용하지만, 그것을 노골화시키는 찌푸림을 능수능란하게 피해가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독자의 상상력을 동원시키는 효과를 얻으면서 동시에  문학의 진솔함 내지는 문학건강성을 보여준다.

소설 같은, 영화 같은 새로운 수필의 면모가 흥미롭다.

 

 

 

2. [숲]

 

 

문학적 소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은 이미 그 역사를 따지기조차 어렵다. 그만큼 생활 속에, 그리고 문학 속에 깊이 뿌리내려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의 자연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이 스미고 파고들어 자연을 하나의 소통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연록의 숲이 있었고 그 사이에 반짝거리는 동백의 숲도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나무마다 따로 흔들리는 숲이 있었고, 숲 전체가 함께 흔들리는 숲도 있었다. 멀리서 보면 부동不動의 숲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파리 하나하나가 다 떨고 있는 숲도 있었다. 새들이 찾아와 깃드는 숲도 있었고, 까마귀가 머리 위에서 배회하는 숲도 있었다. 몇 그루의 전나무가 기둥처럼 서 있다가 석양이면 긴 열주列柱의 신전이 되는 숲도 있었다. 뱁새, 직박구리, 쏙독새들이 우는 숲이 있었고, 오로지 뜸부기만 우는 숲도 있었다. 긴 행렬을 지어 언제나 산마루를 넘어가고 있는 숲도 있었고, 황혼이면 불붙는 자작나무 숲도 있었다. 구름이 피어나는 숲이 있었고, 구름이 그 뿌리를 내리는 숲도 있었다. 경전經典처럼 날마다 새로이 읽히는 숲도 있었고, 언제나 침묵이 쌓여 있는 숲도 있었다. 나무만이 살고 있는 숲이 있었고, 어딘가에 풀밭을 숨기고 있는 숲도 있었다.”

​정승윤의 [숲]은 한편의 시 같다. 언어의 함축 속에 깃든 시적 요소 혹은 시적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철학적 의미에 가닿아 심오한 수필적 경지에 이른다. 철학적 요소가 다분하다하여 관념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숲의 생김새와 소리, 숲에 깃든 감정 등에 화자가 접목한 인간적 사유는 성찰을 거쳐 또 다른 의미가 된다는 뜻이다.

 

 화자의 숲에 대한 관찰은 유년부터 이루어진 듯하다. 그것은 숲의 외양만을 훑은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관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있었다”로 진술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화자는 여전히 숲을 성찰하는데 “...것이다”라는 현재형으로 마지막 단락을 맺고 있음으로써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연록의 숲”과 “동백의 숲”, “따로 흔들리는 숲”과 “숲 전체가 함께 흔들리는 숲”, “멀리서 보면 부동의 숲”과 “가까이 다가가면 이파리 하나 흔들리는 숲”, “깃드는 숲”과 “배회하는 숲”, “새들이 우는 숲”과 “오로지 뜸부기만 우는 숲”, “산마루를 넘어가고 있는 숲”과 “황혼이면 불붙는 숲”, “구름이 피어나는 숲”과 “구름이 뿌리를 내리는 숲”, “날마다 읽히는 숲”과 “침묵에 쌓여(‘싸여’의 오타인 듯)있는 숲”, “나무만이 살고 있는 숲”과 “어딘가에 풀밭을 숨기고 있는 숲”이 대조,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숲”과 “사람이 사람을 피해 숨어사는 숲”도 그렇다.

 

이러한 대조적인 표현은 세밀함 혹은 섬세함으로 다가와 철학적으로 깃드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화자가 읊는 ‘숲’은 자연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 혹은 다양한 사연을 담은 우리네 일상으로 볼 수 있는 이중적 의미라 하겠다.

 

“아침이면 새들이 날아오르”고 “석양이 되면 숲 위에 배회”하듯, 사람들은 아침이면 일터로 나가고 저녁이면 배회하고, 밤이 되면 집을 찾아드는 것이다. “숲이 끝나는 곳에 나무가 있고” “나무 끝에 새집”이 있고, 새집에 깃든 “새들의 꿈 위로” “끝없는 성좌가 펼쳐지”는 하늘이 있다는 것도 인간사에 접목한 이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숲”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나무”는 동네 혹은 지역, “새집”은 사람들의 집이다. 거기에서 “새들”같은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이다. 오래도록 숲을 바라보거나 그 숲에서 체험한 화자는 거기에 상상을 보태어 “바다 같은 숲” 이나 “바다 한가운데 섬이 된 숲”을 차용해오고, 상상 속 나무 “천개의 가지에 천개의 잎이 달린” “천수관음”을 빌려오는 것이다. 상상이 상상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에 접목, 철학적이면서도 사유 깊은 수필적 경지로 독자를 이끌고 있다.

 

 

 

 3. [낙지]

 

 

살아가면서 겪는 비슷한 상황 혹은 삶의 단면을 가져와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는 [낙지]. 만약 통속적인 시각으로 이 글을 대한다면, 화자가 의도하는 본질을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

 

 

 

   “뻘낙지 한 마리면 보약 한 첩 먹는 거랑 같지라.”

여인의 걸쭉한 사투리에서 갯내가 풍긴다. 해풍에 그을린 얼굴에 자리 잡은 세월의 굴곡이 토속적인 음성과 잘 어울리는 그녀. 마디 굵은 손으로 움켜쥐고 흔들어 보이는 낙지가 잠든 내안의 욕망을 일으켜 세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늙었을까. 두루뭉술한 몸에서 배어나오는 진한 삶의 갯내.

(중략)

 

“낙지를 움켜쥐고 냄비에 넣는 여인의 손놀림을 보며 이제야 낙지의 참맛을 볼 것 같은 생각에 침을 삼킨다. 그 손에서 개펄에 엎드려 평생을 사는 여인들의 삶이 쏟아진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뻘에 널을 밀고 가는 여인들의 삶은 바닥을 닮았다. 뻘은 바닷사람들의 바닥이다. 그 질퍽한 곳에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있어 아낙들은 날마다 뻘을 뒤진다. 바닥은 삶을 헤쳐 나가는 근성을 키우고, 그 근성은 뻘에서 제 냄새를 풍겨 삶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 그래서 낙지는 뻘의 맛, 진정한 바다의 맛, 단내 나는 바닥의 맛이다. 산다는 것은 낙지처럼, 세상의 바닥을 치열하고 간절하게 건너가는 것이 아니던가.”

화자는 뻘이 내다뵈는 남도의 어느 바닷가 음식점에 간 듯하다. 아마도 그곳은 뻘낙지로 유명한 ‘무안’쯤 어디는 아니었을까.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던 화자와 일행은 “해풍에 그을린 얼굴”, “걸쭉한 사투리”에 “마디 굵은 손으로 움켜쥐고 흔들어 보이는 낙지”로 호객하는 여인에게 끌린다. 여인과 바다와 낙지에서 배어나오는 “갯내”가 그들을 이끈 것이다. “연포탕”이 나오기 전 미각을 돋우기 위해 나온 “세발낙지”를 씹으며 아직 꼼틀거리는 그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그래도 싱싱함을 찾는 섭생의 본능으로 “잔인할수록 미각은 싱싱”하다는 자조 섞인 말을 뱉는다.

 

또한 한승원의 소설 [낙지 같은 여자]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본게임인 연포탕과는 다른 세발낙지의 여린 맛을 소설 속의 “앳된 여자”에 빗대기도 한다. 화자가 말한 “어린 여자”는 ‘여린 여자’로 이는 식당여주인, “문드러진 눈물은 쏟는 중년의 여인”으로 관점을 옮겨가고자 차용했다는 면이 타탕할 것이다. 통속적인 시각으로서의 젊은 여자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식당 여주인이 집게가 아닌 손으로 집은 낙지에서 바다여인들의 건강한 삶을 말하고 싶었음일 것이다.

 

“뻘에 널을 밀고 가는” 바다여인들의 삶은 “바닥을 닮았다”고 화자는 말한다. 실제로 강진 즘 어디에서는 뻘을 ‘바닥’이라고도 하니, 뻘과 바닥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 바닥에서 “삶을 헤쳐 나가는 근성”을 키우니, 그곳에서 수확한 낙지는 “뻘의 맛, 진정한 바다의 맛, 단내 나는 바닥의 맛”이 아닌가. ‘바다’와 ‘바닥’은 의미야 전혀 다르지만, 비슷하게 발음이 되는 이유로도 연관 지을 수 있겠다.

 

 “용트림하던 바다 한 마리”가 연포탕 속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그 바다는 화자의 몸속으로 들어가 다시 원기로 되살아난다. 그리하여 “몸에서 바다가 꿈틀”거리고, 그런 화자를 향해 “갯바람”은 “바닥의 근성을 배워”보라며 “뻘밭”으로 등을 미는 것이다.

 

화자가 접한 낙지는 도시의 어느 음식점에서 얌전히 불려나온 것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이 내다보는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에 의해 잡힌 그야말로 현장감 있는 야생의 낙지인 셈, 그냥 낙지가 아니라 ‘뻘낙지’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여린 여자” “중년의 여자” “여인들의 삶”등 여인들을 차용했다고 해서, 성적으로 기울어진 통속적인 시각으로 글을 대하는 것은 글 속 숨은 의미를 헤아리지 못함이다. 최장순은 낙지와 뻘과 여인들을 통해서, 파도 몰아치는 바다 같은 세상을 “치열”하고 “간절”하게 건너가고자 하는 우리네 삶을 말하고 싶었음이리라.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절풍 / 김경순  (0) 2023.04.22
기차 / 박시윤  (1) 2023.04.21
장니(障泥) / 류현서  (1) 2023.04.18
당삼채 / 류현서  (0) 2023.04.18
봄이 오고 있다/ 박시윤  (1) 2023.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