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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바늘 구멍 속의 폭풍/김기택

에세이향기 2023. 7. 23. 09:13

김기택 - 『바늘구멍 속의 폭풍』

 

밥 생각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갸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한 명의 육체를 위하여

달려가던 승용차가 가볍게 들어올리자

사내는 조금도 꾸밈이 없는 동작으로

빙그르르 공중에서 몸을 돌리고

전혀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스팔트 위로 내리꽂혔다

얇은 가죽으로 막아놓은 60킬로그램의 비린내

안에 들어 있던 분노와 꿈이

일제히 터진 곳에서 쏟아져나왔다

모든 것은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신속하고 완벽하게 제 위치를 찾아갔다

꿈은 흰 쌀밥 위를 오르는 김처럼

모락모락 공손하고 착하게 흰 골을 떠나

거대한 스모그 속으로 스며들었고

분노는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따라

하수도 속으로 얌전하게 흘러 들어갔다

크고 믿음직스런 두 손이 있었으나

체온이 있을 동안만 가늘게 떨었을 뿐

곧이어 차고 뻣뻣한 힘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군지 아침부터 해장 한번 잘했군

지나가던 버스 운전사가 킬킬거렸고

손바닥으로 반쯤 가려진 얼굴들이

킁킁거리며 비린내를 향해 몰려왔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핏줄의 끝 수만 뿌리 모세혈관으로

모여 기지개가 되고 주먹이 되고

눈동자 속으로 빛이 되어야 할 힘들이

해골을 뚫고 풀어져 사방으로 흩어져간 후

사내는 이제 진짜 육체가 된 것이다

무기력하고 아무 할 일도 없어 마냥 착하기만 한 육체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순한 육체가

개밥그릇 하나

동그랗게 허기를 말아 앞발에 턱을 괴고

개가 졸린 눈으로 누워 있다 그르렁거리던 허기도

편한 자세에 취해 한껏 늘어져 있다

졸린 눈을 찌르는 한 줄기 가는 빛

개밥이 채워져 있는 동안 가려져 있던 그릇 하나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는 동안 보이지 않던 그릇 하나

그 깊은 빈 공간이 차갑게 빛을 내고 있다

개는 위장 속에서 쉬고 있던 신음을 꺼내어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그릇의 빈 깊이를 노려본다

허기의 힘이 게으른 다리를 일어나게 한다

개는 한차례 크게 짖어본다

그릇 속의 빈 공간은 움직이지 않는다

위협적으로 여러 차례 계속 짖어본다

우렁찬 소리는 비어 있는 둥근 자리를 샅샅이 핥고 나서

다시 혀와 목구멍 속으로 들어온다

허기는 빈 그릇보다 더 깊어진다

미동도 동요도 없는 적을 향하여

드디어 개는 흔들던 꼬리를 박차고 돌진해간다

빈 그릇을 물어 흔들고 할퀴고 차고 뒤집고 굴린다

빈 그릇은 이리저리 요란하게 굴러다니며

허 기가 마음껏 울부짖도록 내버려둔다

상처나고 찌그러지는 그릇 속의 빈 공간

가볍고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는 위장 속에서 부딪치다가

맑게 씻겨져나온다

정안수처럼 가늘게 떠는 허기의 울림

허기는 즐거운 놀이

목줄도 없고 네 다리와 꼬리도 없고

주인도 욕도 매질도 없는

고요하고 둥근 밥그릇만 있는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치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매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가시

가지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온 힘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산소밖에 만들 줄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까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러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꽂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곳은 꽃이 되고

어느 곳은 가시가 되었구나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판다.

귀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2

아이는 모래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살이란 살은 굶주림이 모두 발라먹은

지금은 생선 가시처럼 눈만 뜨고 있는

한줌의 아이

빵을 기다리는 동안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들어올리던 가냘픈 모가지를

졸음이 톡, 꺾어버린다

무너지는

무너져 모래 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는

한줌의 갈비뼈

오랫동안 끈질기게 한자리에 앉아서

독수리는 아이를 노려보고 있다

아아, 이렇게 슬픈 먹이도 있었던가

슬픈 먹이로

날개가 강해지고 눈에 매서운 빛을 더할 독수리는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처럼 경건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졸고 있는

배고픔의 기억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졸고 있는

한줌의 먹이를

천년 동안의 죽음

안데스산맥에서 발굴되었다는

한 잉카족 사내의 미라는

눈을 감고 온몸을 꼭 웅크린 채 얼어 있다

머리 가죽은 닳아서 해골이 드러나 있고

입고 있던 옷은 다 삭아

겨드랑이와 음부에만 조금씩 털처럼 붙어 있다

천년 이상을 죽어 있었던 그 육체는

이제는 시체가 아니라 폐허처럼 보인다

살은 거의 썩지 않았으며 다만

고대 신전의 돌기둥처럼 닳거나 부서져 있을 뿐이다

그 사내는 죽음 속에 한창 익어가고 있다

질기고 고집세고 고약한 냄새만 풍기던 육체는

익을수록 흙의 색깔과 향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음식물을 집어넣고 분비물을 배설하던 그 폐허에는

이끼와 나무 그리고 들풀의 뿌리들이 기웃거리고

갈비뼈와 심장과 내장 사이로는

뿌리를 유혹하는 자양분들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완전히 흙이 된 것은 아니어서

사내는 아직도 추위에 휘어진 등뼈 안에 들어 있다

흙벽처럼 조금씩 무너져 있는 무릎과 팔꿈치에는

돌이 되다 만 뼈들이 드러나보인다

천년이 넘도록 시간과 추위와 어둠만 들어있던 얼굴은

한 덩어리의 흙처럼 생각 없고 꿈 없는 잠에 빠져 있다

푸른 잎과 붉은 꽃들이 곧 그 얼굴에서 피어날 것 같다

얼굴은 이미 풀내음 꽃내음에 한껏 취해 있다

울음

그의 내부에서 무엇이 녹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어둡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녹으면서 뿜어나오는 빛으로 내부는 환했을 것이다

눈으로 녹아나오는 뜨거운 용해물이

굳으면 곧 유리가 될 것 같은 투명한 용해물이

약한 시력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으로 변할 때 발열되는 열량을

희고 얇은 피부로 싸안고 견디어내느라

그는 어깨를 들먹이며 격렬하게 떨었고

어두운 내장으로 눈부신 빛을 견디어내느라

허파와 식도와 입은 토할 듯이 컥컥거렸다

눈물로 몸을 녹이는 동안

녹아 서서히 액체로 변해가는 동안

무거운 것들은 점점 그를 놓아버리게 될 것이다

녹은 만큼 그는 가벼워지게 될 것이다

가벼워진 만큼 내부에 둥글고 빈 자리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 텅 빈 자리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 많은 공기와 빛과 바람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어떠한 충격이나 욕설이나 소음이 들어가더라도

거기엔 단지 공기와 빛과 바람만이 살게 될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의 시

바람이 분다

바람에 감전된 나뭇잎들이 온몸을 떨자

나무 가득 쏴아 쏴아아

파도 흐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보자고

바람의 무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보자고

작고 여린 이파리들이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실처럼 가는 나뭇잎 줄기에 끌려

아름드리 나무 거대한 기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나무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라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나뭇잎 떨어지다

나뭇잎에도 무게도 있네. 그 무게에 나뭇잎이 떨어지네. 나뭇잎 무게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네. 바람과 공기가 떨어지는 무게를 건드려보네. 바람이 자신을 붙들고 마음껏 흔들도록 나뭇잎은 그냥 내버려두네. 후려치고 할퀴는 것을 다만 쳐다보기만 하네. 바람의 힘이 세면 셀수록 그 힘을 타고 나풀거리는 무게의 곡선은 더욱 신이 나네. 그 곡선은 바람의 힘을 넉넉한 부력으로 삼아 바람에 등을 대고 눕네.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는 힘도 나뭇잎을 쫓기만 할 뿐 어찌하지는 못하네. 바람이 힘 빠지면 나뭇잎은 땅으로 살짝 내려오네. 풀잎 위에 누워 쉬면 바람은 다시 잎을 나꿔채서 쥐고 흔들어보네. 나뭇잎은 바람의 성깔이 엽맥 속으로 숨구멍 속으로 깊이 스며들도록 놓아두네. 오히려 그 흥분으로 온몸을 파르르 떠네. 나무 밑에는 나뭇잎들이 가득하네. 겨울 나무 밑에는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들이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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