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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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구룡포로 간다/권선희

에세이향기 2023. 7. 23. 09:19

시집 838. 권선희 - 『구룡포로 간다』

 

꽃에 대하여

칠칠에 사십구

여자 나이 마흔 아홉이믄 말이요

길바닥에 내뻔져놔도 아무도 안 줍어 갈 나인기라요

팔팔에 육십 사

남자 나이 예순 넷캉 같은 기지요

무신소리 하노

내 아는 찬모는 올개 예순 셋인데 애인이 예순 다섯인기라

그란데 마 이틀만 연애로 안하믄

온몸띠에 좀이 쑤시고 열이 화득화득 난다카드라

아고 그기 귀신들이재 사램잉교

뭐시 볼끼 있겠능교

택또 읎는 소리 마소

이보게 동상

삭신이 옥신옥신 한다카믄 하마 오십이요

새북에 비실비실 한다카믄 그기 육십 줄 넘는기고

마눌이 불쌍해지믄 그기 칠십인기라

니가 우예 세월이라카는 기를 알겠노

행님요

벌레벌레 하믄 다 꽃잉교

말씨 솜씨 맴씨 쫀득쫀득하니

찰떡맨키로 찰기가 있어야 그기 꽃이지요

아고 이 답답은 자슥아

세월이 다 데불고 가는 거로 안즉도 모리나

개떡 아니라 찰떡도 세월 앞에서는 심이 읎다

늙으믄 늙은 것들끼리 살포시 눈 맞아가

맴이라도 몸처럼 부비고 살라꼬

조물주가 다 맹글어 놨으이

젊은 니는 쓸담읎는 꽃타령 말고 술이나 퍼묵그라

막도장

한 이십 년 아옹다옹 살다보니

눈 먼 밭떼기도 나타나고

별꼴 다 보기로 영감탱이는

명의를 여편네 앞으로 해준다며

멀쩡한 정신으로 무너지기도 하더라

변덕이 도질까봐

잽싸게 도장을 찾았는데

요놈 꼬라지가 우째 이리 내 꼴인고

어디다 몇 번을 찍어댔는지

아비 성을 딴 이름 석 자가 다 문드러졌다

장터 어디쯤에서 급하게 파재낀 나무도장

나야 이래저래 종종거리며 살다보니

닳는 줄 모르고 닿았지만

저도 편이라고 함께 늙었나보다

밭뙤기 팔아 도망칠 무릎도 물러터진 나이에

막도장만 늦호강하러

간다

툇마루

에고 이 여편네야

니 지금 내한테 데모하나

문디 이기 뭐꼬?

돼지괴기 한 디이 사다 볶아 묵을 생각 말고

빤쓰나 하나 장만하그라

살믄 을매나 살끼라꼬 이라노 어이?

이기 말이다 이양 니끼 아잉기라

내 맴 쪼매 짼하라꼬 수 쓰나본데

됐다마 당장 날새믄 가가 사뿌라

난닝구도 아이고

구녕이 이래 크기 난 빤쓰로 보믄

내 맴이 우야켓노

퍼뜩 틀어 막그라

알긋나

빵게*

비닐봉지 속

빵게 뿌걱인다

아랫배 소복하게 붉은 이 까칠한 산모를

산 채로 둘 수도 찜통에 넣을 수도 없다

체위도 어설펐을 몸뚱이끼리

보듬어 안고 사랑하였을 바다

당사포 귀퉁이에 놓아 준들

멀고 먼 길 가기엔 너무나 만삭이다

아랫배에서 훌훌 떨어지는 새끼들을

우째 다 챙겨 갈 수 있을꼬

눌태리 늙은 총각이라도 맺어주어

오두막이나마 편히 몸 풀게 하고프건만

코앞에 바다를 두고

비린 정 솟구쳐 살 수나 있으려나

하마 다 져버린 봄인데

한껏 붉어 피려는 빵게를

우야믄 좋노

우야믄 좋겠노

*암컷 대게, 수컷보다 몸체가 훨씬 작아 찐빵만 하다하여 '빵게'라 부르는데 연중 포획이 금지됨

 

실종

떠오르지 않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부레도 없는 인간이 바다로 갔다는 것

파도가 뒤통수를 쳤다는 것

합동분향소는 텅텅 비었다는 것

아득한 노릇이다

쥐며느리를 닮았다

무화과 익어가는 정오를 지나는

꼬부랑 할매

하산외과 담에 낮게 붙어

행방불명 신고하러 간다

공익을 위해 근무하는 찬호와 동호는

분식집 국수 앞에 앉았는데

시퍼렇게 대들던 아들은

동네 골목도 밝히지 못하는 집어등 타고 떠나

돌아오는 길을 잃었다

말소를 경고하며 날아 든 통지서

꼭 쥐고 부지런히 걸어도

라일락꽃 향내만 어지럽지 멀기만 한 읍사무소

생떼 같은 막둥이 돌아 올 길 지우러 가는

둥그런 등허리에는

햇살까지 무겁게 올라타고 있다

궁녀네 집

지붕공사가 시작되었다

쿵쿵 두드릴 때마다 쏟아지는 먼지

궁녀씨 마당 귀퉁이에 앉아 바라본다

저 지붕 아래서

새끼 낳아 젖 물리고

한바탕 세간 부수며 싸움질 하고

멍든 눈두덩으로도 끌어안고 부볐지

새끼를 잃고 서방도 잃고

어찌 흘러든 새서방마저 등진 세상도

살아보라고 살아보라고 다독이던 힘이

고작 한나절 뚝딱거림에

주저앉는구나

머리칼 허연 세 번째 서방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자

궁녀씨 막걸리 사발 들고 기우뚱 일어선다

마당엔 분꽃이 만발하고

빗장 푼 방문으로

오랜만에 자개경대 반사되고 있다

북어의 노래

낯선 동지와

서로 입을 꿰고 한 줄에 걸렸다

내장은 모두 발라내고

영롱한 의식은 바다에 남겨두고

헛것인 몸뚱이만

펄럭인다

동해 비릿한 바람이

불어오면 올수록 나는

나를 잃어야 한다

꾸득꾸득 말려드는 안타까운 삶

우두커니 밤바닷가에서

눈알도 없는 내가

안주로 국거리로 가야 한다

너희들이 가져가는 건 빈 몸뚱이

저 깊은 바다 속 집에서는

내 아이들이 성실하게

살다간 아비의 전기를 읽고 있다

작곡재에서

어두워짐은

소멸이 아니라 침엽수 창끝 세우고

능선을 일으키는 반란이다

사람들의 영혼은

비로소 자유로이 달을 띄우고

먼데서 들려오는

그립다 그립다 그립다

어둠은 결코

잠식이 아니라

부레를 부풀리는 힘이다

가야 할 시절이 가면

와야 할 시절은 반드시 온다고

그렇게 어르고 달래며

터질 듯 피는

꽃이다

매월여인숙

나 오늘 기필코

저 슬픈 추억의 페이지로 스밀라네

눈 감은 채

푸르고 깊은 바다

흉어기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 올 때까지

은빛다방 김양을 뜨겁게 품을라네

작은 창 가득

하얗게 성에가 끼면

웃풍 가장 즐거운 갈피에 맨살 끼우고

내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와

투둘투둘 비늘 털며

긴 밤을 보낼라네

항구양장점

까꾸엄마 새댁 적에

꿈마다 다녀가는 양장점 있었다네

까꾸 들쳐 업고 말통술 배달 가는 길

슬며시 넘겨보던 항구양장점

초크 하얗게 그어질 때마다

미싱소리에 부풀던 삐딱구두 빨간 꿈이

유리문 밖에서 피고 지곤 했다네

까꾸는 곤한 잠 속에서 손가락 빨고

짐자전거에 묶인 술통은

출렁출렁 보채었다네

파도가 까꾸를 키웠다네

항구양장점 문턱은 낡아 가고

해마다 과부꽃은 피고 또 졌다네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빨간 구두도

피고 또 졌다네

항구에 양장점이 사라진 후에도

까꾸엄마 꿈속엔

시침질하지 못한 꿈

연신 드나들곤 했다네

암컷의 꿈

고요히 바다로 가 미친 듯 살고 싶다

수초 사이로 슬깃슬깃 헤엄치다

가끔은 수면으로 올라 금빛 들숨을 쉬고

바위틈에 새까맣게 새끼를 쳐서

우르르 몰고 다니고도 싶다

밤이면 뜬눈으로 지느러미 접었다가

샛푸른 아침이면

앞니 드러내고 커응커응 사냥 나가는

용맹한 물고기이고 싶다

싸움에 패하고 돌아오는 저녁도 있겠지

비늘 떼어진 자리 꿰매며 보복을 다짐하기도 하는,

간혹 일행을 이끌고 돌아오는 승리의 날도 있을 거야

거나하게 취하여

호기 부리며 수컷을 탐하기도 하는

그렇게 등지느러미 날카롭게 세운 한 마리

암컷을 꿈꾸는 날

부쩍 잦아지고 있다

관계

키가 훤칠한 젊은 사내와

 

자그마한 초로의 여인이 간다

여인은 사내 새 양복깃 톨톨 털어주고

볼 쓰다듬으며 가다가 수그려 옷소매로 구두 쓰윽 문질러 주고

그것도 모자라 사내 턱에 제 눈을 콕 붙이고 간다

라면

하루가 퉁퉁 불어터졌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에서 꼬들꼬들 익어가는 라면에 찬밥 한 덩이 미련 없이 던져 넣는 어머니. 푹푹 개죽처럼 끓어 가난이 쟁반 위로 오르면 우리들의 그 절제된 여인은 오목한 국자로 침묵을 퍼올렸다. ‘살자’는 두 글자가 길게 올랐다가 그릇에 담겨졌다. 주둥이를 내밀고 당겨 앉아 도대체 얼만큼 살아야 제대로 된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문디

그 무렵

엄마도 나도 문디였지

오빠도 문디였어

며칠째 배는 묶이고

아버지 애꿎은 양철밥상 냅다 던지면

마당 한복판에서 뒹굴던 허연 국숫발들

뛰쳐나가는 오빠의 어깨 너머로

파도는 참 지랄맞게도 짖어댔지

흙범벅된 저녁을 쓸어 담던 엄마도

아버지가 죽기를 기도 했을까

어두워질수록 가라앉는 오두막

눈알 부라린 아버지는

잠들지 않았어

둔덕 보리밭가에 띄엄띄엄 앉은 우리

아무 말 하지 않았지

바람이 가슴을 막 때리며 몰려다녀도

아버지의 문디들은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열무김치가 슬프다

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은 장날이었지

열무 두 단을 샀어

시들어 버린 오후

짚으로 묶인 허리가 짓무르고 있었지만

어디 내 속만 하겠어

벌레 갉은 구멍 숭숭했지만

묵직했어 고작 두 덩어리지만

무수한 몸이 한 데 묶여 있었거든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무겁고 길었어

신문지를 깔고 털퍼덕 앉아 다듬었지

뿌리 잘라내고 웃자란 잎도 잘랐어

나를 다듬고 있었는지도 몰라

반쪽으로 꿈틀대는 애벌레처럼

희날재 어디쯤 지나고 있을 너를

지금이라도 따라 갈까

망설이기도 하면서 말이야

굵은 소금을 뿌리며 생각했어

잘만 버무리면

고추장에 쓱쓱 비벼 슬픔도 보리밥처럼

넘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너를 배웅하던 정류장까지도

아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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