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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보리 / 한흑구(韓黑鷗)

에세이향기 2023. 7. 31. 03:33

보리 / 한흑구(韓黑鷗)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걷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응결된 흙덩이들은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심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어 놓고, 이에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리 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개미들도 다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의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라던 억새 풀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 속에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그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밑을 훤히 비추어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고 참고 견디어왔으며, 오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눈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춤이 흘러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대고, 또한 너의 아늑한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둑한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모든 苦楚와 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서,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키우고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작품해설 요약]

차가운 땅 속에서 겨울 추위를 견디며 푸른 생명을 이어오다가 마침내 봄을 맞아 양곡을 맺는 보리를 소재로

하여 시련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과 인내력을 예찬하는 한흑구(본명 한세광)의 수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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