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의 노래
허민
나를 스쳐간 독자여
지나온 생을 되돌아보는 밤이다
구멍 난 가슴 한쪽 스스로를 위한
작은 부고 기사 하나 실어보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끝을 맺는 밤이다
낡은 집 바닥에 젖은 채 누워
한껏 페인트나 풀을 뒤집어쓰거나
먹다 남은 짜장면 그릇 따위 덮고 있을 줄
몰랐던 쓸쓸한 밤이다
노숙인의 유품이 되어 그의 마지막 겨울을
나의 마지막으로 덮게 될 줄 몰랐지만
마지막까지 나를 필요로 했고
나는 그의 외로움을 가려주었으니
조금은 괜찮았던 밤이다
생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으니
내가 한 그루 푸르고 싱싱한 나무였을 적
한 여인이 내게 등을 기댄 채
텅 빈 하늘만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말을 걸기도 했지만
괜찮다, 나쁘지만은 않았지 생각한 밤이다
그녀를 위한 한 권의 인생이 되기 위해
빗방울의 손톱들을 삼키고
여러 날의 미치도록 거센 바람과
눈송이의 쌓여가던 무게를 견뎠던 밤이다
스쳐간 이름들, 흔들리는 이파리로 살다가
결국 흰 눈 가득한 백지가 되어
그대들을 위한 간절한 소식 적었고
한 줄의 슬픈 사건이 되기도 했던 캄캄한 밤,
한 사람을 사랑한 여인이 부러 깨뜨린
유리잔 조각 하나하나 쓸어 담는
구멍 난 종이 뭉치, 나 기꺼이 되었던 밤이다
그러니 독자여, 바닥을 뒹구는 내 마지막 보거든
지난한 밤을 기억 말고 대신
끝내 되고자 했던, 살고자 했던
내 푸른 문장들을 상상해 주길
잠시라도 그대 가슴 안에서
솨솨솨_ 내 전생의 숲이 불어오는
길고도 짧은, 오늘의 깊은 밤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탄소발자국
이은영
지구의 체온이 오르면
허물어진 빙상이 실꾸리처럼 풀린다
해빙이 사라지고
물살 머문 자리마다
제자리 찾지 못한 퍼즐 조각처럼
소용돌이치는 얼음의 파편들
여름이면 폭염으로
녹색풍경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리면
젖지 않는 잎맥이 붉은 울음소리 뱉는다
허공을 태우는 뜨거운 바람이 배회하고
달아오른 햇살이 뼈 없는 행적을 남기면
꿈에서도 눈이 아닌 비가 내린다
지구의 들숨과 사람의 날숨이」
균형을 맞춘 동안
세상의 체온이 내려가고
잎이 무성해진다는 것은
새소리가 모여드는
나무의 우듬지가 풍성해진다는 문장이다
스마트폰과 전자기기에 절전모드를 씌우고
낯선 언어가 아닌 익숙한 모음을 읽으면
탄소 발자국이 작아진다
탄소 발자국의 개수와 크기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관대하다
돌계단의 각을 켜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숨을 고른다
오래된 이메일을 지우고 스펨 메일은 차단한다
높낮이가 다른 골목 그림자가 지평선을 지울 때
궤도를 벗어났던
뭇별들이 떼를 지어 서늘한 밤하늘에 자리를 잡는다
그린슈머*가 땅을 디딜 때마다
탄소발자국의 치수가 줄어든다
*그린슈머: 친환경, 유기농 제품을 이용하고 환경보호를 추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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