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의 건축학
홍계숙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 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 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쿵, 나무를 떠나간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부에 대하여/이재무 (0) | 2023.09.08 |
---|---|
첫날/권희돈 (0) | 2023.09.07 |
그리운 댓바람소리 - 김경윤 (0) | 2023.09.06 |
불의 경전을 읽다/김경윤 (0) | 2023.09.06 |
서울로 가는 전봉준/안도현 (0) | 2023.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