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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에 대하여/이재무

에세이향기 2023. 9. 8. 03:14

 

두부에 대하여

두부가 둥그런 원이 아니고

각이 진 네모인 까닭은

네모가 아니라면 형태를 간직할 수 없기 때문

저 흔한 네모들은

물러 터진 속성을 감추기 위한 허세다

언제든 흐물흐물 무너질 수 있는 네모

너무 쉽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네모

가까스로 네모를 유지한 채

행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네모

제가 본래 단단하고 둥근 출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네모

우스꽝스러운, 장난 같은 네모

지가 진짜 네모인 줄 아는 네모

언제든 처참하게 으깨어질 수 있는 네모

둘러보면 그런 두부 같은 네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두부에 대하여

형기 마친 죄수가 감옥 나설 때 왜 두부를 먹이는지 알겠다. 두부는 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부는 저항을 모른다. 저를 베고 찌르는 칼, 연한 살로 감싸는 두부는 비폭력 박애주의자. 두부를 먹으며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시인은 두부의 무른 속성에 대해서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첫 시에서는 출신을 잊어버린 채 비루하게 네모인 체하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두부에 빗대고 있다. 두 번째 시에서는 무르고 연한 두부를 박애주의자라고 쓴다. 시의 태생이 다른 시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나는 굳이 두부에 대한 두 시를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물체 안에 있는 속성을 다르게 보는 것이 타자가 아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두부에 대한 시를 인용한 이유이다. 두부도, 다른 시선으로 두부를 보는 시인도,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은가.

두부처럼, 형태를 갖기 위해 네모가 되었다. 드러나는 외양, 가치관, 신념, 직업, 발화된 말 등이 나의 네모일 지도 모른다. '나'라는 사람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갖게 된 네모, 그러나 네모는 가벼운 힘으로도 으깨어지고 무너진다. 단 한번의 충돌이나 위기 앞에서 기꺼이 네모이기를 포기할 때가 있었다. 포기라는 단어는 자기결정권을 내포하므로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순전히 타의성에 의존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난 허세에 쩌는 물러터진 두부 같은 사람이다.

두부 요리를 좋아한다. 그중 두부 두루치기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목넘김을 할 때마자 씹지 않아도 스르르 미끄러지듯 뜨거운 것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의 느낌은 흥미진진하다. 간이 스민 두부는 짭쪼롬해졌어도 부드러움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탱글탱글한 젤리나 푸딩의 쫀쫀함과는 다른 두부의 물컹함, 저항을 모르는 부드러움이 좋다. 쉽게 으깨지는 성질을 저항을 모르는 미덕으로 승화시킨 시인의 참신함에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시인은 스스로를 두부 같은 존재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두부는, 작지만 우아한 궁륭을 가진 둥근 출신 임을 잊지 않았다. 본분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맛 두부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냥 두부는 두부다. 으깨져서 김치전에 들어가거나, 작은 네모들로 분할되어 된장찌개에 떠다녀도 두부는 두부다. 두부를 과대평가할 것도, 두부가 무르다고 조소할 일도 아니다. 그냥 두부는 단단한 속성을 버리고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형태를 바꾼 무른 것이 되었다. 콩의 비린 내를 버리고 고소함으로 장착한 두부의 맛은 잘 익은 뒤에라야 가질 수 있는 두부의 고유함이다. 콩은 콩이고, 두부는 두부니, 두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아라. 듣는 두부, 빈정이 상할지 모르니까.

칼 구스타프 융은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아니다. 내가 되고자 선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반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선택할 수 없었고, 단지 일어난 일들 앞에서 어떤 선택이든 하면서 만들어진, 아니 되어가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물러터진 속성을 감추고 네모인 척하거나, 칼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한 살을 가진 비폭력주의자일 때도 있지만 말이다. 고로 나는 두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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