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소에서 / 마경덕
희고 매끄러운 널빤지에 나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나무는 제 몸에 지도를 그려 넣고 손도장을 꾹꾹 찍어 두었다. 어떤 다짐을 속 깊이 새겨 넣은 것일까. 겹겹이 쟁여둔 지도에 옹이가 박혔다. 생전의 꿈을 탁본 해둔 나무, 빛을 향해 달려간 뿌리의 마음이 물처럼 흐른다.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는 목공. 완강한 톱날에 잘려지는 등고선. 피에 젖은 지도 한 장 대팻날에 돌돌 말려 나온다. 죽은 나무의 몸이 향기롭다.
날아라 풍선 / 마경덕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묶는다.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허공에서 한 생애가 타버릴,
무채색의 가벼운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
짐승들 이야기 / 마경덕
그 모피공장엔 짐승이 우글거렸네 사람인척 하는 짐승 같은 사람과 짐승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들과 죽은 짐승들의 눈(眼)이 쌓인 모피창고가 있었네. 숨쉬기조차 힘들게 날아오르는 짐승의 털을 마시며 배고픈 짐승들, 배부른 짐승의 하룻밤 술값 정도에 금방 길들여졌네. 숱한 밤이 뜬눈으로 들들들, 미싱에 박혀죽고 먼지 쌓인 바닥에서 죽은 짐승들의 물 먹인 껍데기는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졌네. 여우 한 마리 팔딱, 재주를 넘어 열 마리 여우로 둔갑 했네. 수입산 백여우 뱃가죽을 칼로 찢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짐승들, 늘어난 가죽에 빗질을 하며 눈부신 빛을 달고 있었네. 죽어서 더 빛이 나는 껍데기에 밤새 날개를 달았네. 겁 많은 순한 짐승들, 백여우의 탐스러운 꼬리에 손 베이는 줄 몰랐네. 수없이 죽어간 짐승들의 슬픈 눈에 그 해 여름, 펄펄 눈이 내리고.
*
숫돌 / 마경덕
밋밋한 돌덩이가
칼을 쥐고 논다
얼마나 칼을 갈아 마셨는지
쇠비린내 물큰 난다
쇠붙이를 물어뜯은
제 몸도 우묵하다
허공에 무수히 칼자국 나있다
*
명태야, 명퇴야 / 마경덕
눈을 뜨고 처마 끝에 매달린 명태
건들건들 바람에 끌려
북어가 될 젖은 명태
방망이에 흠씬 두드려 맞고,
명태가 아닌 북어라고
깨달을 명태
끈에 묶인 아가미는
벼랑 끝에 걸리고
꼬리는 허공에 놓여있다
이제, 그만
무거운 바다를 내려놓아라
가벼운 영혼을 내려놓아라
너는
명예롭게 퇴직했다
바다에게 명퇴 당한 명태야
*
고래는 울지 않는다 / 마경덕
연기가 자욱한 돼지곱창집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내들
지글지글 석쇠의 곱창처럼 달아올라
술잔을 부딪친다
앞니 빠진 김가, 고기 한 점 넣고 우물거리고
고물상 최가 안주 없이 연신 술잔을 기울인다
이 술집 저 술집 떠돌다가
청계천 하류에 떠밀려 온 술고래들
어느 포경선이 던진 작살에 맞았을까
쩍쩍 갈라진 등이 보인다
상처를 감추며 허풍을 떠는 제일부동산 강가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
허공으로 뻥뻥 쏘아 올린다
물가로 밀려난 고래들, 돌아갈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끌어 와 무릎에 앉힌다
새벽이 오면 저 외로운 고래들
하나 둘, 불빛을 찾아 떠날 것이다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섬에 닿을 수 있을지...
바다엔 안개가 자욱하다
스크류처럼 씽씽 곱창집 환풍기 돌아간다
*
개 / 마경덕
왠지 만만하다
개꿈, 개꽃, 개살구, 개짐, 개떡, 개뿔 ...
개가 붙으니 꿈은 사라지고
꽃 앞에 개가 오니 꽃이 진다
개죽음, 개새끼, 개 같은
개는 개라서
충분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