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겨의 노래/김선주

에세이향기 2023. 12. 17. 09:20

겨의 노래/김선주

등겨를 본 지가 오래다어린 날부모님은 식구가 먹을 양식만큼만 마을 앞 들녘에서 벼농사를 지었다가을 추수를 마친 대청마루에 쌓인 것이 나락과 싸라기등겨였는데 이제 정미된 쌀 이외는 구경하기 어렵다.

지난 추석 무렵이다.“어무이예명절 잘 쇠시이소오." 농사짓는 오빠의 선배로부터 찹쌀 한 포대를 선물 받았다포대를 풀어 헤치고 한 줌 쥐었다마트에 포장된 찹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맑은 우유 빛깔에 곁들인 촉촉함이 더없이 부드러웠다야들한 속살의 맵시를 자랑하는 사이로 여느 것과는 다른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살며시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살폈다.

뉘' 였다정미된 찹쌀 포대 속의 외돌토리다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많은 과정을 거치며 내게로 오기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오동통 오른 열매 위에 꽉 물고 있는 겉껍질의 위대한 수고가 엿보인다촉촉이 윤기 흐르는 피부를 감싸고생채기는 감히 따라 붙지도 못할 만큼의 본능을 작동시켜 생명체를 보호하고 있는 껍질의 품격은 강인했다거친 결누르스름한 색은 보잘 것 없는 살갗이지만 이 얼마나 막중한 책무인가무지막지한 힘으로 압제하는 정미소 기계 틈바구니에서 야무지게 살아남은 뉘는 손바닥에서 애틋함을 남겼다한 톨의 찹쌀에 덧입혀진 껍질이 육중한 무게를 통과하여 손바닥 위로 오게 된 과정에서 문득 할머니 생각이 떠올랐다어머니가 시집을 온 얼마 뒤 할머니께 벌어진 이야기다.

할머니의 택호는옥천댁' 이다예전에는 사람을 부를 때 주로 택호를 사용했다뒷산 아래마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디딜방아가 있다할머니는 마을 사람중호댁과 삼산댁을 품앗이하여 보리 한 되를 들고 휑한 디딜방앗간에 간다품꾼은 줄을 잡으며 다리를 디디고할머니는 방아머리 쪽에 앉아 보리를 께꼈다.

디디고 께낄 때 호흡을 잘 맞추어야 한다그날은 지금처럼 무더웠을까아득한 순간이 지나갔다보리 찧는 중간에 방앗공이가 아래로 떨어지기 전을 이용하여 밖으로 튀어나온 보리를 절구 돌 안으로 쓸어 넣었다곧 이어절구 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보리가 잘 찧어지도록 고르는 찰나 머리 위로 공이가 떨어진 것이다.“우야꼬옥천때기클 났네정신 차리래이" 디디던 발을 내려놓고 두 품꾼은 할머니 곁으로 달려왔다보리에 떨어져야 할 무게가 할머니의 머리로 나앉았으니 그 아픔이 오죽할까병원이나 약국을 생각할 수도 없는 촌에서 할머니는 평생을 묵직한 공이를 정수리에 얹고 살다 가셨다.

산다는 것은 그렇다할머니 인생 틀은 갑작스레 머리로 내려앉은 공이처럼 예상 밖의 일들이 연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할머니가 열 살 될 무렵할머니의 어머니는 이모할머니를 낳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이모할머니를 등에 업고 젖동냥을 다니며 스무 살이 되어 시집을 갈 때까지 엄마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결혼을 하고 오 년 만에 과부가 되어 두 사내아이를 키우며 층층시하 고달픈 생활은 계속 이어진다크나 큰 일들이 지나가면서 할머니는 따뜻하고 촉촉한 보릿겨가 되어가고 있었다외롭고 아픈 식구들의 거름 역할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꼭 숙명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디 보리뿐이랴추수가 끝난 늦가을아버지는 나락을 손수레에 실어 정미소로 향했다정미소에서 황색의 피부가 미백으로 거듭나던 날 밤옅고 낯선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식구들은 촉각을 곤두세워 대청마루의 세미한 소리로 집중했다아버지는 어머니가 바깥 상황을 알아보라고 몸짓으로 알려주는 데도 모른 척 누워만 있었다무서운 것보다 양식을 지켜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였을까답답한 나머지 어머니는누구야!"  소리 지르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그때우당탕탕 사람이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식구들이 놀라 마루로 나왔을 땐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쌀자루가 마룻바닥에 나뒹굴고어머니는 도둑이 누구인지 뒤쫓다가 형체로 감 잡고 집에 돌아온 상태였다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어머니는 등겨 한 자루 꺼내 들고 뒤뜰로 간다등겨 자루를 풀어 아궁이에 남은 불씨 위에 끼얹었다티틱디탁부지깽이로 뒤적거리며 어머니는 초라한 자신을 시나브로 태우고 있는 중이다.

등겨는 때론 아궁이에서 겻불로 사용된다군불 지피는 온돌 집에서 서른 코앞까지 살았다저녁이면 뒤뜰 아궁이에 잘 마른 지푸라기를 깔고 싸리나무를 동갠 윗자락에 장작을 올려놓는다불쏘시개가 불의 혀를 내밀어 장작을 옭아맬 때까지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며 상황을 지켜보아야 한다부지깽이를 들고 이리저리 젖히며 불꽃을 불렀다불목으로 불길을 넘겨주면서 구들을 덥히려고 애를 써본다그것마저 부족해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 불씨는 살려내지만잿더미가 얼굴을 향해 날아와 시커먼 분진을 퍼붓고 달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당에 묵혔던 장작이 다하던 날이다아버지는 톱과 낫을어머니는 새끼 꼰 줄 뭉치를 챙겨 손수레에 싣고 뒷산으로 향한다가는 내내 두 분은 옥신각신한다이유인즉장작은 몇 년 동안 집 마당에서 굴러야 땔감으로써 모습을 갖추는데 그 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운 어머니는 아버지를 닦달한다아버지는 가지치기를 한 나무를 톱으로 잘라 실어올리고어머니는 검불들을 찾아다니며 낫으로 모아 묶었다.

타닥타닥마른 장작 지피는 냄새는 고향 하늘의 숨구멍마다 그리움을 묻는다제 살 쩍쩍 갈라놓은 장작은 굴뚝으로 혼()을 불러올리듯 연기를 뽑아 온 하늘로 풀어 헤치더니 사람의 가슴에 찾아든다.

아직 생 속인 나무는 주인의 애만 태우는가 보다준비되지 못한 삶으로 인해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속을 끓이더니 결국 매캐한 연기만 토해내어 눈물 그렁거리게 만든다제 몸에 불씨만 물고 있으면 뭉근히 오래토록 타들어 가는 것은 기꺼운 일이다저 혼자서 천천히 몸을 사르도록 생나무 위에 등겨를 뿌려놓고 불구멍을 조절해 두면 밤새껏 빨갛고 까맣게 속을 태우고 또 태워 들어간다.

겻불 아래 생 속인 내가 있다부모의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수고가 오리무중의 오늘을 헤치며 걷는 길의 곁불이 된다언제였던가연합고사 치를 당일 아침에 친구들과 모여 모고등학교에 가는 버스를 탔다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수험표를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혼자 버스에서 내려 부랴부랴 집에까지 와서 수험표를 넣고 나니 시간이 촉박했다급할 때 생각나는 단어는어머니" 였다어머니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을까마는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이만한 특효약이 없다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어머니와 시험장까지 달려가니 교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어머니는 얼른 딸의 손을 놓으며 걱정 말고 시험 잘 보라는 말을 남기며 등을 쓸어주고 들여보낸다.

삶의 곁불은 묵직하고 뭉근한 형태로 겨에 담겼다누가 쭉정이라 함부로 대할 수 있으랴희나리를 둘러싼 겨처럼 야윈 부모는 생 속인 내 허물을 덮고깊고 그윽한 겻불로 감싼다결코 꺼뜨릴 수 없는 사랑의 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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