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카테고리 없음

아버지의 고무신/염혜순

에세이향기 2024. 6. 21. 03:02

아버지의 고무신

 

염혜순

 

아버지의 고무신은 하얀 배였다. 아버지는 하얀 배를 타고 저녁마다 댓돌위로 올라서시며 큰기침을 하셨다. 그 기침 소리는 온 식구들을 긴장시키는 점호 나팔이었다. 어질러져있던 물건들을 한 순간에 치웠다. 아버지가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차렷 자세로 도열하였고 거의 동시에 인사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는 동그란 안경너머로 집안과 우리를 한꺼번에 훑어보시고는 곧바로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셨다.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 중 누가 빠졌는지 신기할 만큼 빨리도 알아채시곤 모두의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안방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마루를 지나 건넌방으로 들어가시면 도열했던 우리들 사이에선 안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길어다 쓰는 물을 솥에 데워 놋대야에 담아 아버지 방 앞에 이르면 아버지는 남폿불을 들고 나와 세수를 하셨다. 그리곤 그 물에 발을 씻은 후 걸레로 손수 고무신을 닦으셨다. 온종일 아버지를 태우고 다닌 배는 먼지 하나 없이 물기까지 닦여서 툇마루 위에 나란히 놓였다. 하루의 흙길을 걸어오신 아버지는 그날의 고단을 그렇게 지우고 하얀 배를 세웠다.

 

아버지에게는 고무신 외에도 다른 신발이 몇 개 더 있었다. 까맣고 반짝이는 가죽 구두, 하얀 정구화, 그리고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 그러나 그것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 슬리퍼는 사무실 책상 밑에서, 그리고 정구화와 구두는 책상 옆에 있는 신발장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집으로 오는 시간이면 아버지는 마치 돌아오는 배를 타야 하듯이 하얀 고무신을 신으셨다. 하얀 고무신은 그렇게 아버지의 일부가 되어갔다.

아버지의 해수기침은 밤마다 어둠을 흔들어댔다. 기침소리가 숨가쁜 밤이면 툇마루 위의 고무신은 아무도 모르게 하얗게 삭아갔다. 아버지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고무신처럼 우리 앞에서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밭은기침으로 밤을 보내고도 아침이면 어느새 늦잠 자는 우리를 재촉하며 해보다 먼저 움직이셨다. 하얀 고무신은 어김없이 아버지를 태우고 바쁜 하루의 길을 나섰고 우리도 덩달아 분주한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에게는 식구들은 모두 학생이었다. 그런 아버지 잔소리가 우리는 지겨웠다. 알아듣기 힘든 함경도 사투리로 한번 시작되면 두어 시간이 지나 꿇어앉은 발이 저려 철철 울어대야 끝이 나는 잔소리였다. 게다가 식구 중 누구 하나라도 해 지도록 귀가하지 않았거나 교과서 밑에 감추고 보던 만화책 하나라도 들키는 날이면 영락없이 날아오던 불호령에 온 식구들은 진땀을 흘렸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 이유로 실컷 혼이 나고 울다가 잠든 날, 아마도 그날 이후였던 것 같다. 얼굴을 만지는 손길에 잠이 깨어 실눈으로 보던 따스한 아버지 눈빛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살게 된 것은. 그 눈빛은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어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어디서나 나를 당당하게 만드는 힘의 근원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사람은 대처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나를 서울로 보내셨다. 꼬불거리는 서울의 골목길을 맴돌듯 가시며 뒤돌아 손 흔들던 아버지는 혼자서도 잘 견뎌야 한다고 눈빛으로 끝없이 당부하셨다.

수시로 던지던 ‘간나새끼’라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로 들리고 지겨운 잔소리조차 가끔은 그리울 즈음 나는 아버지를 떠났다. 내 결혼식 날 뇌졸중으로 불편해진 몸으로는 신부를 데리고 입장할 수 없다고 작은아버지 손에 나를 맡기고 고개를 숙이시던 아버지, 식장을 떠나는 딸의 뒷모습에 비치던 아버지의 흔들리는 어깨가 내 가슴을 짓이기고 지나간 것도 옛날의 그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른쪽 몸을 못 쓰시면서 부터는 하얀 배는 더 이상 아버지를 태우고 다니질 못했다. 오히려 불편한 다리에 힘겹게 매달려 벗어질 듯 벗어질 듯 아버지 뒤를 따라 다녔다. 새 고무신이 삭아갈 무렵 아버지는 떠나셨다. 발인하는 날 스물여섯 맏상제인 나는 남겨진 어린 동생들과 젊은 엄마를 보며 아버지 영정 앞에 허물어져 내렸다. 향로와 저승 노잣돈이 놓인 제사상 앞에 엎드려 우는 내 눈에는 고무신 한 켤레가 밀려 들어왔다. 주인이 없어진 하얀 고무신을 안고 눈을 감았을 때 나는 환상처럼 구름이 뭉실대는 봄 하늘로 아버지가 가시는 게 보였다. 구름이 되신 듯 가벼운 몸으로 웃으며 손을 흔드시더니 자꾸 투명해져서 하늘이 되어 버린 아버지가. 삶을 내려놓은 아버지의 자리엔 고무신 한 켤레만 빈 배가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하얀 고무신은 아버지의 길이었다. 살아가는 길, 사랑하는 길, 그리고 떠나가는 길. 아버지가 타시던 하얀 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렁이고 길은 땅에서 바다로, 그리고 하늘로 끝없이 이어지며 아득해져 갔다. 그리움으로 일렁이는 하얀 배가 되어.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차츰 아버지를 닮아 가는 내 모습을 거울 속에서 만나며 나는 아버지의 고무신이 내 마음의 발에 신겨졌다는 느낌에 잠긴다. 마음이 가는 곳마다 말없이 나를 태우고 동행하고 있다는 푸근함에 감싸이면서. 마음의 흙길을 걸으며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나는 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리라.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오늘은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불러본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