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해제 / 정아경
입춘이다. 그런데 전국이 꽁꽁 얼었다. ‘입춘대길’이라도 써 붙이려 대문을 나선다면 찬바람에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무색해질 것 같다. 그 찬바람을 맞으며 밀린 잔잔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오전 내내 쏘다녔다. 가는 곳마다 들이는 음악은 음악에 문외한인 내 입에서도 흥얼거리게 했다.
“Let it go~Let it go~”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HROZEN)’의 주제곡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이 원작이다. 올 겨울 대한민국은 ‘겨울왕국’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는 듯하다. 빌보드 음원차트 1위라니 전 세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가서는 뮤지컬을 방불케 하는 음악에 반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우리 옛이야기처럼 권선징악을 주제로 설정해 놓고 있지만 가끔은 선과 악이라는 양가적 스토리가 복잡한 일상사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만지는 것은 얼음으로 변하는 마법을 가진 언니 엘사는 동생 안나와 눈사람을 만들며 놀다 동생의 머리를 다치게 한다. 그 후, 엘사는 닫힌 문 안에서 스스로 가두고 자신의 힘을 제어하려 장갑을 끼고 외롭게 보낸다. 까닭도 모르는 동생은 언니가 닫아둔 문 앞에서 노래한다.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
이 노래 역시 주제곡 못지않게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나이가 들수록 마법의 힘이 늘어나는 엘사는 동생을 외면한다. 풍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엘사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여왕 대관식을 치르는 날, 성문이 열리고 백성들 앞에 선 엘사는 자신의 왕국이 얼어버리자 도망을 친다. 비로소 깨닫는다.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을.
청록색 치마에 검정 소매 원피스을 입은 엘사는 매력적이다. 못해 섹시하다. 투명한 얼음왕국을 만들며 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구속해 온 모든 것에서 벗어나 우뚝 서겠다고 선언한다. “나를 두렵게 했던 건 이제 겁나지 않아. 차가운 공기들 속에 의지는 강해져 내가 걷던 세상 향해 이제 소리칠 거야. Let it go”
Let it go는 그렇게 엘사를 봉인해제 시키는 곡이었던 것이다. 금발을 늘어뜨리며 각선미를 도드라지게 했던 엘사의 열창은 닫힌 가슴을 두드리는 마법이었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위축감에 웅크린 이도, 경기가 나빠 장사가 안 되는 자영업자도, 시급 사천 삼백 원짜리 알바생도 엘사를 따라 긍정의 힘으로 내일을 열 것이다. 무한 긍정은 행복감을 극대화시키고 용기를 주니까. 그 순간에도 나는 만화 주인공이 저리 섹시해도 되냐면서도 두근거렸다. 그녀의 노래는, 그리고 진심어린 사랑의 눈물은 얼었던 모든 것을 녹였다. 봄눈 녹듯이.
지난 연말, 정확히 말해 12월 31일 오후 12시가 되자마자 편의점 문을 박차고 들어가 ‘봉인해제’를 외치며 담배를 사던 고3의 동영상이 한동안 떠돌았다. 그들의 행동이 마냥 귀엽기도 하고, 담배를 살 수 있다는 당당함을 누리는 젊은 패기가 신선하기도 했다. 1995년생인 내 딸도 봉인해제 행사를 치렀다. 친구들과 술집에 갈 것이라고 허락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어투로 말했다. 자정이 가까워오는데도 딸은 집에서 연말 시상식만 보고 있다가는 11시 40분에 친구 다섯 명과 술집으로 향했다. 보신각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그들은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술을 시켰다고 한다. 생일이 늦어서 주민등록증이 나오지 않은 친구는 접어 둔 확인증을 펴 보이며 주변에 큰 웃음을 주었다고 한다. 어른들이 스스럼없이 하는 술과 담배를 사고 마셔보는 것으로 그들은 스무 해 동안 닫다두었던 봉인을 해제하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봉인은 기원전 5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했다. 편지나 문서를 먼 곳으로 보낼 때, 진흙으로 바르고 도장을 찍었다. 봉한 자리에 도장을 찍는 다는 봉인을 해제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진실이 당사자에게 또는 세상에 공개됨을 의미한다. 그들의 의식처럼 1995년생들이 봉인해제 되어 성인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생각만큼 녹록한 곳이 아님을 곧 느낄 것이다. 특히 대구라는 지방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지잡대’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소신 있는 젊은이들도 머지않아 학벌지상주의의 벽 앞에 절망이란 단어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닫아버리지 않는다면, 긍정의 힘으로 Let it go 한다면 마법의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진짜 마법은 바로 그들의 마음이다.
예술(또는 문학)이 위대한 것은 세상에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어 존재해야 할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예술가(또는 작가)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해야 할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스토리의 애니메이션에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도 없는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봉인해제 된 1995년생들이 마주할 세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