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료 / 신성애
삼 층 요리 학원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감영공원 한 귀퉁이 도장 가게 처마 밑에 풍경처럼 신기료장수가 있다. 오늘도 담벼락을 등지고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노인이 돋보기안경 너머 아스팔트 길을 내려다본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땅을 울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신발의 상태를 가늠하는 모습이다. 널빤지에 ‘신발 닥음, 신발 수선’ 이라고 엉성하게 쓰인 글씨에는 고삐를 놓아 버린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오전에는 햇살이 들이 비춰 적나라한 모양이 어설퍼 보여도, 그늘이 반쯤 내려오면 제법 오래 된 가게 티가 난다. 사람도 공구도 반지르르 세월이 묻어나는 짙은 갈색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곳이 십 리라도 되는 양, 나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새로 신발을 끌며 갔다. 멀리서 볼 때는 물속같이 고요해 보이던 노인에게는 거뭇한 반점이 얼굴을 뒤덮었다. 몇 굽이를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 도시의 구석진 곳, 손바닥만 한 자리가 우주보다 넓은 듯 바라보는 표정이 한 없이 그윽하다. 달달 소리내며 힘겹게 돌아가는 선풍기가 아직도 여기가 생의 한 가운데임을 말해 준다.
가방을 둘러맨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스치듯 지나가며 바람을 일으킨다. 모두들 무엇을 찾아 저리 바삐 움직일까. 신발 소리가 경쾌한 만큼 저들의 하루도 무탈하기를 빌어 본다. 매미 소리 따라 삐걱대는 불협화음이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발소리가 뚝 끊기며 그늘을 만든다. 멈춰 선 사람 하나 상처난 일상처럼 뒤축이 너덜거리는 신발을 맡겨 두고, 슬리퍼를 끌며 공원으로 들어간다. 맥없이 널브러진 헐렁한 신발들은 진맥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려와 기대가 뒤섞여 있다.
나는 노인이 눈짓으로 권하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덜렁거리는 신발을 벗어 놓는다. “본드로 하지 말고 실로 궤매 주세요.” 어줍지 않는 말투로 주문을 한다. 걸핏하면 떨어지는 신발이기에 얼렁뚱땅 붙일까 봐 지레 오금을 박았다.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신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밑바닥을 뒤집에 요리조리 살핀다. 못으로 쳐야 할지 박음질을 해야 할지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공구 더미를 뒤적이는 갈퀴 같은 두 손이 자꾸만 떨리는 듯 더듬거린다. 수전증이 아닐까. 나는 시답잖은 눈길로 바짝 다가앉아 고치는 모습을 지켜본다. 노인은 망가진 곳을 떼어내어 본드로 붙이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한 번 꼭꼭 박음질을 하고 있다. 그러고는 어린아이 엉덩이를 다루듯 신발을 엎어 놓고 자근자근 두드린다. 톡-톡 신발에 부딪쳐 튀어 오르는 망치질 소리가 미심쩍어 하던 나를 찔끔하게 한다. 땀방울을 씻으며 매끈하게 마무리를 하는 진지한 모습에 날이 섰던 마음이 뭉그러진다. 수선을 기다리는 너저분한 신발 곁에 슬리퍼를 걸친 노인의 한쪽 발이 삐죽이 나와 있다.
“돌아가면서 박아 주세요. 오래오래 신을게요.”
나는 성한 신을 마저 벗어 슬그머니 일거리를 보탰다.
“저 영감이 삼십 년 전에도 리어카를 끌더니 아직도 저러고 있구먼.” 힘겹게 지나쳐 가는 고물상의 꽁무니를 보며 노인은 처연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어르신도 오랫동안 이 일을 하셨나 봐요?” 무료해진 나는 바느질에 되살아나는 노인의 일생을 한 땀, 한 땀 끄집어낸다.
사십 년을 하루같이 교회 가는 날 빼고는 공원 근방을 옮겨 다니며 신발을 기우셨다는 노인. 육이오 때 월남하여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평생의 업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 가정도 일구었고 자녀들도 제자리를 찾아 한시름 놓았다고 일을 걷어치웠다. 길바닥 인생을 벗어나 인천으로 이사를 갔어도 집 안에 편히 있을 성정이 못 되었다. 일거리를 찾아다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외발에 통증까지 겹쳐지니, 노인은 괜히 자식 눈치가 보였다. 남아 있는 인생 짐짝처럼 보내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하릴 없이 공원 벤치를 지키던 사람들의 멍한 눈빛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할 일이 있어 움직거려야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던가. 노인은 불현듯 녹슨 연장을 꺼내어 기름을 먹였다.
“사람이 한번 선택한 일을 버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가 벼. 저 고물쟁이도 허리 구부러지고 늙은 것 외에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 사람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직분이 있다고 하더니만, 천생 신 깁는 일이 내게는 딱인가 벼. 그걸 깨닫는 데 자그마치 반 백 년이 걸렸으니. 예전에는 밥벌이로 이 일을 했지만 이제는 내 목숨인 겨.” 신발을 꿰매고 있는 노인의 손길에 살가움이 묻어난다.
주둥이를 벌린 너덜거리는 신발은 미처 이루지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사람과 흡사해 보인다. 흙먼지가 들어차 자꾸만 접질리어 뒤뚱거리는 모양새가 안타까움만 더하게 한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은 그것은 과연 무엇이기에 저리도 사람을 허기지게 할까. 노인은 엇갈리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듯 정성스럽게 접착제를 바르고 붙인다. 타협점을 찾고 제자리에 선 사람처럼 이윽고 벌어진 앞창은 하나가 되어 간다.
사람들은 이따금씩 새처럼 문득 와 만신창이 신발을 맡기고는 훌쩍 지나간다. 노인은 낡고 해진 구두의 먼지를 털어내고, 신 바닥을 들여다보며 끈도 당겨 보고, 벗겨진 가죽도 쓰다듬는다. 어디에 상처가 났는 지, 무엇 때문에 불편한 지 족집게처럼 찾아낸다. 신발을 통해 신발 주인의 고단했을 삶도 읽어내며, 아무리 몰골이 험하여도 타박하는 법이 없다. 잘라내고 붙이고 상처를 보듬어서 흠결 없는 새것처럼 바꿔 놓는다. 노인의 야문 손끝에서 돌맹이에 채였던 흔적도, 가시밭길에 찢기었던 상처도 감쪽같이 사라진다.
공원을 나온 사람 하나가 제 신발을 찾아 신고 다시 어디론가 길을 떠난다. 길 위에 앉은 노인이 걸어가는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튼실하게 박음질된 펑퍼짐한 신발에 군살 박힌 발을 집어넣는다. 작당히 헐거워지고 낡은 신발이 한없이 편안하다. 이제는 새로운 것보다 볼품 없어도 내게 익숙한 것들이 더 소중한 나이가 된 것 같다. 망가진 신발을 수선하여 자신의 상처난 생도 까마득히 기우는지, 몰입에 든 노인의 얼굴이 노을빛에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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