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이라는 왕관 / 최장순
“저승 노잣돈을 아들 눈에 얹게 해 주게”
영웅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였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던 왕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시체를 찾아오기 위해 변장을 하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아킬레우스는 늙은 프리아모스의 부성애에 경의를 표하며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아비의 간절함은 굴종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였기 때문이다. 프리아모스는 왕으로서 권위를 누렸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서도 존경을 받았다. 늙고 힘없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트로이의 대접받는 왕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트로이>에서 늙은 왕이 보여준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늙어서 대접받는 것들. 어떤 것이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의 노인석, 무료승차, 공공시설 입장료 할인처럼 노약자에게 베푸는 배려나 혜택 정도가 우선 떠오른다. 농경시대에는 지혜가 축적된 노인이 대접을 받았다. 일할 수 없어도 당연히 공경을 받았고 한마디 말의 권위에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오늘의 기술시대에는 시간의 중심이 미래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의성과 빠른 적응력이 더 중요해졌다. 굳이 노인의 지혜를 구하지 않아도 과거의 경험은 인터넷 검색창 안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로 인해 디지털시대의 늙은이는 대부분 소외를 겪는다. 늙음이 대접받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되는 경우다.
오래되어야 대접받는 것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옮겨 보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숙성될수록 맛을 더하는 포도주, 오랜 시간을 가치로 껴안은 골동품, 늦가을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늙은 호박, 감칠맛을 돋우는 노각, 곰삭은 된장, 제 물기를 버린 마른 대추가 그렇다. 늙어지면 효용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이것들은 오히려 대접을 받는다. 예술품이 되거나 돈이 되거나 맛깔남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늙은이가 물건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과 사물을 병렬로 놓고 비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그럼에도 노인은 복지체계 안에서 시혜施惠처럼 여겨지는 구제救濟가 아니라 숙성된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능력 상실이 존엄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 품격 있는 그런 존경과 대접 말이다. 그것은 남에게 의존해서, 부탁해서, 구걸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늙은 사람들이 흔히 바라는 것, 즉 위로와 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기대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존엄을 지켜내기가 어렵다. 억지 대접을 받으려 애쓸수록 노년은 추함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문학행사를 주관했던 일이 있었다. 문단을 대표하는 단체의 장長도 초청했다. 여러 사람이 발표해야 하는 행사여서 시간을 아낄 생각에 의례적인 축사를 생략했다. 행사는 잘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입소문을 타고 온 뒤늦은 불평이었다.
“내가 왜 그 자리에 가야 했는지 모르겠어.”
못내 축사의 기회를 놓친 불만이 원로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것이 찜찜했다. 불만은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 나이듦이란 어떤 자리의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기보다는, 함께 어울리고 포용하는 위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분도 그리 생각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안타깝지만 노인의 시간은 생기를 잃어버린 시간이다. 자신 안에 쌓인 시간들을 곱씹으며 그것을 ‘인생’으로 추억한다. 지금껏 살아낸 시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그 만의 삶의 방식, 삶의 이력들이 있다. 그 독특함이 한순간에 폄훼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노인은 위로나 동정이 아니라 그냥 잘 익은 그 자체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겉은 낡아져도 속은 날로 새롭게 하는 것. 그것이 품격 있게 늙어감은 물론, 대접을 받는 길이 아닐까? 모든 기능이 점차 떨어지는 노인은 탁월함과는 거리가 멀다. 병원 진료과診療課가 하나씩 늘어나듯 싸워야 할 전선은 날로 확대되고 육신은 하강곡선을 그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곤두박질친다. 그럼에도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으면 육체적 하향곡선을 영혼의 상승곡선으로 조금이나마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마음 쓰는 것, 사람을 대하는 것, 욕심을 덜어내는 것처럼 소박한 마음으로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늙어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대접, 그것은 바로 ‘꿈꾸는 늙은이’다. 구제해야 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대접할만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일이 없으면 존엄도 없다. ‘하루가 저물어 가면 노년이 불타올라야 한다.’ 젊어서 미처 이루지 못한 것들을 여전히 생각하고 꿈꾸며 잠을 설치기도 하는 그런 근사한 일을 벌이는 노인에게 대접은 따르게 마련이 아닐까. 그러려면 전제해야 할 조건이 있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하다느니, 황혼의 지혜니, 젊어 보인다느니 하는 따위의 쉬운 위로에 저항해야 한다. 또한 지나온 삶의 커리어가 아니라 언제나 가다듬어야 할 소양에 있음을 먼저 이해하는 일이다. 현실을 치장하는 사탕발림의 말은 안주하게 만들어 앉은뱅이로 주저앉게 할 뿐이다. 늙어서 그저 순해진 노인이 아니라 삶의 지표가 제로 포인트가 되는 그날까지, 꿈꾸는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용기 없는 왕에게 얹어진 왕관은 그저 허울뿐인 장식에 불과하다. 스스로 품격과 존엄을 지켜야 한다. 그럴 때 노년이라는 왕관은 빛을 발한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꼬박/이정화 (0) | 2021.10.29 |
---|---|
센 녀석이 온다 / 이삼우 (0) | 2021.10.28 |
낱낱이 아프다 / 윤영 (0) | 2021.10.26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김기택 (0) | 2021.10.25 |
그 눈빛 / 안춘윤 (0) | 2021.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