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제조법 외 4편 불 꺼진 시장통로는 삼우제 끝난 상가 같다 어둠이 발목을 휘감으며 질겨진다 고양이가 떡집 좌판 밑에 웅크리고 이쪽을 응시한다 예민함이란 공포를 미화한 방패임을 들킨 듯 날카로운 동공을 세운다 손님이 놓고 간 생선가게 비린내가 통나무 도마 틈새에 남아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바람풍선은 척추를 접은 채 잠들어 있다 내복가게 마네킹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의 굳은 표정이 낯설지 않다 아침햇살 분주한 건널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어둠에 익숙한 나는 습관대로 머뭇거리다가 낙타처럼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늘이란 비겁한 경계나 완충지대가 아닌 마음의 빗장을 풀어도 괜찮은 침대 같은 곳이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번번 실패한 그늘 제조법을 아쉬워한다 어둠과 빛을 배합하는 연금술로 구전되었으나 자신만의 비방이 첨가되어야 휴식처가 완성될 것이다 제조법을 답습만 했을 뿐 나만의 방식은 한 행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늘은 몇 방울 빛으로 희석해서 제조할 수 없다는 증명이라며 형광등은 단번에 방을 밝혀버린다 어둠과 빛의 황금비에 추가할 비방은 아버지와 나란히 이마를 식히던 살구나무 둥치에나 남아 있을 것 같다 오늘도, 표정 없는 천장과 눈을 맞춘다 바람의 전입신고 가구들은 나보다 판단이 빠르다 체념을 발판삼아 한 걸음 먼저 적재함에 오른 표정을 악천후라고 기록해 둔다 나의 부탁대로 마지막까지 견뎠을 책상 나사못이 참을성을 뚫고 튀어나왔다 새벽의 관절이 나와 함께 삐걱거릴 때에도 자신의 자세를 지탱했을 것이다 기타는 끊어진 줄을 기다리느라 목이 더 길어졌지만 처음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비가 오면 함께 노래를 불렀었다 음표들은 방을 맴돌다 가라앉을 뿐 간벽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옆방과 등을 맞대고 사는 TV에게 배운 처세술이다 어깨를 좁혀 선반에 나란히 서 있을 수 있었던 책들을 마구잡이로 라면 박스에 포개 넣어버린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르로 퀴퀴한 이론을 섞을 것이다 함지 몇 개와 냄비는 공복의 습성까지 가져가려는 듯 덜걱거린다 그 위로 노숙자 안색의 재떨이도 던져 넣는다 옷가지 몇을 챙기다가 습관적으로 무릎 구부리던 바지를 가방에 구겨버린다 구두는 오랜 눈치로 발을 감싸며 떨어지지 않는다 기사가 복부비만형 가방을 들어 준다 시동을 거는 순간 두 번을 함께 보낸 겨울이 부르릉, 진저리로 인사를 대신한다 구름은 나보다 사태파악에 둔하다 희멀건 얼굴로 하늘만 긁는다 전입신고서에 이번 주소지를 봄의 변방이라고 기록하겠다 전출지를 묻는다면 악천후의 중심이었다고 추가하겠다 침묵 - 未/12 기흉(氣胸) 든 것처럼 돌확만 한 몸통을 출렁거리며 사내가 운다 거미가 천장을 귀퉁이부터 염하고 있는 영안실 회칠한 벽의 균열들도 조문객처럼 머뭇거린다 울음소리에 익숙한 형광등은 시들어 가는 국화를 이곳의 예의라는 듯 파리한 안색으로 바꿔 놓는다 발인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새벽인데 두 장 넘겨지고 그만인 방명록을 본다 조문이란 마지막이란 뜻을 가슴에 음각하는 일 어른들 몰래 서리태 한 되를 참외와 바꿔 먹은 비밀결사였다고 네 어미와 손톱 밑 까맣던 소꿉동무였다고 동네 할머니들이 밭고랑 필체로 줄지어 섰다 마지막 줄에 너무 늦은 내 이름을 세운다 굳은살 두툼한 손이 된 친구와 다르게 사무원 필체의 내 이름이 서먹하게 읽히고 마음 한 자락도 접혀진다 향은 음습했던 생의 냄새들을 지워 보내는 방법 출렁거리는 친구의 등과 공명하듯 연기도 절룩거린다 어머니 영정은 양보다 순하게 웃고 계신다 양은 가죽이 벗겨지는 순간에도 침묵하지만 새끼를 부를 때는 소리를 낸다던데 젖먹이도 어미를 찾을 때에만 울음소리를 낸다 하던데 묵중했던 내 친구 가을밤에 푹 젖은 산이 되어서 운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혼자 듣고 달려왔다 한다 손만 잡고, 끝내 한 말씀 못하셨다 한다 쇠말뚝 하나가 출렁거리는 저 등을 관통하고 솟아올라 내 폐부까지 찔러버리는 것 같다 자원봉사 햇살도 동해(凍害) 입어 푸석하게 흩어져 버리는 4월엔 슬픔이 잘 만져지지 않는다 황사는 타클라마칸을 떠나온 유민처럼 부유하다가 잘못 찾아온 줄도 모르고 창틀에 모여 있다 그들의 입국신청서는 바람에 희석된 필체 방 안 얼굴들과 비슷한 풍화를 겪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뿐 봄비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이들의 언어를 투명한 가루로 건조시켜 버렸는지 실내에 퇴적된 정적은 깊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퇴락했지만, 한때는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고 사막의 내지(內地)에서도 물을 길어 올렸던 부족의 대표인 양 안간힘으로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예의란 늦은 봄 내복 같은 것 낯선 손님들이 진행하는 수순을 예견하고 있는지 각기 다른 문양으로 침식된 얼굴들이 한가지 시선으로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납작한 방석들은 폐허를 지키는 주춧돌 습곡처럼 변형된 담요를 들어 올리자 명예도 내력도 흔적으로 뒤섞이면 구분할 가치가 없다는 듯 오후 햇살에 살비듬만 반짝거렸다 4월엔 슬픔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목욕탕엔 알몸으로 웅크린 몇몇이 익숙해지지 않는 표정으로 풍화암 절리 같은 척추를 드러낸 채 앞설 것 없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을에 대한 강박(强迫) 돌이켜 보면, 내가 키운 짐승이다 시뻘건 아가리로 들어갈 것은 나의 회의(懷疑)뿐 나무들은 잎을 접고 어둠 속 하나로 뭉쳐지는 데 가로등은 거부 못할 일이라는 듯 환히, 머리를 조아린다 공포는 피하고만 싶던 방향에서 시작되는 법 서쪽만 바라보는 내 습성을 알아챈 저 짐승이 하구언 근처로 서식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제 종족을 맞이하겠다고 도주하던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에 족적을 들킬 때마다 흔들린다 이미 몇몇을 집어삼켰다는 증거가 강물에 번들거리는 지금 가능한 도피 방법은 이 자리를 지키는 것뿐 역광으로 찬연했던 억새들이 허리 숙이고 홀로 선 버즘나무도 몸 떨며 제 잎을 떨어트리고 마는 것이 두려움 아니라 철 이른 바람인 까닭을 나는 밀려들 어둠이 황망해 알아채지 못했다 경계병처럼 하늘을 배회하던 구름이 저 짐승의 아가리를 짙은 윤곽으로 강조해 주지만 낭자한 출혈 끝에 먹히고 말 일 자신은 캄캄한 포만감으로 세상을 덮은 채 숙면하는 동안 응시하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자들은 나처럼 웅크린 불면을 공물(供物)로 바쳐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저녁마다 나를 먹어 치우는 짐승을 사육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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