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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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연필을 소재로 한 시

에세이향기 2021. 5. 6. 10:49

* 몽당연필 -이해인-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몽당연필의 꿈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이 되어도 좋다

침 발라 쓰다가 쓰다가 쓸 수 없을 때 버려도 좋을

한 자루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 시커먼 흑연빛이 아니라

5월의 푸른 하늘같이만 될 수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을 날으는 종달새같이만 될 수 있다면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김경윤·시인, 1957-)

* 하느님의 연필

하느님의 연필,

그것이 바로 나이다.

하느님은

작은 몽당연필로 좋아하는 것을 그리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신다.

(마더 테레사·수녀, 1910-1997)

* 연필

연필은 언제나

뼈로 글씨를 쓴다

볼펜처럼

머리로 잉크똥 흘리며

미끄럽게 술술 쓸 수 없어

뼈로 글씨를 쓴다

닳으면 닳는 대로

부러지면 부러지는 대로

다시 뼈끝이 뾰족해질 때까지

정신이 뾰족해질 때까지

칼날에 사정없이 깎이는

아픔을 견디면서 언제나

뼈로 글씨를 쓴다

그것이 마치

자기의 할 일인 양

보람인 양

(권오삼·시인, 1943-)

* 연필의 유서

쓸수록 닳아지는

나의 생애는 수많은 문장으로 태어났다

날이 갈수록 짧아지는

나의 생도

곧, 너의 삶으로 이어져

같이 줄어들 것이다.

지우개로 문질러보는

병상의 치유는 부질없는 짓이다

아린 상처를 지우고

또, 썼던 것으로

장문의 쉼표처럼

마침표를 찍으려한다.

쓰지 못한 이야기는

가슴에 품고 이어갈 일이다

생로병사보다

기쁘고 슬픈 일이 또 있으랴

유형에서 무형으로

아름다운 묶음 뒤

읽혀지길 원할 뿐이다.

(최남균·시인, 1967-)

* 연필

혼신으로 써야 할 사연이

그리도 많은가

한 줌 재로 돌아온 아들의

외짝 신발 부여안고 까무러치던

여인의 한을 쏟아내며

수명을 재촉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짧아지는 목숨

흰 쥐와 검은 쥐가

시간의 두레박 끈을 갉아먹는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심

닳아 없어질 때까지

끝없는 이야기를 온몸으로 쓴다.

(지창영·시인이며 번역가, 1965-)

* 연필 -메신저messenger

까만 심을 둘러싼

향나무 살갗을

벗겨낼 때마다 나는

진한 내음이

코끝을 쏩니다.

제멋대로

닳아버린 연필로

흐트러진 맘을

아무리 고치고

또 고쳐도

못 다한 이야기는

여기

여백(餘白)으로 비워둡니다.

(李千 윤석환)

* 연필과 지우개

쓰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고

다시 지우고

연필도 지우개도

닳아 점점 작아지네

그러다 언젠가는 둘 다

누군가에게서 끝내 버림을

받겠네! 애꿎게도 그들의 흔적만

종이에 남겠네! 노인 얼굴의 주름살처럼

(안재동·시인, 1958-)

* 연필

시작과 끝이 문 밖에서

어서 열라고 두드리고 있다

향을 두른 목의(木衣) 속에선

검은 씨앗이 길게 키를 늘이고는

껍질을 벗고

환한 세상과 입맞춤하기 위해

잔뜩 기대에 찬 모습으로 누워 있는데

어째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지 ‥‥

항상 대기하고 있는 둥근 칼을 문 깎이는

배가 고픈지 문고리를 잡고

입맛을 다시는데 힘은 없다

수 번을 물고 물리더라도 조금의 아픔도

깎아 버리고

차츰 키가 줄어들어 손아귀에서 모습을 감추는

그날까지

아예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전병철·교사 시인)

* 연필로 글쓰기

연필을 쥐고 글을 쓰다가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어디에다 두었는지 잊어버린 것입니다.

글을 계속 쓰려면

연필이 손에 쥐여야 합니다.

연필을 찾아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잊혀진 연필은 이미 잃어진 생각과 같습니다.

아니, 잃은 연필은 잊혀진 생각과 같습니다.

연필을 잃고서는

생각을 꼭 잡아놓을 수가 없습니다.

글을 못 쓰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글을 쓰다가

지우개를 찾는 사이에,

엽차를 한 잔 마시는 그 잠깐 동안에

연필을 어디 뒀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연필은 어디 가 숨었는지,

아까까지의 생각도 어디로 달아났는지

나는 글도 못쓰고,

아예 안 쓰는 게 편하다는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정우·신부 시인,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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