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곳이 외 4편 / 이삼현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또, 이만큼 자랐구나
살았구나
이 길이만큼의 목숨을 잘라내며
기쁨도 조금
감추고 살아온 슬픔도 조금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난 무덤덤한 날들을
미움인 줄도 모르고 섞인 흰 머리카락을 함께 자른다
동에서 서로 저무는 달처럼
아내 쪽으로 기울어 잠든 밤에도
너는 깨어 있었구나
일손을 놓지 못한 순간에도
칼바람이 뿌리를 드러낸 틈새 속에서도
너는 속도를 잃지 않았구나
키를 키웠구나
밀어 올렸던 성장판은 닫히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걸 잊었지만
또, 이만큼 깎는구나
버려야 하는구나
사진: 세상을 보는 또 다른눈 <FOTOYA>
양파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을 대신 깐다
거친 흙 속에 걸음을 뻗고 쑥쑥 자라오른 흔적
이순으로 접어드는 우리 부부도 이제
성장이었던 뿌리와 줄기는 말라붙고 주먹만 한 결실로 남았다
툭, 던진 한마디에도 쉬 부스러지는 겉껍질
앞만 보며 참고 살아온 모래알 같은 기억 때문이다
단단히 엉겨 붙은 흉터 딱지를 벗겨내니
웅크린 아내의 속살이 비치고 울컥 눈이 아려온다
제 안으로 깊숙이 남편과 자식들을 껴안고
한 겹 두 겹 벗겨낼수록 작아만 가는
오늘 저녁 아내는
한 끼 행복을 위해 무슨 밥상을 준비하려 했을까
다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까며 어떤 그늘에 잠겨 흔들렸을까
손톱을 세워 껍질을 벗겨내야
겨우 맑아지는 하루
말없이 저를 벗기며 흘렀을 아내 대신
오늘은 내가, 한 바가지 눈물로 울어주었다
칼 갈아요
날이 무뎌진 오월
마지막 남은 하루를 두고 넘길까 말까
산뜻한 유월로 갈아탈까 말까 망설이는데
칼 갈아요
수사도 부연도 없다
다짜고짜 낡은 달력장을 쭉 찢어 넘기라는
숫돌 같은 사내의 음성이 들려온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살았을 저 목소리
집집마다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는 걸 안다
곧기도 굽어지기도 한 골목골목을 돌아
잠시 잊고 살았던
뭉툭해지고 이 빠져 방구석에 들이박힌 칼들에게
날 선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쓰지 않아도 잘 벼린 칼날이어야 했다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하고
몸을 추슬러 다시 올라서기도 했다
연신 물을 적셔가며
오르내림을 반복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칼들에게
무 토막도 자르지 못해 녹슨 칼날에게
칼 갈아요
외치는 목소리가 움푹 닳았다
나냐 너녀
다시 자란 연필을 깎으면
사철 끌어모았던 한 트럭분의 자동차 매연과
유통기간이 지난 매미 울음소리와
까치집 다섯 채가 철거되었다
왕복 6차선 도로변에 서서
침 발라가며 열심히 받아쓰기한 버즘나무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았으련만
초등학교는커녕 몽당연필이 되었다
심기가 곧은 가지에 이파리를 달고 사방으로 뻗어 나부끼던 날
쉿,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몰려와 연필을 깎아댄다
애써 받아 적은 행적을 싹둑, 싹둑 잘라내며
기역 니은 디귿 리을
그래. 거기까지만 알면 돼
도심. 삭막의 거리에 파란 그늘을 그려 넣으렴
웃지 말고 시야와 일조권도 가리지 말고
아 이 우 에 오
받아 적을 수 있으면 돼
전기톱과 낫을 든 인부들이 깎아놓은 연필 토막
다시 몸통만 남은 가로수가
숨겨진 팔을 내밀어
밀린 일기를 또박또박 눌러 적는다
나냐 너녀 노뇨 누뉴느니
사진<네이버 뉴스>
긁적 타결
머리띠를 두른 햇살 노동자들
주 52시간제 도입과 준공영제를 실시하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극심한 미세먼지를 뚫고 버스를 운행하느라 과로한 햇살들
더는 견딜 수 없어 다소곳이 외 4편 / 이삼현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또, 이만큼 자랐구나
살았구나
이 길이만큼의 목숨을 잘라내며
기쁨도 조금
감추고 살아온 슬픔도 조금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난 무덤덤한 날들을
미움인 줄도 모르고 섞인 흰 머리카락을 함께 자른다
동에서 서로 저무는 달처럼
아내 쪽으로 기울어 잠든 밤에도
너는 깨어 있었구나
일손을 놓지 못한 순간에도
칼바람이 뿌리를 드러낸 틈새 속에서도
너는 속도를 잃지 않았구나
키를 키웠구나
밀어 올렸던 성장판은 닫히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걸 잊었지만
또, 이만큼 깎는구나
버려야 하는구나
사진: 세상을 보는 또 다른눈 <FOTOYA>
양파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을 대신 깐다
거친 흙 속에 걸음을 뻗고 쑥쑥 자라오른 흔적
이순으로 접어드는 우리 부부도 이제
성장이었던 뿌리와 줄기는 말라붙고 주먹만 한 결실로 남았다
툭, 던진 한마디에도 쉬 부스러지는 겉껍질
앞만 보며 참고 살아온 모래알 같은 기억 때문이다
단단히 엉겨 붙은 흉터 딱지를 벗겨내니
웅크린 아내의 속살이 비치고 울컥 눈이 아려온다
제 안으로 깊숙이 남편과 자식들을 껴안고
한 겹 두 겹 벗겨낼수록 작아만 가는
오늘 저녁 아내는
한 끼 행복을 위해 무슨 밥상을 준비하려 했을까
다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까며 어떤 그늘에 잠겨 흔들렸을까
손톱을 세워 껍질을 벗겨내야
겨우 맑아지는 하루
말없이 저를 벗기며 흘렀을 아내 대신
오늘은 내가, 한 바가지 눈물로 울어주었다
칼 갈아요
날이 무뎌진 오월
마지막 남은 하루를 두고 넘길까 말까
산뜻한 유월로 갈아탈까 말까 망설이는데
칼 갈아요
수사도 부연도 없다
다짜고짜 낡은 달력장을 쭉 찢어 넘기라는
숫돌 같은 사내의 음성이 들려온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살았을 저 목소리
집집마다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는 걸 안다
곧기도 굽어지기도 한 골목골목을 돌아
잠시 잊고 살았던
뭉툭해지고 이 빠져 방구석에 들이박힌 칼들에게
날 선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쓰지 않아도 잘 벼린 칼날이어야 했다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하고
몸을 추슬러 다시 올라서기도 했다
연신 물을 적셔가며
오르내림을 반복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칼들에게
무 토막도 자르지 못해 녹슨 칼날에게
칼 갈아요
외치는 목소리가 움푹 닳았다
나냐 너녀
다시 자란 연필을 깎으면
사철 끌어모았던 한 트럭분의 자동차 매연과
유통기간이 지난 매미 울음소리와
까치집 다섯 채가 철거되었다
왕복 6차선 도로변에 서서
침 발라가며 열심히 받아쓰기한 버즘나무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았으련만
초등학교는커녕 몽당연필이 되었다
심기가 곧은 가지에 이파리를 달고 사방으로 뻗어 나부끼던 날
쉿,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몰려와 연필을 깎아댄다
애써 받아 적은 행적을 싹둑, 싹둑 잘라내며
기역 니은 디귿 리을
그래. 거기까지만 알면 돼
도심. 삭막의 거리에 파란 그늘을 그려 넣으렴
웃지 말고 시야와 일조권도 가리지 말고
아 이 우 에 오
받아 적을 수 있으면 돼
전기톱과 낫을 든 인부들이 깎아놓은 연필 토막
다시 몸통만 남은 가로수가
숨겨진 팔을 내밀어
밀린 일기를 또박또박 눌러 적는다
나냐 너녀 노뇨 누뉴느니
긁적 타결
머리띠를 두른 햇살 노동자들
주 52시간제 도입과 준공영제를 실시하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극심한 미세먼지를 뚫고 버스를 운행하느라 과로한 햇살들
더는 견딜 수 없어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내일의 해는 뜨지 않을 거라고 낯을 붉혔다
미세먼지 농도가 달라 지역별로 해결하라는 당국과
영역을 넘나드는 햇살의 특성상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지자체가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판국이다
소식을 전해 들은 동식물들
한창 열매를 키우던 매실나무와 한 뼘씩 키를 늘린 소나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개미들도 당장
발이 묶인다는 내일 아침 출근길 걱정뿐이다
밤새 뭇별들이 깜박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협상은 진행되고
임시방편으로 낮달을 운행하는 방안과
개똥벌레처럼 각자 빛을 달게 하자는 안을 신중히 논의했지만
결국 사용자 주머니를 터는 손쉬운 방법으로 몰아가고
긁적 타결
밤샘 줄다리기 끝에 가려운 곳을 슬쩍 긁어주는
예정된 수순에 따라 봉합되었다는 속보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들뜬 목소리의 기자가 생방송으로 전하고 있다
여러분
모두 우려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해가 떴습니다
머리띠를 푼 햇살들이 거리를 비추며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내일의 해는 뜨지 않을 거라고 낯을 붉혔다
미세먼지 농도가 달라 지역별로 해결하라는 당국과
영역을 넘나드는 햇살의 특성상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지자체가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판국이다
소식을 전해 들은 동식물들
한창 열매를 키우던 매실나무와 한 뼘씩 키를 늘린 소나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개미들도 당장
발이 묶인다는 내일 아침 출근길 걱정뿐이다
밤새 뭇별들이 깜박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협상은 진행되고
임시방편으로 낮달을 운행하는 방안과
개똥벌레처럼 각자 빛을 달게 하자는 안을 신중히 논의했지만
결국 사용자 주머니를 터는 손쉬운 방법으로 몰아가고
긁적 타결
밤샘 줄다리기 끝에 가려운 곳을 슬쩍 긁어주는
예정된 수순에 따라 봉합되었다는 속보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들뜬 목소리의 기자가 생방송으로 전하고 있다
여러분
모두 우려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해가 떴습니다
머리띠를 푼 햇살들이 거리를 비추며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또, 이만큼 자랐구나
살았구나
이 길이만큼의 목숨을 잘라내며
기쁨도 조금
감추고 살아온 슬픔도 조금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난 무덤덤한 날들을
미움인 줄도 모르고 섞인 흰 머리카락을 함께 자른다
동에서 서로 저무는 달처럼
아내 쪽으로 기울어 잠든 밤에도
너는 깨어 있었구나
일손을 놓지 못한 순간에도
칼바람이 뿌리를 드러낸 틈새 속에서도
너는 속도를 잃지 않았구나
키를 키웠구나
밀어 올렸던 성장판은 닫히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걸 잊었지만
또, 이만큼 깎는구나
버려야 하는구나
사진: 세상을 보는 또 다른눈 <FOTOYA>
양파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을 대신 깐다
거친 흙 속에 걸음을 뻗고 쑥쑥 자라오른 흔적
이순으로 접어드는 우리 부부도 이제
성장이었던 뿌리와 줄기는 말라붙고 주먹만 한 결실로 남았다
툭, 던진 한마디에도 쉬 부스러지는 겉껍질
앞만 보며 참고 살아온 모래알 같은 기억 때문이다
단단히 엉겨 붙은 흉터 딱지를 벗겨내니
웅크린 아내의 속살이 비치고 울컥 눈이 아려온다
제 안으로 깊숙이 남편과 자식들을 껴안고
한 겹 두 겹 벗겨낼수록 작아만 가는
오늘 저녁 아내는
한 끼 행복을 위해 무슨 밥상을 준비하려 했을까
다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까며 어떤 그늘에 잠겨 흔들렸을까
손톱을 세워 껍질을 벗겨내야
겨우 맑아지는 하루
말없이 저를 벗기며 흘렀을 아내 대신
오늘은 내가, 한 바가지 눈물로 울어주었다
칼 갈아요
날이 무뎌진 오월
마지막 남은 하루를 두고 넘길까 말까
산뜻한 유월로 갈아탈까 말까 망설이는데
칼 갈아요
수사도 부연도 없다
다짜고짜 낡은 달력장을 쭉 찢어 넘기라는
숫돌 같은 사내의 음성이 들려온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살았을 저 목소리
집집마다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는 걸 안다
곧기도 굽어지기도 한 골목골목을 돌아
잠시 잊고 살았던
뭉툭해지고 이 빠져 방구석에 들이박힌 칼들에게
날 선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쓰지 않아도 잘 벼린 칼날이어야 했다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하고
몸을 추슬러 다시 올라서기도 했다
연신 물을 적셔가며
오르내림을 반복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칼들에게
무 토막도 자르지 못해 녹슨 칼날에게
칼 갈아요
외치는 목소리가 움푹 닳았다
나냐 너녀
다시 자란 연필을 깎으면
사철 끌어모았던 한 트럭분의 자동차 매연과
유통기간이 지난 매미 울음소리와
까치집 다섯 채가 철거되었다
왕복 6차선 도로변에 서서
침 발라가며 열심히 받아쓰기한 버즘나무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았으련만
초등학교는커녕 몽당연필이 되었다
심기가 곧은 가지에 이파리를 달고 사방으로 뻗어 나부끼던 날
쉿,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몰려와 연필을 깎아댄다
애써 받아 적은 행적을 싹둑, 싹둑 잘라내며
기역 니은 디귿 리을
그래. 거기까지만 알면 돼
도심. 삭막의 거리에 파란 그늘을 그려 넣으렴
웃지 말고 시야와 일조권도 가리지 말고
아 이 우 에 오
받아 적을 수 있으면 돼
전기톱과 낫을 든 인부들이 깎아놓은 연필 토막
다시 몸통만 남은 가로수가
숨겨진 팔을 내밀어
밀린 일기를 또박또박 눌러 적는다
나냐 너녀 노뇨 누뉴느니
사진<네이버 뉴스>
긁적 타결
머리띠를 두른 햇살 노동자들
주 52시간제 도입과 준공영제를 실시하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극심한 미세먼지를 뚫고 버스를 운행하느라 과로한 햇살들
더는 견딜 수 없어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내일의 해는 뜨지 않을 거라고 낯을 붉혔다
미세먼지 농도가 달라 지역별로 해결하라는 당국과
영역을 넘나드는 햇살의 특성상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지자체가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판국이다
소식을 전해 들은 동식물들
한창 열매를 키우던 매실나무와 한 뼘씩 키를 늘린 소나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개미들도 당장
발이 묶인다는 내일 아침 출근길 걱정뿐이다
밤새 뭇별들이 깜박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협상은 진행되고
임시방편으로 낮달을 운행하는 방안과
개똥벌레처럼 각자 빛을 달게 하자는 안을 신중히 논의했지만
결국 사용자 주머니를 터는 손쉬운 방법으로 몰아가고
긁적 타결
밤샘 줄다리기 끝에 가려운 곳을 슬쩍 긁어주는
예정된 수순에 따라 봉합되었다는 속보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들뜬 목소리의 기자가 생방송으로 전하고 있다
여러분
모두 우려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해가 떴습니다
머리띠를 푼 햇살들이 거리를 비추며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경덕 시 모음 (0) | 2022.05.08 |
---|---|
강적들/신미균 (0) | 2022.04.28 |
나무의 꿈 / 문정영 (0) | 2022.04.16 |
장조림/길상호 (0) | 2022.04.06 |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꿈/하여진 (0) | 2022.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