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구와 공이 / 박성희
절구가 깨졌다. 작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두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새댁이 되면서 들여온 것이니 긴 풍상의 세월 앞에 견딜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굽도 뭉툭하게 닳은 절구지만 도자기 재질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의 소리가 마음을 끌었다. 그런 연유로 신형 분쇄기보다 더 자주 눈길이 가던 절구였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묵은 정이 좋은 법이라 깨진 절구를 보니 마음이 휑해지는 것은 어쩔 수 가 없었다. 하기야 그 긴 세월 동안 툭하면 공이로 매질을 당했으니 사람으로 치면 벌써 명줄을 놓았을 것을 오래 버티어온 셈이다.
깨진 절구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이웃 부부의 모습이 겹쳐진다.
몇 년 전에 퇴직한 박 선생은 매사가 자기 위주로 흘러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도 자기가 놓아둔 대로 있어야 했고, 밥상 들어올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얼굴색이 변하기 일쑤였다. 또 자신의 말 한마디에 온 가족들이 하루 일과표를 수정해야할 정도로 완고하였다. 다른 가족은 없는 것처럼 늘 박 선생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만이 담을 넘나들었다
그의 아내인 입실 댁은 남편과 많이 달랐다. 키가 멀쑥하고 호남 형으로 생긴 남편과는 달리 왜소하고 오종종한 생김새를 가진 입실 댁은 한 눈에 보아도 짝이 기울었다. 가끔 두 사람이 외출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은 두어 걸음 성큼성큼 앞서 걷고 입실 댁은 재바르게 쫓아갔다.
입실 댁은 천생 여자였다. 칠순이 넘은 노인임에도 늘 꽃분홍 립스틱을 발랐다. 나긋나긋한 말투와 정갈한 옷매무새도 동네의 또래 노인들과는 달랐다. 또 남편 알기를 하늘인양 하니 입실 댁이 남편에게 못 미친다고 수군거리던 이웃들도 자연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남편 되는 박 선생의 조급하고 깐깐한 성미를 입방아에 올렸다. 입실 댁의 조신함은 타고난 성품 탓도 있겠지만 워낙 대쪽 같은 남편 곁에서 긴 세월을 견디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 같았다. 입실 댁은 숨죽여 산 세월만큼이나 쌓였을 설움의 표출로 자신의 늙고 메마른 입술에 색을 입혀주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화사한 꽃물로 자신의 답답한 현실을 덮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병원이라곤 모르던 입실 댁이 몇 년 전부터 속이 쓰리다며 병원 문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가끔 평상에 앉아 가슴을 쓸어내리는 입실 댁을 만날 수 있었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환한 미소를 보내왔다. 그럼에도 화장으로 가린 입실 댁의 까칠한 얼굴빛과 피곤한 기색이 늘 마음에 걸렸다.
결국 막연한 불안감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입실 댁의 부음을 들었다. 머리가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뇌혈관에 문제가 생겼단다. 수술도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갑작스런 아내의 부재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눈물만 흘렸다던 박 선생은 결국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갔다. 곰살맞던 입실 댁의 체취가 구석구석 남아있는 집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삼 절구 공이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단단한 박달나무라지만 오랜 기간 절구질을 한 탓에 밑 부분이 닳아 볼품없이 납작해졌다. 어쩌면 자신을 휘두르기만 했지 단 한 번도 맞을 일이 없었던 공이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을 치려면 그 자신 또한 그 만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임을 너덜너덜해진 공이의 밑 부분이 말해 주는 듯 했다. 내 땅 뙈기 하나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위해 허리 한 번 못 펴고 달려왔던 장남의 무게가 버거웠을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를 겨우 끝냈나했더니 눈이 초롱같은 삼남매가 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또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리며 살자니 때때로 엄습해오는 외로움과 박탈감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한 두 번 이었겠는가. 혼자 그 모든 아픔들을 삭히기에는 가슴이 너무 좁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입실 댁의 치마폭에 힘겨움의 절반쯤을 내려놓지 않았을까. 어쩌면 미더운 사람이라서 세상에 부딪혀 한껏 뾰족해진 마음으로 아내를 찔러댄 것이리라.
그런 아내의 부재는 박 선생을 일시적인 실어증에 걸리게 할 만큼 충격적인 것 이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킨 채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자신의 공이질을 다 받아줄 것 같은 절구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공이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또 절구에게 안겨준 상처의 파편들이 튀어서 자신 또한 조금씩 마모 되어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짧은 것이어서 내 코앞의 일만 헤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의 자리를 넓혀보았더라면 절구가 날뛰는 공이에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순응의 삶을 살았던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공이가 가끔 쉬어가면서 절구에 묻은 찌꺼기를 털어 주기도하고 은근히 가려운 곳도 긁어주었더라면 좀 더 오래 절구와 동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공이 홀로 남아 자기 연민에 치우쳐 절구의 아픔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미욱함을 탓한들 어쩌랴. 외로운 절구 공이를 잘 닦아서 마음 한 자락으로 덮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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