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9/25 4

몸살/김선우

몸살             - 김선우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지구의 시간.해 지자 비가 내린다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잠시 겹쳐진 우리는잠시의 기억만으로 퍽 괜찮다.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이런 시간이 좋아.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알게 된 날이야.알게 될 날이야.축복해.  시집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 * 김선우(..

좋은 시 2024.09.25

풍경소리 / 김 학 명

풍경소리 / 김 학 명  땡∼땡 땡그랑. 땡∼땡 땡그랑.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산허리를 돌아 산사로 내려 앉으면 풍경이 흔들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굴려 놓는다.산내음이 그윽한 마알간 공기를 살며시 가르는 그 소리는 들을 때마다마음을 밝게하고 편안하게 한다. 햇빛을 받은 이슬방울이 영롱해진 모습으로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라고 할까 고요하고 신비롭다.맑은 마음,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속의 눈에서 벗어나 참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가진 풍경은 언제나 마음속의 깨우침을 두드린다. 산사는 늘 그렇게 마음을 끌어 안는다.   산사에서 소리를 내는 사물(종, 북, 운판, 목어)은 인위적으로 힘을 가해야 하지만 풍경은 그런 울림을 원하지 않는다. 종처럼 장엄하거나 북처럼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좋은 수필 2024.09.25

징 / 김규인

징 / 김규인  장인의 눈이 가마 안을 응시한다. 가마 안에 넣은 쇳물이 끓으면 색깔로 온도를 가늠한다. 저울에서 주석과 구리의 무게를 달아 가마에 넣는다. 떠오르는 이물질을 바가지로 걷어내고 쇳물 한 바가지를 떠서 틀에 붓는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듯 구리에 주석을 더하면 새로운 금속이 잉태한다. 놋쇠 덩어리인 바대기를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한다. 뜨거운 불을 가하여 놋쇠를 길들일 수 있다. 바대기가 벌겋게 달면 가마에서 꺼내 모루 위에 올린다. 바대기를 돌려가며 두드리는데, 원하는 모양이 될 때까지 가마에 넣었다가 꺼내어 메질한다. 메질하다가 다시 열을 먹이면 바대기는 고분고분 해진다. 장인이 어떻게 두드리는가에 따라 바대기는 작은 꽹과리가 되고 큰 징이 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열기로 뜨겁다. ..

좋은 수필 2024.09.25

받침, 그 위 / 최명임

받침, 그 위 / 최명임    어느 씨족의 씨방에서 빠져나와 저의 왕국을 세웠을까. 바람도 지치는 변방에 홀로 피었더라면 멍이 들었을 꽃이다. 무리를 이끌고 봄의 뜨락에 흐벅지게 피었다. 꽃은 제 모습에 반해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나는 꽃들의 하느작거림에 벌겋게 취기가 오른다. ​ 개양귀비가 붉은 깃발을 높이 올렸다. 아래로 필까, 위로 필까 고개를 내리 꺾고 몇 날을 생각에 잠겼더니. 꽃잎들이 하늘가에서 팔랑거린다. 향기에 취한 바람이 어쩌자고 꽃 속을 누비고 다닌다. 햇살 정원에서 벌이는 꽃들의 왈츠 바야흐로 그들의 우주가 펼쳐진다.​ 그들의 우주는 한 점으로부터 발아하였다. 바람과 비와 산소와 대지의 뭇 요소와 알 수 없는 무수한 입자들과 융합하여 존재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한 점은 현상의 근원이 되..

좋은 수필 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