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10 17

향내 품은 툇마루 / 김순경

향내 품은 툇마루 / 김순경        좁고 가파른 길이 산속을 파고든다. 어둠이 사라지자 치열하고 분주했던 숲속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하기만 하다. 촌부의 손등처럼 거친 껍질의 소나무들도 깊은 잠에 빠진 듯 서로 엉켜 있다. 산허리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구불구불한 계곡 길이 묵혀두었던 숲의 사연들을 토해낸다.  마지막 능선을 넘어서자 멀리 기와지붕 용마루가 나타난다.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양지바른 곳이라 온종일 햇살이 머무는 아늑한 지형이다. 큰 절이 있었던 넓은 빈터에는 기와집 몇 채만 흩어져 있고, 작은 연지에는 누렇게 말라버린 연꽃 줄기들이 화려했던 지난여름을 말하는 듯 얼음을 뚫고 솟아있다. 개목사開目寺를 제대로 찾아왔다.  원래는 흥국사였다.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의상대사..

좋은 수필 2024.10.31

따슴물에 잠기다 / 하인혜

따슴물에 잠기다 / 하인혜 행복한 ​따슴물에 잠기다 / 하인혜   구순(九旬)이 넘은 엄마가 사는 곳은 남향받이로, 좁다란 베란다에는 누룽지 같은 볕내음이 고여 있다. 고물거리는 다육이의 숨결조차 달뜬 냄새를 더한다. 실과 시간에 처음 들어가 보았던 온실 같은 곳에서 엄마가 그려내는 동선은 지극한 곡선이다. 볕이 데운 물을 가까이에 두고 오가는 움직임이 자늑하다. 지난 겨울부터 다독였던 잔조롬한 시래기 두름을 거두고 물갈이하며 밭은 숨을 내쉰다. 해 질 녘이면 따슴물이 담긴 대야에 두 발을 넣고 앉아 있는 모습은 정물화의 소품처럼 적요하다. 엄마는 햇볕이 데운 물을 따슴물이라 불렀다. 우리 가족에게는 익숙한 호칭인데 따듯한 물이 맞는 말이다. 필요에 의해 급하게 데워낸 물이 아닌 손을 넣으면 온기를 느낄..

좋은 수필 2024.10.31

숨은 소리/김정화

숨은 소리김 정 화      북소리 찾아 길을 나서는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북을 매단 나무를 만나고 싶었다. 세상에는 그 북보다도 더 큰 북이 있을 테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매단 북보다 더 큰 북이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러한 생각을 하며 소문으로만 듣던 현고수 마을을 찾기로 했다. 의령 유곡천을 지나니 들판 한가운데 아담한 마을이 보인다. 세간리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동체 굵은 둥구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우뚝 선 나무 밑으로 한적한 마을이 여름날 뜨거운 계절 속에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느티나무에서 울려나오는 매미 소리만이 마을의 평화를 잔잔하게 깨트리고 있다. 그것은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이 마을에 들어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깨어 있으라는 경종의 소리다. 동네를 지키는 ..

좋은 수필 2024.10.27

세상 끝에 선 어미 호박꽃 / 김영수

세상 끝에 선 어미 호박꽃 / 김영수. 21. 4:00​ 세상 끝에 선 어미 호박꽃 / 김영수 ​ 한여름 뒷마당 텃밭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로움 속에는 보이지 않게 변하는 것들이 있었다. 깻잎을 솎아내고 있을 때, 큰 이파리에 가려 안 보이던 연둣빛 호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굵을까. 며칠 못 본 사이에 호박꽃을 밀어내고 꼭지를 차지한, 갓 태어난 호박일 터였다. 새 생명의 출현이 반가워 작은 탄성을 지르려는 순간, 누렇게 시든 호박꽃에 눈길이 잡혔다. 호박이라는 결실을 얻으려고 모든 기운을 소진하여 지친 듯, 꽃은 제자리마저 내주고 호박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제 임무를 다한 꽃은 몸을 오그려 닫아걸었고 관능의 유열을 나누던 여름 볕은 홀로 뜨거웠다. 일주일 전만 해..

좋은 수필 2024.10.25

바다가 그린 추상화 / 려원

바다가 그린 추상화 / 려원  눈앞에 거대한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가 펼쳐져 있다. 레드와 오렌지가 뒤섞인 무제 無題다. 하루 종일 달궈진 해가 서서히 바닷물 속으로 몸을 담근다. 뜨거운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지면 바다는 열기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알을 삼키기 직전, 바다는 혀가 엘까 잠시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의 순간,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바다는 오렌지가 뒤섞인 레드로, 레드가 뒤섞인 오렌지빛으로 타오른다. 불의 알이 아주 작은 공처럼 보일 때쯤이면 바다는 비로소 긴 혀를 내밀어 휘감는다. 적당히 말랑말랑한 불의 알을 삼킨 바다는 붉게 타오르고 밤이 깊도록 뜨거움을 기억한다. 검푸른 어둠이 끝없이 물결을 타고 밀려오고 밀려갈 때 바다는 잠들지 않고 소리로 존재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암흑 ..

좋은 수필 2024.10.24

우리들의 애도의 시간

우리들의 애도의 시간 애도하는 미술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은 죽음과 관련된 그림을 그려왔다. 삶과 죽음이 남매지간처럼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줬으며 죽어가는 것들을 안쓰럽게 여겼다. 그리고 이들을 화폭에 담아 대상에게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시간에 저항함으로써 죽어가는 것들을 애도하는 미술만의 방식인 것이다. 또한 영원회귀나 삶의 영속성에 대한 염원을 담아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기도 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 이집트의 고분벽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네덜란드의 정물화 모두 죽음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인식이 담긴 도상들이다.우리 선조들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 선조들은 민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교적, 신화적 도상들을 그렸고 일상 안에서 함께 했다. 그들의 삶 속엔 죽음에 대한 깊은 인..

평론 2024.10.21

봄 편지 / 박금아

봄 편지 / 박금아​"어느 날, 종가댁 맏며느리 같은 분이 다가와 삼 년 동안 일 천여 통의 편지로 저를 붙잡아 앉혔습니다."*지인이 보내온 수필집의 서문을 읽다가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1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인연이 부러웠다. 문득 지난 한 해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속을 드나들던 손 편지 한 장이 생각났다.몇 번이나 미룬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매번 그쪽에서 날짜를 잡았고, 취소한 쪽은 나였다. 후일 연락하겠다고 해놓고도 하지 않았다. 손주를 돌보느라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지만, 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왔다.그녀는 점심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당신..

좋은 수필 2024.10.20

도미의 장례/서*연

도미의 장례    도미의 몸통이 눈부시다. 접시 바닥의 무늬가 그대로 내비칠 만큼 도미는 얇게 회 처져 있다. 드문드문 젓가락질이 오가며 도미의 살점이 한 점 한 점 사라져 간다. 비릿한 물방울을 사방으로 튕기며 파닥이던 도미의 꼬리는 점차 움직임이 느려진다. 그렁그렁, 연한 소금기를 머금고 껌뻑이던 도미의 눈알이 출렁, 하고 터진다. 검은 먹물이 도미의 망막을 시커멓게 뒤덮는다.  도미의 부레는 이미 부패를 시작했다. 혹처럼 부풀어 오른 부레에는 비상 같은 청록색 반점이 돋는다. 그러나 도미는 끝까지 목숨을 놓지 않으려 한다. 다물어지는 아가미를 필사적으로 뻐끔거리며 도미는 숨을 몰아쉰다. 숨 가쁜 도미는 사해의 부력으로 금방이라도 떠오를 것만 같다. 아가미는 산소를 넣고 금방이라도 눈부시게 일어날 것..

좋은 수필 2024.10.20

포란/조현숙

포란 / 조현숙포란/조현숙 행복한 루치024. 10. 14. 13:35URL 복사​ ​ 병실의 밤은 누군가 불을 끄는 순간, 시작된다. 오늘을 파장하는 하늘에서 노을을 쓸어 담은 어둠이 물체와 공간을 한 보자기에 싸안는다. 복도를 구르는 불빛이 문틈 사이로 실뱀처럼 기어들어 온다. 빛을 따라 병상의 모서리들이 각을 풀고 보자기 밖으로 제 몸을 드러낸다. 엄마는 등에 꽂힌 관 때문에 뒤척이지도 못하고 불편한 채 잠들었다. 그래도 얕은 숨을 푸푸, 뱉어내는 걸 보면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노령의 얇은 몸피로 힘든 수술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모두의 난제였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깨는 기울어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지금부터는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고, 어둠이 세상을 덮어도 새날은 밝아..

좋은 수필 2024.10.17

참기름 / 素人

참기름 / 素人  그저 나태함으로 따사로운 가을 볕 몸 감는 건 아니야 날선 검에 허리 잘리고도 꼿꼿한 정신 곧추세운 채 두름으로 묶인 목숨 찌는 한숨 忍苦하는 열정으로 젖은 육신 서서히 말리는 거다  빈들에 모여 선 우리들 모습에 까마귀도 울고 가지만 이대로 저물진 않아 너희들 모진 작대기에 멍들고 터져 나간 몸뚱아리 살과 뼈 문드러져도 더 세게 내리쳐라 세게 내리쳐라 훌훌 가짜들 쫓겨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았는데  너희들 거대한 조직고문실 같은 섬뜩한 열기 훅훅 볶아치고 전기구이 통닭 빙글빙글 뺑뺑이 돌려 우리들 일그러진 표정이어도 끝내 하나로 뭉쳤다 더러는 검게 그을린 육신 하나 둘 해체되고 타 버렸어도 밀려오는 거대한 무게 더 세게 내리눌러라 세게 내리눌러라  마지막 한 방울로 정제되는 우리들..

좋은 시 2024.10.16

꽃분이들을 위한 헌사 / 허창옥

꽃분이들을 위한 헌사 / 허창옥   꽃샘바람이다. 바람 속에서 신천의 수양버들은 연둣빛의 길고 풍성한 가지들을 멋들어지게 흔들고 있다. 늘어선 버드나무들의 배경에 이제 곧 개나리가 만개하겠다. 바람은 꽃을 샘내지만 꽃은, 여린 꽃들은, 세상의 모든 꽃들은, 바람을 이겨내고 아름다이 피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린다. 그리하여 제가 귀한 꽃임을, 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환한 꽃임을 그 한살이로 보여준다.분출이란 여인이 있다. 일흔한 살이다. 위로 언니가 여섯이나 있었단다. 칠공주의 막내다. 그 여인이 이름의 내력을 얘기했을 때 정말이지 아연했다. 나는 요즘의 젊은이도 아니고 그런 이름이 생긴 시대적 또는 심리적 배경을 알고도 남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부터 딸막..

좋은 수필 2024.10.13

명태 / 이규석

명태 / 이규석   모처럼 옛 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둘러앉았다. 목로주점에서 잘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잔을 주고받는데, 자식 농사 망쳤다는 친구의 넋두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송창식이 부른 ‘명태’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 ’ 허구한 날 겨울 바다를 거슬러 올라야 하는 명태는 이름이 많아도 쓰임새마다 사람들의 입맛을 당긴다. 가까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태는 탕으로서 으뜸이요, 먼바다에서 잡아와 얼린 동태는 서민들의 추위를 녹여주는 찌개가 되거나 명절에는 흔쾌히 담백한 전이되기도 한다. 추운 들판에서 얼고 ..

좋은 수필 2024.10.12

[오늘 토박이말]구뜰하다

[오늘 토박이말]구뜰하다  #토박이말 #순우리말 #고유어 #숫우리말 #토박이말바라기 #구뜰하다 #하루하나 #맛 앞에 '엇'이 붙은 '엇구뜰하다'는 '조금 구뜰하다'는 뜻이랍니다. 이렇게 맛을 나타내는 말도 참 많습니다. 여기 모두 다 보이진 못하지만 맛을 나타내는 말을 아래에 모아 봤습니다. 말 그대로 맛만 보시고 여러분이 느끼는 맛은 몇 가지나 되는지 세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구수하다 : 맛이나 냄새 따위가 입맛이 당기도록 좋다.엇구수하다 : 맛이나 냄새가 조금 구수하다.담백하다 : 1 아무 맛이 없이 싱겁다. 2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맹맹하다 : 제 맛이 나지 아니하고 싱겁다.모름하다 : 생선이 신선한 맛이 적고 조금 타분하다.밍밍하다 : 제 맛이 나지 않고 몹시 싱겁다.바따라지다..

우리말 2024.10.10

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여유를 가지고 가만가만 흘러가는 강이 아름답다. 강은 바람의 발자국으로 수없는 물결을 이룬다. 이른 새벽에는 안개를 피워 올려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 어디쯤에 작은 섬들을 두어 풀들을 자라게 하고 새들이 와서 한가롭게 놀게도 한다. 늘 앞산의 그림자를 품어주고, 마주하는 하늘의 구름들까지 품어주며, 다가가는 것은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는다.집 앞에는 강이 있다. 그 강은 영남의 명산인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울산만으로 흘러가는 태화강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강가의 마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강변은 다듬어진 산책로가 있고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사계절 내내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좋은 수필 2024.10.08

선을 읽다/황진숙

선을 읽다/황진숙 선을 읽는다. 선이 불러일으키는 무수한 감각이 돌올하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발에서부터 하루의 끝을 몰고 오는 어둑발까지, 아니 홀로 깨어 있는 새벽녘까지 선은 그네들에게 깃든 기운을 드러내며 풍경을 이룬다. 말이 없는 사물의 내면을 시각화하며 의미를 발화한다.오랜만에 지인을 방문했다. 주인장이 반갑다며 차를 내온다.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케모마일 차를 권한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데 찻잔이 예사롭지 않다. 입술을 맞대는 부분부터 바닥까지 금이 그어져 있다. 그로부터 파생된 몇 줄기의 선들이 넝쿨처럼 뻗어나갔다. 흘러내리는 물줄기 같기도 한 선들은 금분으로 치장되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인장이 설거지하다가 놓쳤다며 깨진 부위를 접합했다고 말해준다. 애장하는 잔이라 차마 버릴 수 없..

발표작 2024.10.05

밥 / 허창옥

밥 / 허창옥  압력밥솥 밸브가 돌아간다. 똑똑해 빠진 밥솥이 말을 한다. “증기가 빠져나오니 주의하세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한다.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으니 밥을 저어주세요.” 그래요, 잘 저어서 먹겠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고맙다. 삶의 무거운 등짐도, 온갖 근심도 궁극적으로는 밥을 향해 있다. 밥 덕분에 살고 밥 때문에 싸우고 밥을 못 먹어서 죽는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죽음에 직면한 혈육과 친지들을 보아왔다. 대개는 질병 때문이다. 질병이 몸을 침범하고 악전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곡기를 끊었다.” 란 말을 이따금 들었다. 곡기를 끊는 것, 그건 마지막에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그러니까 복된 일이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음은 그게 어떤 상황이..

좋은 수필 2024.10.03

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색깔 고운 시간이다. 홍매화,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마음처럼 애매한 날씨의 이른 삼월에 잎보다 먼저 깨어난 꽃. 뭇 봄꽃들이 다투어 피기 전에 서둘러 봄을 점령하고 이내 물러나는 꽃. 섬진강 둔치의 홍매화가 봄 표지판인 양 반가운 여자는 꽃 보러 길을 나섰다. 아직도 봄꿈을 꾸시는가.   지금, 여기, 봄. 세상사에 끌려다닌 사람들에게 꽃은 못다 피운 꿈이든 조물주의 위로이든 딴 세상을 펼친다. 강을 끼고 접어든 광양 매화마을은 부신 꽃 누리다. 잔잔한 들녘과 언덕을 휘도는 흰 빛도 황홀한 하루 치의 무릉도원, 말간 언어들 사이로 막 봄을 열고 나온 홍매화가 난연한 문장을 긋는다. 내 생에도 저런 빛깔 남아있을지, 척박한 터전에 봄 하나 접붙여 볼 마음으로 견주고 따지..

좋은 수필 2024.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