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9 24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호젓한 시골 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백두대간 숲속 깊은 곳에/ 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 가게 해야겠다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 / 숲의 정거장엔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단청 고운 절집 탱화 아래 앉아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몸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

좋은 시 2024.09.27

의자/박철

어느 강연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다. 시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말간 얼굴로 무자비한 질문을 하는 독자가 있다. 꼭 있다. 뒷걸음질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호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듯 말을 찾았다. 변변찮은 대답을 동전 몇 푼처럼 꺼내놓은 순간을 지나고 생각하노니, 그때 이 시를 알았더라면! 나는 무구한 얼굴로 커다란 질문을 한 독자에게 답변 대신 이 시를 낭독해줬을 게다.이 아름다운 시는 1연에서 이미 끝났다. 높고도 깊은 ‘참말’이 순하게 놓여 있다. 시의 시원이 궁금한 자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순간이다. 갈참나무 의자 허리에 누군가 “연선아 좋아해” 하고 새기는 일과 시인이 원고지에 시를 써내려가는 일의 본질이 같다는 것! 그러니까 마음 깊이 치밀어 올라 꺼내놓은 말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새겨두는..

좋은 시 2024.09.27

길/조용미

누군들 없을까. 인생의 한 페이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람. 칸칸의 마디를 넘겨도 페이지 속에 묻히지 않는, 인생이라는 책을 펼칠 때마다 자동으로 펼쳐지는 사람. 충분히 용서했어도 되살아나는 사람. 누군들 그 사람 때문에 힘든 적이 없을까.무자비하게 찾아오는 그 아찔함은 생의 허기를 더 도드라지게 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 하나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흘려보냈던 것을 애써 들춰내어 스산함을 자처한다. 왜 인간은 ‘돌아보는 맛’을 놓지 못하는가.조용미 시인은 인생의 여정에서 그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아무리 용서를 서로 수박 나누듯 나눠 가졌다 해도 그것은 해결 나지 않는 일임을, 그것은 이 세계에서 덮이지 않는 사건임을 사무치게 선언한다.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인연이라니. 이 어찌할 수 없는 ..

좋은 시 2024.09.27

손을 사랑하는 일/피재현

손을 보는데 마음이 미어지는 사람, 있다. 다른 것도 아닌데 손만으로 그 사람의 많은 걸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 어쩌면 손에 보이는 것은 얼굴 표정일 수도 있으며 사연일 수도 있으며 마음일 수도 있는 것. 손은 당신하고 조화롭게 잘 지내고 있을 터인데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만큼의 애정 때문이런가. 그때 덥석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충동만으로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것은 주책일런가.시인은 자신의 갈라진 손을 돌보다가 손이 했던 일들을 들춰내는데 참 절묘한 것은, 그의 손 역사와 내 손의 역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손인데 뭐 어때서 그리 잡질 못했나. 손만 잡으면 좀 괜찮아질 텐데 우린 뭐 하느라 손을 내려놓고만 있었나.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아주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는 늦은..

좋은 시 2024.09.27

면벽/박용래

여름의 촉감, 여름의 냄새, 여름의 소리, 여름의 색깔이 짧은 시 한편에 고루 담겨 있다. 때는 여름의 한복판, “바람 한 점 없는 밤”이다. 고양이는 덜 더운 누다락으로 피신하고, 화자는 모기향 앞에서 벽을 마주하고 수련 중이다. 눈 감고 5분이란 오묘한 시간이 흐르고, 화자는 다른 시공간으로 건너간다. 감은 눈 속에서 펼쳐진 세계는 가을, 한밤이다. 누가 죽었을까. 꽃상여가 벼이삭을 스치며 내는 소리, 망자를 보내는 산 자들의 곡소리가 들린다. “어허 어하……” 다시 눈 뜨면 코끝엔 모기향 냄새, 여름은 가을밤처럼 돌연 깊어져 있으리라.눈 감으면 떠오른다. 어릴 적 모기향에서 연기가 올라갈 때 나던 냄새, 선풍기는 더운 바람을 만들어내고 나를 향해 부채질을 해주던 할머니의 손이 느려지다 멈추면 여름이..

좋은 시 2024.09.27

불면/최지은

나는 쉽게 잠드는 편이다. 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걱정이나 불안이 있을 때는 다르다. 작은 망치로 하룻밤을 조각내듯, 여러번 깨고 잠들기를 반복한다. 그럴 땐 하룻밤이 아니라 여드레 밤을 겪은 느낌이다. 몸은 자고 싶은데, 마음이 자꾸 헤매는 기분이 들 때 이 시를 만났다.시인은 단 두 줄로 아름다운 불면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군더더기 없이 환하다. 머릿속에서 누가 작은 횃불을 들고 서성이는 것 같다. 발은 차갑고 머리는 뜨거워 몸의 순환 회로가 고장 난 것 같을 때, 잠이 자꾸만 달아날 때 눈 감으면 보인다.“오래 가꾸지 않은 정원을/ 홀로 거니는 아이”의 혼곤한 서성임! 가꾸지 않은 정원은 어떨 것인가?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은 정원은 자연보다 황량해진다. 꽃이었던 꽃, 나무였던 ..

좋은 시 2024.09.27

장마/김사인

비 오신다. 긴 긴 장마다. 어릴 땐 장마가 싫었다. 더운 것만으로도 고단한데 축축해지기까지 해야 하다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일까?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장마 지면 비를 피한다는 핑계로 어느 산장 같은 곳에 숨어, 한 사나흘 틀어박혀 있고 싶다. 벽난로 앞에 젖은 양말을 널어두고, 질릴 때까지 빗소리를 듣다 졸고 싶다. 꿈같은 일일까?눅눅한 빨래를 개다 ‘장마’의 첫 구절을 돌림노래 외듯 흥얼거린다.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듣는 이가 없어도 괜찮다. 그저 내리는 비에 대고 흥얼거릴 뿐이다. 그런데 공작산 수타사는 어디쯤에 있는 절일까? 그곳의 물미나리·패랭이꽃은 얼마나 싱싱할까? 시 속 화자를 따라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

좋은 시 2024.09.27

어디 사는지 모른다/황인숙

골목이 사라지자 구멍가게가 없어졌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편의점이 생겼다. ‘시다’가 하던 일을 ‘알바’가, 덤 대신에 ‘1+1’이, 외상은 신용카드가 몰아냈다.그 많던 단골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당·빵집·과일가게·정육점·전파사·양장점·문방구…. 간판이 떠오르지 않는가. 락희슈퍼·서울사진관 같은 가게 이름도 불러보자.주인장 얼굴과 가게 안팎이 눈에 선할 것이다. 모든 단골집에는 적어도 두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오래된 주인과 오래된 자리(장소)다. 그래야 단골이 생긴다.황인숙의 시에서 단골은 단골이 아니다. 알바는 점주(店主)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에서 단골은 소비자다. 오직 구매력으로만 인정되는 소비자. 우리는 언제나 소비자이고 가끔 생산자다.알바는 또 누구인가. 간혹 명찰을 달고 있지만 그..

좋은 시 2024.09.27

별표 전파사 / 박진형 作

유홍준의 시와 함께] 별표 전파사 / 박진형 作  그의 전파사에는 수선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세 개의 별과 금빛 별이 반짝이던 시절부터별을 수리하던 그는 오늘도 별의 안부를 묻는다  떨어진 별들이 다시 운행하기를 기다릴 때이들은 한 음계씩 타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사내의 회로계를 거치면 비밀은 드러나  전파사는 별들의 무덤에서 별들의 자궁으로 변했다그의 드라이버만 있으면 별들은우주 어디든 다시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그의 은하수를 건너 새로운 별로 이주할 꿈을 꾸었다별똥별이나 혜성은 그의 전파사를 기웃거렸다마모된 공구함과 칸칸이 채워진 낡은 부속품들은 오랜 친구하늘에서 노래하는 별들 속에 그의 체온이 남아 있다점점 사라지는 별들과 새롭게 태어나는 별들 사이에서그의 전파사는 종종 기우뚱거린다어떤 별도 들르지..

소소한 이야기 2024.09.27

몸살/김선우

몸살             - 김선우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지구의 시간.해 지자 비가 내린다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잠시 겹쳐진 우리는잠시의 기억만으로 퍽 괜찮다.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이런 시간이 좋아.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알게 된 날이야.알게 될 날이야.축복해.  시집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 * 김선우(..

좋은 시 2024.09.25

풍경소리 / 김 학 명

풍경소리 / 김 학 명  땡∼땡 땡그랑. 땡∼땡 땡그랑.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산허리를 돌아 산사로 내려 앉으면 풍경이 흔들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굴려 놓는다.산내음이 그윽한 마알간 공기를 살며시 가르는 그 소리는 들을 때마다마음을 밝게하고 편안하게 한다. 햇빛을 받은 이슬방울이 영롱해진 모습으로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라고 할까 고요하고 신비롭다.맑은 마음,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속의 눈에서 벗어나 참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가진 풍경은 언제나 마음속의 깨우침을 두드린다. 산사는 늘 그렇게 마음을 끌어 안는다.   산사에서 소리를 내는 사물(종, 북, 운판, 목어)은 인위적으로 힘을 가해야 하지만 풍경은 그런 울림을 원하지 않는다. 종처럼 장엄하거나 북처럼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좋은 수필 2024.09.25

징 / 김규인

징 / 김규인  장인의 눈이 가마 안을 응시한다. 가마 안에 넣은 쇳물이 끓으면 색깔로 온도를 가늠한다. 저울에서 주석과 구리의 무게를 달아 가마에 넣는다. 떠오르는 이물질을 바가지로 걷어내고 쇳물 한 바가지를 떠서 틀에 붓는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듯 구리에 주석을 더하면 새로운 금속이 잉태한다. 놋쇠 덩어리인 바대기를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한다. 뜨거운 불을 가하여 놋쇠를 길들일 수 있다. 바대기가 벌겋게 달면 가마에서 꺼내 모루 위에 올린다. 바대기를 돌려가며 두드리는데, 원하는 모양이 될 때까지 가마에 넣었다가 꺼내어 메질한다. 메질하다가 다시 열을 먹이면 바대기는 고분고분 해진다. 장인이 어떻게 두드리는가에 따라 바대기는 작은 꽹과리가 되고 큰 징이 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열기로 뜨겁다. ..

좋은 수필 2024.09.25

받침, 그 위 / 최명임

받침, 그 위 / 최명임    어느 씨족의 씨방에서 빠져나와 저의 왕국을 세웠을까. 바람도 지치는 변방에 홀로 피었더라면 멍이 들었을 꽃이다. 무리를 이끌고 봄의 뜨락에 흐벅지게 피었다. 꽃은 제 모습에 반해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나는 꽃들의 하느작거림에 벌겋게 취기가 오른다. ​ 개양귀비가 붉은 깃발을 높이 올렸다. 아래로 필까, 위로 필까 고개를 내리 꺾고 몇 날을 생각에 잠겼더니. 꽃잎들이 하늘가에서 팔랑거린다. 향기에 취한 바람이 어쩌자고 꽃 속을 누비고 다닌다. 햇살 정원에서 벌이는 꽃들의 왈츠 바야흐로 그들의 우주가 펼쳐진다.​ 그들의 우주는 한 점으로부터 발아하였다. 바람과 비와 산소와 대지의 뭇 요소와 알 수 없는 무수한 입자들과 융합하여 존재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한 점은 현상의 근원이 되..

좋은 수필 2024.09.25

차가는 달이 보름달이 될 때/윤국희

차가는 달이 보름달이 될 때                                                                 윤국희아파트 현관문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숨 한번 뱉어내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뛰어나온다. 막내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있었고, 아이들의 눈을 보니 마음이 시렸다. 막내가 안기면서 “엄마, 방금 언니가 나 놀렸어.”, “아이고, 그랬어, 왜 너는 동생을 놀려?” 하면서 일상의 대화를 안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베란다에 가득 쌓여있는 배추들. 앗, 김장이다. 순간 몸이 얼어버려 막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큰딸은 순식간에 차가워진 엄마의 ..

좋은 수필 2024.09.23

도법(刀法)/ 김은주

도법(刀法)/ 김은주  칼끝이 닳았다. 자루를 보니 한창 시절에는 몸피가 제법이었을 칼날이 턱없이 야위었다. 뽀족한 칼끝이 퍼덕이는 전어의 아가미를 내려찍는다. 바다로 돌아갈 듯 퍼덕이던 전어는 일순 잠잠해진다. 할머니 잽싼 손놀림에 물속에 있던 전어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물 빠진 소쿠리로 이동한다. 할머니는 반쯤 내려온 머릿수건을 걷어 올릴 시간도 없이 절명한 전어의 옷을 벗긴다. 은빛 비늘이 할머니 손등에 눈가루처럼 쏟아진다. 전어의 등줄기를 긁어내리는 할머니 손길이 리드미컬하다. 어깨와 굵은 팔뚝을 적당히 흔들 때마다 칼질은 신명이 오른다. 물오른 칼날에 알몸이 된 전어는 다시 소쿠리에서 물이 든 바가지로 옮겨져 배를 연다. 그리고 자신의 속을 토해 낸다. 이때도 여윈 칼끝은 전어 배 가르기에 안성..

좋은 수필 2024.09.22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시 모음

명왕성 유일 전파사  흑백 텔레비전에는 명왕성(冥王星)이 들어 있다어쩌면 모든 가전(家電)에도 있는지 모른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 하는 것이 명을 다한 거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 모르는 게 없다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 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바닥에 엎드려 기술을 익히던 무릎, 생의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달달 외우던 공구들의 이름마다 알파벳이 벗겨져 반들반들하지만 마치 자기 뼈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닷새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지문이 닳도록 눌러 헐거워진 버튼, 눌러도 빠져나오지 않는 중고 카세트테이프를 어깨너머의 기술로 척척 고쳐낸다 스프링을 갈아 끼우자 사라진 가수를 불러내는 카세트 녹음기, 구성진 노래가 전..

좋은 시 2024.09.22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은 간이역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느려질 것 같은 시공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들 사이에 누군가의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

좋은 수필 2024.09.22

권상진 시

접는다는 것 /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

좋은 시 2024.09.14

거울 속으로 온 손님 / 이대흠(1967~ )

거울 속으로 온 손님 / 이대흠(1967~ )​ 치매에 걸렸던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셨다 소파 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어서 나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보았던 소파였다 낡은 초록색 소파는 아버지의 마지막 주소지였다 아버지는 그곳에 자기 생을 다 놓고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느날이었다​ 끼니때가 되어 아버지를 부르자 아버지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거울 속 한 노인을 발견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서 밥먹읍시다 하지만 거울 속 노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밥상 쪽으로 올수록 그 노인은 멀어졌다 어허, 자식들이 다 이해하니 같이 가잔 말이오 아버지가 여러번 권했으나, 거울 속 노인은 겸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면 마주하여 손을 내밀었고, 등 돌려 밥상으로 오면 멀어졌다 그 노인..

좋은 시 2024.09.11

비빔밥 / 이대흠

비빔밥 / 이대흠  비빔밥엔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물이나 남새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잘못 끓인 찌개 찌끄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홍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여러 가지 반찬과 참기름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추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

좋은 시 202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