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독, 그 어느 날의 기억 / 허정진 물 항아리에는 오래된 풍경이 세 들어 산다. 고향 옛집 낡은 공간마다 침묵 속에는 유년의 굴풋한 그리움이 흑백의 시간으로 숨어있다. 식구들 모여앉아 두리반을 펼치던 대청마루, 댓돌 아래 내려서면 아침 빗질 자국 선명한 마당이 있고 아래채에는 뒷간이 딸린 돼지우리가 있었다. 나지막한 돌담에는 호박넝쿨이 여름햇볕 아래 바지런히 기어오르고, 밤이면 빗살무늬로 쌓이는 달빛에 식구들 웃음이 휘영청 계절마다 익어갔다. 부엌은 안방과 대청마루를 끼고 집안 깊숙이 들어앉아 있었다.커다란 정지 문을 삐거덕 열고 들어서면 부엌은 동면에 든 굴속처럼 어두컴컴했다. 문틈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없었다면 비밀요새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반질반질한 가마솥과 부뚜막 아래에는 시커먼 아궁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