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107

압화/설성제

압화 불 꺼진 창문 앞을 오랜 시간 서성이다 돌아온 날이면 압화 접시를 꺼내든다. 어딘가에서 눈비 맞으며 피었던 꽃잎들인가, 아니면 어느 길가에서 철없이 피어 원도 한도 없이 향기를 뿜어왔던 꽃들인가. 하얀 접시 위에 다시 피어난 꽃들과 눈을 맞춘다. 물관으로 들이마시는 숨을 내뱉기가 힘이 들었다. 아마 심장이 짓눌리고 숨통이 조여들어, 마신 햇살과 바람이 전신을 통과할 때 여리디 여린 몸피는 이미 이 새상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힘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왔다. 누군가 모로 뉘어주어 바늘구멍 같은 숨통이라도 열어주었으면 싶었다. 살고 싶다는 절규의 시간도 이미 사그라졌다. 이대로 눌려야 한다. 산에서 들에서 바람 따라 햇살 따라 어우렁더우렁 지내왔던 시간도 있었지..

좋은 수필 2021.05.02

정미소 풍경/구활

정미소 풍경 /구활 폐허의 성처럼 버티고 서있는 낡은 정미소.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정미소 앞을 지나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찡해 온다. 헛간을 덮고 있던 지붕 한쪽은 날아가 비바람이 그냥 들어오고 다른 한쪽 지붕은 임시방편으로 색깔 다른 함석으로 덧땜질해 두었지만 미풍에도 소리를 내는 박자가 제 멋대로인 타악기로 변한지 오래다. 두고 떠나온 고향이 못내 그리워 시골여행을 할 때마다 정미소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차를 세워 이곳저곳을 살펴보지만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생동감 있는 기계음은 들리지 않는다. 낱알을 주워먹던 참새떼도, 나락 가마니 속을 들락거리던 쥐들도 더 이상 먹을 게 없어 이사를 갔는지 사위는 적요롭기 그지없다. 그래도 햇볕만은 떨어져 나간 천정의 빈 공간을 타고 들어 와 그늘이 범접할 수 없..

좋은 수필 2021.05.02

구두/조일희

구두 조일희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한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려한 구두가 솔직히 탐이 났다. 나와 어..

좋은 수필 2021.05.01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동해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벼르던 여행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구룡포로 가는 옛길을 따라 조개를 잡고 볼락회에 소주 한잔 마시다 죽은 듯 자야겠다고 먹은 마음을 포기하기에는 마음한테 미안해졌다. 남들이 보면 시답잖은 여행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이판사판으로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며 나는 도시락을 싸고 남편은 텐트와 침낭을 챙겼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는 일이잖은가. 호미곶을 지나 구룡포항에 닿을 즈음이면 파도가 지쳐 있을 거라는 희망은 출발할 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일기예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파도는 천년 묵은 한을 토해 해안반도 둘레길을 덮쳤다. 긴 목덜미를 자랑하듯 제철소 수십만 개의 불..

좋은 수필 2021.05.01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경오년 여름에 쉬파리가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다. 온 집안에 가득 차고, 바글바글 번식하여 산이나 골이나 쉬파리로 득실거렸다. 높다란 누각에서도 일찍이 얼어죽지 않더니, 술집과 떡집에 구름처럼 몰려와 윙윙거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그러니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 났다 하고, 소년들은 떨쳐 일어나 한바탕 때려잡을 궁리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파리 통발을 놓아서 거기에 걸려 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파리약을 놓아서 그 약 기운에 어질어질할 때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말했다. "아, 이것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분명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다시 태어난 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구한 삶이었던가?..

좋은 수필 2021.05.01

집/박시윤

집 박 시 윤 결혼한 동창이 집들이를 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친구는 서른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중매로 만나 석 달 만에 결혼식을 치렀다. 늦은 결혼을 자랑이라도 하듯 마흔 평이 넘는 새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유명 상표의 혼수들로 속을 꽉 채운 집은 보기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시댁 이야기며 남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그녀의 달콤한 신혼 자랑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휑했다. 환한 달빛이 앞을 비춰 줄 것이라는 생각과 늦은 밤 남편이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쥐죽은 듯 고요한 공기가 나를 더욱 숨죽이게 했다. 늦은 귀가에 면죄 받지 못할 죄인처럼 뒤꿈치를 ..

좋은 수필 2021.04.30

아버지의 혼불 / 김용삼

아버지의 혼불 / 김용삼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속도감이 완연해진다. 서너 시간의 여유 탓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탑게 인사를 나누던 일행들이 하나둘 노루잠을 청하고 있다. 차분하게 비 오는 날의 서정을 누리기에 제 격인 분위기다. 살며시 커튼을 들추어 바깥을 살핀다. 출발할 때 쏟아지던 발비는 어느새 실비로 잦아들고 있다. 빗방울은 버스의 속도감에 끈질기게 저항하며 유리창으로 몸을 던진다. 그러나 빗살무늬의 긴 빗금을 긋곤 이내 허공으로 튕겨나간다. 속도에서 탈락한 빗방울들은 뒤따라오는 차의 전조등에 투사되어 폭죽처럼 부서져 내린다. 허공으로 점묘되어지는 빛의 파편들은 오래 전 고향의 밤하늘을 물들이던 반딧불이의 군무와 오버랩 된다. 망연하게 비와 반딧불이의 추억을 오가다문 득 내 기억 한 켠에 켜..

좋은 수필 2021.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