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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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 / 임병식

쟁기 / 임병식 ​ ​ 등산길에서 옛날처럼 소를 몰아 쟁기질하는 광경을 보았다. 아침 일찍 시작했는지 이른 시간인데도 마른 논 두 이랑을 갈아엎고 세 번째 이랑에 접어들고 있었다. 곁에 서서 바라보니 쌓인 두둑이 정연한데, 물기가 축축하다. "이랴, 이랴" 부리는 소가 힘이 넘치는데도 농부는 연이어 다그친다. 그러니까 부리망을 쓴 소는 목을 길게 빼고 눈을 크게 한번 희번덕거리더니'이래도 내가 더딘 거야' 하는 듯 잰걸음을 옮긴다. 그러니까 몸에 매달린 쟁기의 속도도 빨라지며 상쾌한 마찰음을 내고, 보습 날에 떠 담긴 흙이 볏을 통해 위로 치솟으면서 고꾸라져 뒤집힌다. 그런 쟁깃밥이 아주 볼만하다. 이 정도의 솜씨라면 소도 농부도 상머슴이지 싶다. 옛 사람들은 머슴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쟁기질과 이엉 ..

좋은 수필 2022.10.07

멱둥구미/박모니카

멱둥구미 박 모니카 시골의 겨울밤은 길기도 하다. 먼데 개 짖는 소리 잦아들고 간혹 눈 밟고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 멀어지면 공간이 비어버린 듯 아득해진다. 그 공간을 달빛이 서성인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까치둥지에, 흙벽 옆에 그을릴 대로 그을린 굴뚝 위에도 달빛은 그림자를 남겨둔다. 그렇게 겨울밤은 깊어만 간다. 잠자라고 재촉하듯 건넌방에서 아버지는 헛기침을 해대지만 못 들은 척 살그머니 할머니 방으로 기어들어간다. 밤참이 생각나서다. 동지섣달 긴긴 밤, 잠이 오지 않아 화로에 잉걸불을 뒤적이시던 할머니는 할머니를 찾아 준 손녀가 살가워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손녀를 쓰다듬어 주신다. 할머니에게는 항상 태우다만 지푸라기 냄새가 났다. 동백기름 냄새에 섞인 할머니만의 특유한 냄새였다. 조르지 않아도 할머니..

좋은 수필 2022.10.07

낡고 오래된 파자마 / 윤성학

낡고 오래된 파자마 / 윤성학 사는 게 파자마 같다 어디에 벗어두어도 상관없다 구겨지거나 늘어나거나 색이 바래면서 몸은 파자마에 길들여진다 앞도 없고 뒤도 없다 사는 것은, 사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여기저기 실밥이 터진 꼴을 보다 못한 아내가 파자마를 새로 사왔다 파자마 속으로 퇴근하는 저녁이면 아내보다 파자마가 더 나의 체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두 번만 입어보면 안다 그는 형상기억합금 브래지어처럼 내 몸의 정보를 고스란히 모방한다 누구라고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없이 살고 싶겠는가 파자마를 보면 투둑 가슴이 내려 앉는다 여기저기 생활의 솔기가 타지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내가 거기 있기에 무뎌짐도 익숙해지면 그뿐이란 걸 알기에

좋은 시 2022.10.06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 한옥순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 한옥순 이마트 앞에만 가도 왠지 주눅이 든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언젠가 체크무늬 가방을 스쳐가듯 본 적 있다 그 물건은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본다는 듯 우아하고 거만하게 내 앞을 지나갔다 어쩐 일인지 나는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고 바보처럼 부스럭 소리도 못 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열등감을 가르쳤을까 아니다 타고난 본성이다 스스로 터득한 싸구려 본능이다 검고 질긴 비닐봉지의 태생이다 내 속엔 대체적으로 싸구려가 들어간다 지저분한 것, 질척한 것들도 들어가곤 한다 종종 만 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도 들어간다 어떤 것은 내 속에서 죽어가거나 썩어가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땐 내 몸도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진다 얼마나 한이 많으면 나는 생전 죽지 않는다 ..

좋은 시 2022.10.06

한 수 위 / 복효근

한 수 위 /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면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펜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허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좋은 시 2022.10.06

물미장/ 류 현 서

물미장/ 류 현 서 객주 문학관에 농기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다들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시대의 사내를 닮았다. 지게 앞에 작대기 하나가 길게 누웠는데, 밑 부분에 뾰족하게 박힌 쇠가 보인다. 지게와 작대기를 보니 평생 짐을 진 아버지의 삶에 가 닿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낯선 골짜기에서 전우들이 하나둘 쓰려져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라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상처뿐이었다. 식솔이 먹고 살려면 산골짜기 비탈이라도 개간해야 했다. 물길을 따라 일구다 보니 천 평이 될까 말까 한 논이 자그마치 쉰하고도 다섯 다랑이나 되었다. 말이 좋아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었기에 논바닥이라야 함지박만 했다..

좋은 수필 2022.10.06

틈이 말하다/김윤선

틈이 말하다/김윤선 오른손 장갑의 엄지손가락이 찐득하다. 아무래도 물이 새는 것 같다. 엊그제 샀는데 웬 일이람.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장갑을 뒤집었다. 양손으로 장갑 주둥이의 양끝을 잡고 공중에서 서너 바퀴 휙 휙 돌리자 이내 공기가 차오른다. 그런데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장갑의 한 귀퉁이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피비빅, 씨익, 작지만 강한 소리, 영락없는 바람 빠지는 소리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늘귀만한 구멍이 있다. 언제 그랬지? 아차, 어제 생선을 다듬었던 기억이 났다. 고놈, 그 새 흔적을 남겨 놓았구나. 굽기 편하게 장만하느라 생선 대가리와 지느러미를 자르는 새 허방을 찔렸다. 난감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나는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렸다. 삶에서 불현듯 끼어드는 틈이 이 뿐일..

좋은 수필 2022.10.06

인생소묘/이정순

인생소묘/이정순 손끝에 느껴져 오는 매끈한 촉감이 살갑다. 아득한 욕망의 해바라기로 칙칙해진 영혼을 벗겨내듯 안간힘을 주며 나무 표면을 문지른다. 여러 차례의 사포질에 떨어져 내리는 지저깨비들이 고운 채에 받힌 밀가루마냥 흩날린다. 한나절에 걸쳐 두껍게 덧칠된 껍질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나니 정맥 같은 나뭇결을 내보인 투명한 속살이 정오의 햇살에 눈부시다. 나에게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한 실핏줄이 드러나 보이던,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지닌 시절이 있었다. 오래 부려먹어 낡은 식탁을 버릴까 고민하다가 리폼해서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재료가 괜찮은 원목에다가 내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벗이기도 하다. 어쭙잖은 글을 긁적거릴 땐 책상도 되어주고, 이것저것 다양한 공예 작업을 할 때는 작업대로도 ..

좋은 수필 2022.10.06

외줄/권혜민

외줄/권혜민 줄을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줄이 무엇에 걸린 듯 크게 한번 출렁한다. 허공에 발을 헛디딘 것처럼 현기증이 인다. 무슨 변고일까. 잡은 줄을 놓고 내려다볼 수도, 소리를 질러볼 수도 없어 나는 무릎이 꺽여 푹 쓰러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를 다시 매야겠어." 얼굴이 빨개진 남편이 등 뒤에 서 있다. 줄이 흔들리며 느슨해져서 아래로 추락한 게 아닐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내 앞에 선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한다. 휘청대는 줄을 타고 어떻게 올라왔는지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여기는 오층 건물 옥상이다. 남편은 삼층 창에 매달려 간판수리 공사를 한다. 옥상 기둥에 묶여 있는 줄을 지켜보는 게 내 임무지만 고가 잘못되거나 줄이 끊어진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좋은 수필 2022.10.06

신발 / 최장순

신발 / 최장순 우사牛舍를 연다. 갇혔던 냄새가 일제히 코끝으로 달려든다. 제 익숙한 길로 달려가고 싶은 것들. 오랫동안 매어 있던 탓일까, 일어서던 관절이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어느 초원을 누비던 우공牛公인가. 제 살과 장기를 모두 내주고 무두질한 수많은 길을 이끌고 내게 찾아온 것들. 그들을 코뚜레에 꿰어 야전으로, 도시의 아스탈트로 끌고 다녔다. 우렁우렁 깊은 눈, 슬픔도 잠시 말뚝에 매어두고 주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려간 것들. 반항은 금물, 복종만이 그들이 살 길이었다. 주인에게, 아니, 주인의 또 다른 상전에게 수없이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이제 노쇠했다는 이유로, 주인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컴컴한 신발장에 몰아넣은 것들. 한때는 건강한 그것들이 세상의 돌부리에 채이지는 않을까. ..

좋은 수필 2022.10.06

청어의 꿈

청어의 꿈/정문숙 검은 실루엣을 벗어내며 희붐하게 다가앉는 새벽 바다다. 정박한 어선의 불빛에 반사되어 비늘 같은 물결이 반짝인다. 파도가 달려오다 일순간 사라지고 또 떼 지어 몰려오다 발아래에서 잦아든다. 파도의 여음을 들으며 해안선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과메기 덕장이 나온다. 바다에 발목 잡히고 눈이 꿰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있는 과메기들이 줄지어 있다. 마른 밥을 삼킨 듯 목이 메거나 힘에 부치는 일로 가슴이 답답해질 때에는 과메기 덕장을 찾곤 한다. 그들에게도 넓은 바다를 꿈꾸며 수심 깊은 곳으로 나아가던 때가 있었을 게다. 그들에게서 박제된 나의 꿈을 읽는다. 눈빛마저 푸르던 한 마리 청어의 꿈이 아련하다. 문득 심청색의 유선형 몸체를 흔들며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던 청어처럼 바다에 ..

좋은 수필 2022.10.05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소낙비 연주에 고요하던 숲이 수런거린다. 빗방울이 푸른 느낌표를 찍을 때마다 한 뼘씩 나무들은 자라고 시나브로 가을도 깊어진다. 하늘과 땅이, 음악소리조차 깊숙이 가라앉은 날, 비 내리는 날은 기다림의 색도 짙푸르다. 비 그친 뒤 고요한 적막이 나무의자에 길게 앉아 있다. 비 탓인지 밤나무는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 등에 커다란 옹이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나이가 많은 나무다. 중심을 곧추 세울 기력조차 없는 걸까. 이웃한 언덕바지를 짚고 선 것이 영락없이 지팡이를 쥔 노인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낡은 의자처럼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산후 후유증 탓이거니 했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 생(生의) 가을에 이르렀음에도 용수철처럼 팽팽하리라 믿고 몸을 혹..

좋은 수필 2022.10.05

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복스럽다고 항간에서 지칭하는 것들은 다 복숭아를 닮았다. 복스럽게 살이 올라 꼬리를 연방 좌우로 흔드는 백구 강아지, 크림빵을 한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볼이 빵빵한 꼬마아이, 남편에게 내조 잘하고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손끝이 야무진, 밥 붙은 통통한 얼굴을 한 며늘아기 등 탐스럽고 토실토실한 것들은 죄다 복숭아를 닮았다. 다른 과일보다도 유독 복숭아와 이들이 비견되는 건 복숭아의 유순한 맛, 복숭아의 몰캉한 질감, 복숭아의 묵직한 크기, 복숭아의 완만한 맵시, 복숭아의 보드란 피부 때문일 것이다. 복숭아의 유독 눈에 띄는 특징은 과실의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길게 세로로 그어진 금이다. 일설에는 이 길게 그어진 금을 국부에 빗대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그것은 시야..

좋은 수필 2022.10.05

이별 / 김경

이별 / 김경 밖이 잠잠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도 요란하더니 어느새 정적이 감돈다.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던 터다. 목을 빼고 내다보니 우리 집 창문 위로 뻗어있던 고가 사다리가 없다. 이제 정말로 간 건가. 애써 담담했던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를 해서 여태 살았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며칠 전 이별주를 나누면서 밤이 늦도록 이 식당 저 카페를 전전했다. 우리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부슬비 내리는 밤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 집으로 왔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던 그녀가 갑작스런 이유로 가게 된 사실에 적응되지 않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삼십대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

좋은 수필 2022.10.05

소낙비 내리는 동안 / 김만년

소낙비 내리는 동안 / 김만년 들판 끝에서 메뚜기 떼 같은 것들이 새까맣게 몰려온다. 아까부터 서쪽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기어이 한바탕 쏟아 붙는다. 소낙비다. 직립의 화살촉들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꽂힌다. 나는 호미를 내팽개치고 농막으로 냅다 뛴다. 소낙비는 마치 적의 진지를 포격하듯이 토란과 깨꽃들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다. 팔월염천에 축 늘어졌던 깨꽃들이 임을 만난 듯 비를 반긴다. 생글생글 깨춤을 춘다. 춤이 과한 몇 잎은 통꽃으로 떨어진다. 나는 비에 갇힌 채 오도카니 앉아 비바라기를 하고 있다. 소낙비는 쇠로 만든 무기인가. 저 순연한 빗방울이 만물의 젖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세상을 쓸어가기도 하고 종내는 내 심장까지 직격하니 말이다. 불가근불가원,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존재지..

좋은 수필 2022.10.03

구절초 향기/박영희

구절초 향기/박영희 가을향기 머금은 구절초 꽃이 풀 섶에 살랑거린다. 꽃 이름을 불러 달라는 듯 구월의 느린 바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는체한다. 어느새 가을, 해마다 이맘때 펼쳐지는 들녘의 고적한 풍경이 내 산문에 가을의 첫 줄을 쓴다. 흰 구름과 바람과 누렇게 바래진 들풀들, 둔덕에 오롯이 피어있는 가을 들꽃이 나는 좋다. 아마도 어릴 적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부모님의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작은 행복 때문인가보다. 구월이 오면 검게 탄 얼굴로 신작로를 달리던 동무들 생각이 나고 깊은 산속으로 구절초를 뜯으러 다니시던 초췌한 어머니가 떠오른다. 헛간과 빈 외양간의 여물통 그리고 그늘진 뒤란에 촘촘히 펼쳐있던 우리 집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 시절 집 안 구석구석 널어놓은 떫은 약초 냄새가 아직..

좋은 수필 2022.09.30

모시적삼을 입은 여인/이병남

모시적삼을 입은 여인 이 병 남 중복 더위의 만원버스에는 모시적삼 차림의 20대 여인이 승객의 눈길을 끌었다. 화장기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과, 김장밭에서 갓 뽑아 올린 무 같은 목선이 태깔 고운 모시적삼의 풀기로 더욱 돋보이는 여인이다. 연속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 내리기에 바쁜 승객들도 힐끔힐끔 모시적삼의 여인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각기 치장하고 나선 여자 승객들은 눈길이 마주치는 민망스러움을 피하려는 듯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는 다시 또 보곤 한다. 한동안 화학섬유에 밀려 빛을 잃었던 자연섬유가 그 진가를 되찾으면서부터 거리에는 면이나 마, 혹은 모시옷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많아졌다. 버스가 정차하자 모시적삼의 여인은 총총히 보도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버스는 다시 무악재 고개를 넘어 독..

좋은 수필 2022.09.28

오래된 편지/강 문 희

오래된 편지/강 문 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낙동강의 갈대로 역은 자그마한 곽 뚜껑을 열었다. 곽 속에는 빛바랜 편지 한 통과 가락지 한 개 그리고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는 밀고 밀리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서 쓴 아버지의 편지였다. ‘포연으로 가득했던 산하에 가을을 알리는 들국화가 하나 둘 피기 시작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들국화가 피어있는 진지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쓴 편지였다. 자식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꼭 살아서 돌아가 당신을 한 번 껴안아 보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목이 메어 읽지를 못했다. 외롭고 쓸쓸한 날 얼마나 읽었으면 편지의 귀퉁이가 해어져 넘기는 부분에 몇 겹으로 스카치테이프를 붙여놓으셨다...

좋은 수필 2022.09.27

메주각시/박헌규

메주각시/박헌규 절집 마당이 술렁인다. 이른 아침의 고요는 잰걸음으로 뒷산 인봉재(嶺)를 넘고 콩 익는 냄새가 산중에 진동한다. 검은 무쇠 솥 뚜껑을 비집고 나온 허연 김이 온 부뚜막을 휘감고 돌아 나풀나풀 춤을 추며 뒤란 장독대 사이사이로 숨어든다. 자주 찾는 산사(山寺)에 메주 쑤기 울력이 있었다. 동짓달 짧은 해를 염두에 둔 듯 동살이 채 잡히기도 전에 울력꾼들이 동동걸음을 치면서 부산을 떨었다. 나는 볏짚을 가지런히 추발(抽拔)하여 깨끗이 다듬고 녹녹히 축여 ‘메주각시’를 틀었다. 미덥지 않아서일까? “각시가 예뻐야 장맛이 난다.”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어찌나 용을 썼던지 손가락이 아리고 물집까지 잡혔다. 메주각시를 트는 일은 지난해에도 했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

좋은 수필 2022.09.27

댕댕이덩굴꽃에 어리는 어머니 /이방주

댕댕이덩굴꽃에 어리는 어머니 아직은 추억을 더듬으며 살 나이는 아니다. 나는 이렇게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다. 그런데도 다른 이의 작품은 멀리하고 과거의 내 졸작에 취해 아련한 추억에 젖어 있는 때가 많다. 그뿐 아니라 꽃을 보면 미래를 그리워하지 못하고 이제는 보내드려야 할 어머니만 보인다. 들꽃을 보면 민중이 보이고 민중의 삶이 보이고 민중의 아픔을 보아야 하는데 어머니가 보인다. 아무리 부정해도 추억에 젖어 추억을 더듬으며 애상에 젖는 노년의 생리를 어쩔 수 없는 나이인가 보다. 떨쳐 버리자. 추억의 미로에서 뛰쳐나오자. 인제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어우러지는 양평 대명리조트에서 자고 조금 일찍 일어났다. 아직도 깨지 않은 친구들 옆에서 부스럭거리느니 리조트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좋은 수필 202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