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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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젓 항아리 / 장경미

추젓 항아리 / 장경미 입이 푼푼한 항아리에 가을빛이 흥건하다. 각진 소금에 살찐 새우등이 톡톡 터지는 소리가 오후 햇살을 튕긴다. 소금의 짠맛에 구부렸던 고집마저 내려놓았는가. 딱딱하고 날카롭던 껍질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색의 절정을 이루었다. 뽀얗게 우러난 빛깔이 곱기도 하다. 작은 몸에 담았던 바다가 풀어져야 맛의 결정체를 이루는 추젓. 구룡포 조용한 마을 한 자락에서 가을의 깊은 맛을 내던 추젓이다. 배릿한 바다 냄새 속에 꾹꾹 눌러 보내온 추젓을 풀자 고모의 눈물이 철철 흘러넘친다. 소금과 새우가 만들어놓은 뽀얀 국물 속에는 고모의 처절한 삶이 녹아있다. 쉬이 놓지 못하고 떠나보낼 수도 없는 바다가 담겼다. 가을 바다를 넉넉히 품은 추젓을 고종 동생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 숟가락 듬뿍 떠서 콩나..

좋은 수필 2022.08.19

사과와 벌레의 함수관계 / 노기정

사과와 벌레의 함수관계 / 노기정 꼼지락거리는 저, 물컹한 것 속에는 대체 어떤 집요함이 있어 출구가 없는 여기까지 온 걸까 벌레가 사과 한 알을 먹어 치우기 위해선 치열하게 세상을 녹일 기세로 덤벼야 한다 뭉텅한 입은 심장을 겨냥하고 느려터진 발은 시간을 정조준 해야 한다 조용히, 고양이 발자국보다 더 숨죽이며 조금씩 오랫동안 전진해야 한다 식탁위에서 사과는 속수무책 쪼그라들어 이리저리 구르며 애물단지가 된다 이번 생은 벌레를 안고 늙어가는 것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과도를 들이대다가 문득, 가슴 저린다 내 속에서 스멀대는 것들 한때 목숨처럼 나를 파먹던 기억이 헐렁해진 힘줄을 팽팽하게 당긴다

좋은 시 2022.08.18

동피랑, 나비 마을/심강우

동피랑, 나비 마을 심강우 동쪽 벼랑에 나비가 사는 마을이 있다 물감이 떨어질 날 없는 화가가 채집한 단색의 애환만 있어도 좋을 한갓진 풍경 방방곡곡 나비가 참 많기도 하지만 뱃고동으로 첫 페이지 넘기는 강구안 색색의 날개가 장식한 화보집이다 나비들의 문패는 한 해 걸러 바뀐다 드난살이 골목이래도 하늘은 자란다 은륜이 달리고 피아노건반이 춤추고 구름을 예약한 고래가 휘파람을 부는 그곳은 날마다 꽃술의 축제 기간이다 나비의 더듬이에 들킨 울음기 한산도 수루에서 물어 온 언약을 해거름녘 다도해에 묻어 두었다 바늘만 한 설움도 벼랑 꼭대기에 서면 붉게 번져오는 눈먼 사랑이 거기 있다 출항하는 소리에 맞춰 비행을 시작하는 나비 어쩌면 황홀한 저 빛깔은 나비의 해묵은 구애 꽃떨기처럼 섬에서 섬으로 호를 긋는 배들..

좋은 시 2022.08.18

거멀못 / 권현숙

거멀못 / 권현숙 마당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는 커다란 독 하나가 눈길을 붙든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상처투성이 몸을 볕살에 내맡긴 채 졸고 있다. 넓고 두툼한 입술 아래쪽에서부터 당산나무 허리춤 같은 배를 지나 발바닥까지 죽 이어진 거물 흔적이 돋을새김으로 뚜렷하다. 나무그릇이나 독에 금이 가서 깨질 염려가 있거나 갈라져버린 곳의 양쪽을 꽉 거머쥐어 원래의 모양대로 고정시켜주는 것을 '거멀'이라 한다. 봉합수술시 의료용 찍개처럼 물건과 물건 사이 버성긴 부분을 원래의 모양대로 단단히 붙잡아 고정시켜주는 것을 이른다. ㄱ자나 ㄷ자로 양 끝을 구부려 만든 머리가 없는 거멀못은 박힌 모양새 때문인지, 찰싹 달라붙어 거머쥐는 힘 때문인지는 몰라도 별칭이 찰거머리로 불린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금이 ..

좋은 수필 2022.08.18

자객/권현숙

자객 / 권현숙 삼월 초입이라 바람 끝이 차다. 겨우내 햇살 못 본 허여멀건 한 내 목덜미에 때 아니게 붉은 꽃 한 송이 맺혔다. 홍매 꽃망울만 하던 것이 순식간에 명자꽃송이만큼 확 부풀어 오른다. 꽃 핀 자리가 불침이라도 맞은 듯 뜨끔거린다. 엉겁결에 당했다. 본능적으로 손이 목덜미께로 향한다. 뜨끔거리는 곳을 찾아 엄지와 검지로 꽉 꼬집어 짜니 개미 눈알만 한 침 하나가 딸려 나온다. 그 순간 가슴 언저리가 스멀거린다. 화들짝 놀라 신들린 무당처럼 풀쩍댄다. 윗도리를 마구 털어대자 꿀벌 한 마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잠시 내 발 옆에서 비칠대더니 곧 생이 끝날 걸 아는지 모르는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난다. 행여 성질 급한 꽃이라도 만날까 싶어 들성지로 향했다. 사방을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꽃이라고는 ..

좋은 수필 2022.08.16

여름에 대한 시

남녁의 여름 헤르만 헤세 마로니에 꽃 저녁의 숲 잎 속에는 반달, 숲 속에는 우리 조용한 술꾼들- 밤의 미풍 속에서 우리의 술잔이 울린다 어두운 하늘로 우리의 술이 이글이글 탄다 우리 덧없는 꽃들이 여름 내내 작열한다 나를 마셔라, 사랑아! 아리따운 이여, 그대를 마시게 하라! 우리의 뜨거운 여름 햇불들로 우리는 연인들에게 여름밤의 노래를 부르라 신호한다 오 올빼미 울음, 오 어두운 밤의 심장 환한 협죽도 속 밤나방 너 우리는 작열한다 타들어 간다 형제여 서로의 속으로 신에 바쳐진 축복 받은 제물이다 울려라 삶의 노래여 죽음의 노래여 술잔이 울린다 우리의 시작이 활활 타오른다! 늦여름 임동윤 하룻밤, 구두끈 풀고 쉬어가라고 목쉰 대청마루가 흔들한들 붙잡아댔다 등고선마저 지워진 무늬의 바닥 겹겹의 세월을 ..

좋은 시 2022.08.04

오래된 집/김만년

오래 된 집 김만년 sanha3000@hanmail.net 가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을 들어서자 아버지는 도리깨질이 한창이다. 어여차, 휘모리장단으로 타작마당을 내리친다. 앞산 뒷산을 쩌렁쩌렁 울린다. 토실한 올콩들이 사방으로 콩콩 튄다. 작은 솟을대문을 열자 오래된 종마루와 쌀뒤주가 보인다. 늙은 쥐들이 뒤란으로 달아난다. 천장엔 세월의 더께에 그을린 묵은 홍어가 매달려있다. 아버지의 바람기를 막으려는 어머니의 주술이 통했을까? 아니라는 듯 홍어가 바람에 꼬리를 살랑댄다. 가마솥엔 보리밥 한 그릇이 따끈하게 데워져있다. 부뚜막에 앉아서 허기를 채우고 어머니 옆에 가만히 눕는다. 얼마만일까. 어머니의 숨소리가 꿈결처럼 아늑하다. 꿈일까? 봉창에 비친 달빛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왔다. 지붕을 타..

좋은 수필 2022.08.04

돌확 / 유강희

돌확 / 유강희 자식 일곱 뽑아낸 이제는 폐문이 되어버린 우리 어머니의 늙은 자궁 같은 오래된 돌확이 마당에 있네 귀퉁이가 떨어져나가고 이끼가 낀 돌확은 주름 같은 그늘을 또아리처럼 감고 있네 황학동 시장이나 고풍한 집 정원에는 제법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받아먹으며 뿌리를 내릴 생각도 않네 뿌리 대신 앉은 자리엔 쥐며느리들만 오글오글 세월처럼 모여 사네 하지만 지금 돌확 속엔 내가 싸릿재 저수지에서 잡아온 새끼 우렁 하나 돌젖을 빨아먹으며 자라고 있네 돌젖에 눈물처럼 금이 가 있네

좋은 시 2022.08.02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박해람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박해람 마당은 녹슨 철조망에 갇혀 있고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는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의 넓이이고 천적의 식성으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허송세월이라면 마당만 한 곳이 없겠으나 개의 등에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 작약 꽃과 엉겅퀴, 개나리는 형량이 정해진 꽃. 개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겠지만 끈, 끈은 봄엔 초록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가을엔 누렇게 마른다 막론하고 개는 줄기식물과에 가깝다 저녁을 먹고 난 개의 배같이 둥그런 마당, 대문 하나가 오래 열리지 않았을 뿐인데 천적들과 훼방들이 무성하다 개가 몸을 털어낼 때마다 개나리와 살구꽃이 떨어졌다 겨울, 누렇게 털이 말라죽은 개를 본 적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개는 틈으로 번져나간다 세상의 풀씨들이란 개의 털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이 집에 살..

좋은 시 2022.08.02

이삭꽃 / 허문정

이삭꽃 / 허문정 연세가 많으신 분의 등을 밀어 드렸다. 흘깃 가슴팍을 보니 돌보지 않은 무덤처럼 젖가슴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건포도 같은 젖꼭지는 생의 꼬투리인 양 맺혀 있다. 긴 여정의 마침표 같기도 하고 욕망의 마지막 징표로도 보였다. 고개 숙인 이삭 같은 모습에서 순간 꽃의 의미가 다가왔다. 이게 바로‘이삭 꽃*’이구나! 잘 영근 이삭은 생의 마무리이자 눈부신 완성이다. 그 자체로 풍요이며 만족이다. 완숙한 몸이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며, 새봄에 싹을 틔울 희망의 기다림이다. 하지만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여인네의 젖꼭지는 완숙의 느낌을 넘어 처연함으로 다가온다. 떨어져 거름이 되기 위한 무표정한 순종, 그 비움이 쓸쓸하게 느껴져 삼천 년에 한 번씩 핀다는 우담바라처럼 고귀한 꽃의 이름을 붙여주고..

좋은 수필 2022.08.01

딸아이의 짐을 싸며 / 배종팔

딸아이 짐을 싸며 / 배종팔 새끼 부엉이가 쭈뼛쭈뼛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가까스로 둥지를 빠져나왔지만 아직 밖의 어둠에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둥지 안에서 본 세상과는 달리 나뭇가지에서 보는 세상은 낯설고 두렵다. 어미 부엉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만 본다. 하지만 속은 새끼보다 더 불안하고 애가 탄다. 독립, 그것은 어미가 새끼에게 짐 지우는 삶의 첫 임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제법 커진 몸뚱이, 그런데도 새끼 부엉이는 상수리나무를 세상의 전부로 아는지 이쪽저쪽 가지 사이로 폴짝대기만 한다. 들쥐의 쫄깃한 뱃살이나 통실한 개구리 다리 살을 빈 부리 속으로 넣어 주던 일도 줄이고, 어미 부엉이는 새끼의 어설픈 독립의 몸짓을 가슴으로 지켜본다. 며칠 후, 어미 부엉이는 홀연히 떠났다. 모진 비바람과 천적의..

좋은 수필 2022.07.31

陽洞詩篇 2―뼉다귀집/ 김신용

민달팽이 ​ ​ 김신용 ​ ​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좋은 시 2022.07.30

폐가 앞에서/김신용

폐가 앞에서 김신용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苦行像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나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 던져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

좋은 시 2022.07.30

상처 난 것들의 향기/조호진

- 조호진 빛나고 반듯한 것들은 모두 팔려가고 상처 난 것들만 남아 뒹구는 파장 난 시장 귀퉁이 과일 좌판 못다 판 것들 한 움큼 쌓아놓고 짓물러진 과일처럼 웅크린 노점상 잔업에 지쳐 늦은 밤차 타고 귀가하다 추위에 지친 늙은 노점상을 만났네. 상한 것들이 상한 것들을 만나면 정겹기도 하고 속이 상하는 것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떨이로 몽땅 가져가시오!" 떨이로 한 움큼 싸준 과일들 남 같지 않은 것들 안고 돌아와 짓물러져 상한 몸 도려내니 과즙 흘리며 흩뿌리는 진한 향기 꼭 내 같아서 식구들 같아서 한 입 베어 물다 울컥거렸네. ​ - 조호진 목숨보다 더 뜨거울 것처럼 길길이 뛰다 비루먹은 개처럼 꽁무니 빼는 詩 원숭이 똥구멍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詩 비겁과 거짓으로 뻔뻔해진 詩 도마에 올려 진 ..

좋은 시 2022.07.30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 ​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니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

좋은 시 2022.07.30

저녁길/김신용

저녁길 김신용 그들의 함성에 중장비의 엔진은 호흡을 멈추었다. 현장 본부 앞마당에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답답한 가슴을 치듯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노동해방가를 부를 때, 파헤쳐진 공사장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이 땅의 곳곳에서 또 하루의 품을 팔기 위해 모여든 일용 인부들 그들의 힘찬 구호의 외침에 눈물마저 글썽였다. 이 하루, 공쳐도 좋았다. 그 수많은 나날 무릎 꺾여 살아온 노동의 하루쯤 무너져도 좋았다. (……) 그들의 몸부림에 손톱 하나 보탤 수 없는 우리는 들풀처럼 부끄러웠다. XX토건, 노란 회사 마크가 새겨진 그들의 곤색 잠바 유니폼은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윽고 며칠간의 파업은 끝났다. 그들의 고정급은 올랐고, 시간차 수당도 받게 되었다. 모든 중장비의 심..

좋은 시 2022.07.30

환상통 幻想痛 /김신용 (1945~)

환상통 幻想痛 /김신용 (1945~)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나오는 그 한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

좋은 시 2022.07.30

아버지의 이/강경호

아버지의 이 뿌리 드러낸 고목처럼 하나 남은 아버지의 이, 우리 가족이 씹지 못할 것 씹어주고 호두알처럼 딱딱한 생 씹어 삼키기도 했던 썩은이 하나가 아직도 씹을 무엇이 있는지 정신을 놓아버린 채 든 잠속에서도 쓸쓸하게 버티고 있는가 (이빠진 아버지 초라한 모습에서 시인은 아버지들의 고단한 세상을 들여다 보며 아버지의 육체는 언제나 슬픔이라고 아버지들의 필생의 삶이 덜렁히 마지막 남은 대문 이 하나에 외롭고 쓸쓸히도 높게 남아 있다)

좋은 시 2022.07.30

넝쿨의 힘 / 김신용

넝쿨의 힘 / 김신용 집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비계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좋은 시 2022.07.30

멸치/이윤경

멸치/이윤경 택배로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곱게 쌓인 보자기를 풀었다. 나무로 된 상자 속에는 얌전하게 한지를 깔고 은빛 멸치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묵직하고 반듯한 나무상자 속에서 멸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앙다물고 누워있다. 흠 없고 온전한 은빛 비늘 사이로 물을 튕기며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멸치들은 나무 상자 속에서 줄까지 가지런히 참하게 서있다.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바짝 긴장된 자세를 취한 멸치 떼가 내뿜는 은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바다에서 식탁까지 파란의 먼 길을 헤엄쳐온 놈들 치고는 지나치게 꼿꼿하고 흠집 하나 없이 말끔하다. 이놈들은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저리 온전하게 제 몸을 건사한 걸 보면. 그물에 걸려서 빠져나가려고 할수록 서로를 옥죄고 그..

좋은 수필 2022.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