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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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장갑/송종태

고무장갑/송종태 인연이란 무엇인가. 살다가 정이 들면 인연이라 하는가. 숙명처럼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 부르는가. 덩그러니 홀로 나동그라진 세상에서 새 친구를 만났다. 때론 아내 같고, 때론 스승 같은 진솔한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은 위안이요. 감치는 행복이다. 새 친구를 통하여 마음을 도스르고 겉치레뿐이던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 친구인 고무장갑을 끼고 나면 더럽다는 고정관념이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복싱 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사각의 링에 선 모습처럼 당당하였고,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음식물을 토해 놓은 지저분한 상황에도, 묽은 변이 변기 밖으로 너저분하게 얼룩져 냄새를 풍겨도, 공무장갑만 끼면 만사형통이다. 두려움도, 더러움도 모두가 해결된다. 그럴 때마다, 고무장갑에게 감사의 마음이 ..

좋은 수필 2022.06.05

그을음/임병식

그을음/임병식 흙투성이 옷을 입은 채 마루에 누운다. 집안에 배어 있는 오래된 냄새에 섞여 부드러운 촉감이 등줄기로 스며든다. 마당은 후끈 달아오른 햇살이 넘실대고 마루 위는 시원한 바람이 앉아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듯하다. 마루는 가슴을 열어 놓고 주말에만 오는 발길을 기다린 듯, 들에서 일하느라 늘어진 몸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천장에는 서까래가 투박한 몸짓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은 친정 집은 반백 년이 훨씬 지났다. 서까래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지문이 그을음 속에 묻혔다. 하얗게 칠했던 회벽도 시간의 더께가 묻어서 검게 변했다. 처마 밑, 기둥, 창호지를 바른 문살, 집안 곳곳에 그을음이 진득하게 앉아 있다..

좋은 수필 2022.06.05

갯벌/전해미

갯벌/전해미 신선한 공기가 나의 폐부 깊숙이 들어와 요동을 친다. 요양 차 고향에 내려서니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꼬막으로 유명한 벌교라는 작은 읍이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청정지역이라 펄 속에 사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천혜의 땅, 지명보다는 꼬막이라는 생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벌교는 포근한 안식처로 나의 유년시절의 그리움이 탱글탱글 영글어 있는 곳이다. 비릿하고 찐한 갯내음이 바닷바람에 실려 온 몸을 휘감는다. 고향 냄새이자 엄마의 포근한 품 속 냄새이다. 드넓은 펄 밭이 펼쳐지는 곳에 갯가를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난다. 펄 밭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갈대가 양 옆으로 줄지어 우거져 있다. 젖가슴과 같은 보드라운 진흙의 손맛은 갈대의 정화작용 속에 살아 숨 쉬는 바다가 된다. 조석으로 들고나는 ..

좋은 수필 2022.06.05

호미의 낮잠/박순태

호미의 낮잠/박순태 마을 곳곳에서 낯익은 풍경이 걸음을 세운다. 텃밭 옥수수는 수정되는 시기에 맞춰 대궁이마다 뿌연 애향(愛香)이 풍긴다. 감자 씨알은 나날이 굵어가면서 주변 흙을 불룩하게 부풀어 올린다. 울도 담도 없다던 울바자를 따라 양대 콩은 벼름벼름 깍지를 뚫고나올 기세다. 모두 부풀고 일어나고 기를 세운다. 초여름 주말 오후가 조용히 기지개를 켜는 시골 풍경이다. 아내와 시골집을 들르는 길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온해진다. 고향을 찾아오는 길은 아무리 익숙하여도 매번 오관과 육감을 새롭게 살려낸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변환이 머릿속이 아니라 나이 든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다. 고샅을 돌았다. 점심을 두둑하게 먹었건만 갑자기 허기가 진다. 구수한 냄새를 피워 올리던 소죽솥..

좋은 수필 2022.06.05

마당도배/박노욱

마당도배 / 박노욱 귀찮기만 했던 마당을 도배하던 일이 그립다.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럴까. ​ 마른 마당은 늘 평온하다. 비가 내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며칠을 마다하지 않는 비나 모다깃비가 쏟아지면 진흙탕이 된다. 비온 후 울퉁불퉁해진 마당을 삽이나 널빤지로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마당도배라고 불렀다. 옛날 마당은 요즘의 아파트 주차장보다는 우리 가족만의 공간인 거실과 더 가까웠다. 거실을 도배하듯 마당도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 갖가지 이유로 마당은 곰보가 된다. 아이들의 발자국은 나무랄 수 없다. 들일하고 돌아온 삼촌의 리어카 바퀴자국도 어쩔 수 없다. 수탉이 광기를 부린 자리와 강아지나 고양이 발자국까지도 봐 줄 수 있다. 막걸리에 건들 취하신 아버지가 남긴 갈지자 흔적은 마음이..

좋은 수필 2022.06.02

시골집 마루/마경덕

시골집 마루 ​ 마경덕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구시렁구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

좋은 수필 2022.06.01

막돌도 집이 있다/홍신선

막돌도 집이 있다 홍신선 주워 모은 잡석들로 터앝 배수로 돌담을 쌓는다. 막 생긴 놈일수록 이 틈새 저 틈새에 맞춰본다. 이렇게 저렇게지만 뜻 없이 나뒹굴던 돌멩이가 틈새를 제집인 듯 척척 개인으로 들어가 앉는 순간이 있다. 존재하는 것치고 쓸모없는 건 없다는 거지 그렇게 한번 자리 찾아 앉은 놈은 제 자리에서 요지부동 끄덕도 않는다. 사람도 누구나 어디인가 제 있을 자리에 가 박혀 오 돌담처럼 견고한 70억 이 세상을 이룬다

좋은 시 2022.06.01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좋은 시 2022.06.01

2층 다락방/권경자

2층 다락방/권경자 가 닿을 곳 없는 구름덩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갔다 들판 위를 휘돌던 바람이 문을 두드리다 돌아갔다 투명한 달빛이 밤이면 창에서 한참씩 쉬어갔다 언니의 첫사랑을 몰래 읽었다 국어선생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공부보다 무언가 생각하는 일이 더 좋았다 일기장엔 혼자만 알 수 있는 기호가 늘어갔다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자꾸 쌓여갔다 하늘과 가까운 2층 다락방 엄마가 부르면 달빛에 얼굴을 묻고 잠든 척하였다

좋은 시 2022.06.01

관계 혹은 사랑/이재무

관계 혹은 사랑/이재무 못 박는다 벽은 한사코, 들어오는 막무가네의 순애보 밀어내고 튕겨낸다 그러나 망치 잡은 두툼한 손의 고집 벽은 끝내 막을 수 없다 일자무식하게 꽝꽝 박을 때마다 진저리치는 벽, 아주 인색하게 몸 열어 관계 받아들인다 단단한 살 헤집어 가까스로 뿌리내린 자의 저 단호하고 득의에 찬 표정을 보아라 벽은 못 품고 살아간다 들어올 때 아퍼서 울던 울음 뒤 생긴 상처 아물면서 못은 비로서 벽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게 된것이다 아주 먼 후날 못은 벽 떠날 날 올지 모른다 그날의 벽은 이제 제 안에 깊숙히 박힌 사랑 내주지 않으려 끙끙 앓으며 또 한 번 검붉은 녹물의 설음 찔찔 짜낼 것이다

좋은 시 2022.06.01

이월의 우포늪 / 박재희

이월의 우포늪 / 박재희 우포늪은 보이는 것만의 늪이 아니다 어둠 저 밑바닥 시간의 지층을 거슬러 내려가면 중생대 공룡의 고향이 있다 원시의 활활 타오르던 박동이 시린 발끝에 닿기까지 일억 사천 만년 무수한 공룡발자국이 쿵쿵 가슴으로 밀쳐 들어온다 억겁을 버틴 가슴 벅찬 것들 나는 어느 백악기의 밀림을 걷고 있는 것일까 화석 속에 갇혔던 공룡이 어둠의 사슬을 풀면 왕버들 숲 어디쯤 나도 먼 중생대를 꿈꾸는 한 마리 공룡일까 감았던 눈을 뜨며 한 순간 전율했던 백악기를 빠져 나오자 물 속에 녹은 풀의 뼈마디와 각시붕어의 비린 향기가 물살 간질이며 깨어나고 있었다 늪, 어딘가에 있을 세월의 우체국 그 우체국에 부칠 사연을 이월의 찬바람이 쓰고 있는가 오랜 역사의 능선에 한점 불 밝히는 빙하기에 잠긴 공룡발자..

좋은 시 2022.05.31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출처]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2022.05.31

따라쟁이 / 김영관

따라쟁이 / 김영관 친구들의 모임에서였다. 한 친구가 얼마 전부터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는데, 음식을 먹을 때 입가에 묻히거나 흘리는 일이 잦아 가족들의 시선을 받는 모습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도 슬슬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옆에서 듣던 나는 그가 내 말을 하는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엊그제였다. 손주들이 와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자 아내는 따지듯 말했다. 당신 입은 감각이 없어요. 순간 멍해하는 나에게 집사람은 강펀치를 날렸다. “식탁에서 애들이 자꾸 당신 얼굴을 살피는 걸 못 느꼈어요.” 그러고 보니 내 옆에 앉은 큰 손녀가 두어 차례 휴지를 건네며 입을 닦으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요즈음 들어 밥을 먹다 음식을 잘 흘리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다 놓아다를 반..

좋은 수필 2022.05.31

전등불/김영관

전등불/김영관 두메산골에 미수의 어머니가 홀로 기거하고 계셨다.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어머니 집에 전화가 되지 않았다. 전화국에 문의했다. 어머니가 사는 동네에 통신선이 끊어져 복구 중이라 했다. 나는 대구에서 반찬 몇 가지를 챙겨 경주 산내로 향했다. 보름 만이었다. 운문댐을 끼고 돌아가는 길모퉁이 군데군데 빙판길이었다. 마음이 조급한 나에게는 위험하고 먼 길이었다. “어머니!” 삽짝을 들어서며 큰 소리로 불렀다. 기척이 없었다. 마당이며 마루며 켜진 전등불만 나를 반겼다. 방문 문고리를 당겼다. 널브러져 있는 이불이 한방 가득이었다. 작은 봉창엔 비닐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보온이 부실한 산골의 슬레이트집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가슴이 싸해졌다. 전기료깨나 나오겠다..

좋은 수필 2022.05.30

비아그라 두알/민혜

비아그라 두알/민혜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알 약 두 개를 발견했다. 그 약은 남편의 옷장 서랍 속에 숨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그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상자 속의 또 다른 아주 작은 상자 안에 은밀히 감춰져 있었다. 우리 집 약들은 모두 거실 서랍장 안에 있었기에 나는 약에 쓰인 글씨를 자세히 들어다 보았다. 그 유명한 비아그라였다. 순간, 남편을 향한 울컥함이 잠시 비틀대며 뒷걸음질 쳤다. 야릇했다. 이렇듯 청초하고도 평온한 푸른빛의 약이 비아그라였다니. 사춘기 소년의 서랍 속에서 나온 포로노 잡지를 본 엄마의 느낌이랄까, 아니, 처음엔 그저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남편은 두 달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위암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중 갑작히 의식불명이 되어 인공호흡기를 매달고 20..

좋은 수필 2022.05.30

대장간의 유혹/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좋은 시 2022.05.29

까마귀/이수현

까마귀/이수현 물이 펄펄 끓는다. 그저 멍하니 주전자를 바라본다. 부글부글하던 주전자는 이내 뚜껑을 들썩인다. 불은 노랗게, 파랗게, 빨갛게 시시때때로 변하며 물이 다 끓었음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다 나는 힘없이 보리차 티백 하나를 주전자에 넣었다. 터덜터덜 소파로 가 앉은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영채가 태어난 뒤로는 한 시도 고요할 틈이 없던 우리 집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독이 소름 끼치도록 밉다. 눈이 제 아빠를 닮아 서글서글하고, 눈동자는 나를 닮아 투명한 갈색을 띤 애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였다. 금방이라도 그 애가 엄마 하며 뛰어올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난 영채를 보낸 날에도 눈물이 ..

좋은 수필 2022.05.27

도리깨(耞) / 윤남석​

도리깨(耞) / 윤남석 ​ ​ ​ “위잉 탁, 위잉 탁” 세 가닥의 휘추리가 공중제비를 넘더니 콩더미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잔뜩 움츠린 깍지속의 콩알이 메어칠 때마다 바들거리며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무자비한 휘추리의 두들김에 견디다 못해 타닥거리며 튕겨져 나온다. 도리깨질은 엇박자로 쳐야만 상대방이 내치는 휘추리와 맞닥뜨리지 않는다. 서로 호흡을 맞춰 상대방이 이미 두들긴 곳을 한 번 더 두들겨서 겉여문 콩깍지까지 터지게 한다. 그렇게 상대방이 진행하는 방향을 쫓아 어긋나게 두들기면서 타작마당을 자근자근 돌게 된다. 그 엇박자로 두들겨야 하는 도리깨질을 반 박자씩 애써 늦춰본다.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하시는 도리깨질이 자칫하면 내 도리깨와 맞부딪칠 수 있기에 속도를 조금 늦추며 리듬을 조절한다. 예전..

좋은 수필 2022.05.27

빈 의자/나희덕

빈 의자 나희덕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좋은 시 2022.05.25

닮음에 대한 아이러니/박영란

닮음에 대한 아이러니/박영란 '꼭 너 닮은 딸 하나 낳아 키우라는 말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어느 수필의 한 대목이다. 딸을 타지로 시집보내고 매번 서울역에서 울었던 어머니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돌아서 가는 딸의 매정함이 서운했다. 그래서 던진 말이다. 엄마의 애틋해하는 이별에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으련만.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이 담에 꼭 너 닮은 자식 낳아 키워봐라" 하는 어머니의 목멘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자란 자식이 있을까. 큰 잘못도 아닌 일에, 사소한 일상에서 문득 원망과 한숨이 섞인 이런 푸념이 직격탄처럼 날아오지 않았는가. 자식들은 대개 이 뜨악한 소리에 뭔가 찔끔하기도 하지만, 내심 '내가 왜?' '내가 어때서' 하는 작은 저항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

좋은 수필 2022.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