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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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 / 이성복

나무 이야기 / 이성복 수주일 전 아내와 동네 뒷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내려오는 길에,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밑둥치에 녹슨 쇠못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현수막 같은 것을 걸만큼 높은 위치도 아니었는데, 거기 왜 그렇게 많은 쇠못이 박혀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손으로 그 못들을 잡아 돌려도 꿈쩍도 않아, 길 옆 돌 부스러기를 집어 못과 못 사이에 넣고 이리저리 돌려보니, 그 가운데 몇 개는 빠져 나왔다. 남은 대 여섯 개의 녹슨 못은 나중에 장도리를 가져와 뽑아 줘야지 하고는,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그 약속이 되살아난다. 또 어느 해 가을인가는 묘사를 지내러 고향 선산에 올랐다가 녹슨 철사줄로 칭칭 동여맨 소나무 몇 그루를 보았는데, 비록 야산이기는 했지만 꽤 깊은 산중에 누가 무슨 ..

좋은 수필 2022.07.09

다듬이질/이진영

다듬이질 이진영 베란다 한 쪽켠에 다듬잇돌이 먼지를 듬뿍 안고 있다. 올려져 있던 화분마저 실내로 들여놓았으니 빈 몸으로 겨울을 난 것이다. 왠지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정한 물을 떠다가 닦아주었다. 증조할머니 새색시 적에 좋은 돌을 골라 석수(石手)에게 부탁하여 특별이 맞춰온 다듬잇돌이란다. 대청 한 켠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안방마님 못지않게 당당했던 자태가 눈에 선한데, 톡톡하게 세간구실을 하던 과거의 영광은 이젠 혼방섬유나 스팀다리미의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수십 년 모진 매를 맞았음에도, 이제는 화분받침대 역할에 만족해야하는 수모에도 어느 한 구석 깨지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나마 할머니의 유품이기에 아파트 베란다 한 켠에..

좋은 수필 2022.07.05

종/윤명수

종 / 윤명수 하늘에 목을 매고 맞는다 속을 텅 비운 채 맞는다 영문도 모르고 맞는다 맞는 줄도 모르고 맞는다 살가죽이 벗겨지도록 맞는다 아픈 곳만 계속 맞는다 상처 위에 상처가 쌓이도록 맞는다 맞아야 할 때 맞지 않으면 불안하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불안하다 맞으면 맞을수록 청아해지고 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세상은 가벼워진다 기꺼이 매를 맞는다 죽도록 매를 맞는다 웃으면서 맞는다 ********************** 퇴근길에 유난히도 내 그림자가 흐느적이는 날, 솜뭉치 같은 몸이 그래도 가벼운 것은 나로 인해 쑥쑥 커가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종,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 땅의 가장들의 애환을 위로해 준다. 왠지 음미할수록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힘이 불끈 난다. 자칫 자학적으로 보일지..

좋은 시 2022.07.04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나희덕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나희덕 지금도 고향, 하면 탱자의 시큼한 맛, 탱자처럼 노랗게 된 손바닥, 오래 남아 있던 탱자 냄새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뾰족한 탱자 가시에 침을 발라 손바닥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생각이 난다. 가시를 붙인 손으로 악수하자고 해서 친구를 놀려 주던 놀이가 우리들 사이에 한창인 때도 있었다. 자그마한 소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탱자 가시에 찔리곤 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한번은 가시 박힌 자리가 성이 나 손이 퉁퉁 부었던 적이 있다.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 탱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찔레꽃, 장미꽃, 아카시아…… 가시를 가진 꽃이나 나무들을 차례로 꼽아 보았다. 그..

좋은 수필 2022.07.02

꽃살문/이정록

꽃살문/이정록 꽃에는 정작 방년(芳年)이란 말이 없다네 그래, 천년만년 꽃다운 얼굴 보여주겠다고 누군가 칼과 붓으로 나를 피워놓았네만 그 붓끝 떨림이며 칼자국, 바람에 다 삭혀내야 꽃잎에 나이테 서려 무는 방년 아니겠나 꽃이란 게, 향과 꿀을 퍼내는 출문이자 열매로 가는 입문이라 나도 고개 돌려 법당 마루에 오체투지하고 싶네만 마른 주둥이 훔치는 햇살 천년 바람 천년, 법당 마당의 싸리비질 자국만 돋을 새김하고 있네 그렇다네, 이 문짝에 염화(拈華) 없다면 어찌 어둔 법당에 미소(微笑) 있겠는가? 풍경소리며 목탁소리에도 나이테가 있는 법, 날 쓰다듬고 가는 저 달빛 구름 그림자처럼 씨앗 쪽으로 잘 바래어 가시게나

좋은 시 2022.07.01

양푼 예찬 / 이은희

양푼 예찬 / 이은희 가스 불에 찻물을 올립니다. 그의 온몸은 금세 열로 펄펄 끓어 오릅니다. 주위에서 무어라 저지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파란 불빛 하나에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떱니다. 파편이 여기저기에 투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붉은 깃발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성난 투우 같습니다. 머지않아 파란 불 빛과 함께 싸늘히 식어갈 체온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직한 바보인가 봅니다. 그런 그의 무모한 열정이 꼭 나를 닮은 듯하여 이따금 두려워집니다. 그의 집엔 늘 손님으로 북적거립니다. 차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그를 찾아 빠르게 찾아 나섭니다. 국그릇 두 배 크기, 겉과 속은 한 가지 빛깔인 황금색입니다. 그러나 연륜은 못 속이나 봅니다. 가장 평평한 자리인 배가 얼룩덜룩 검..

좋은 수필 2022.06.16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 권남희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 권남희 무는 잘 보관해야 한다. 신문지에 꼭 싸서 두어도, 비닐 랩으로 싼 후 냉장고에 갈무리해 두어도 일주일 이상 지난 뒤 잘라 보면 바람이 들거나 물러 있다. 무는 양상추나 샐러리 등 비싼 야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요리를 할 때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다. 국물이나 매운탕을 시원하게 맛낼 때나 생선 찜, 갈비찜, 설렁탕에 곁들여 먹는 큼직한 깍두기, 갈비집에서 빼놓지 않고 내놓는 무채, 초절임 무쌈, 포기김치 담글 때 켜켜이 박는 무채 등 갖가지로 변신한다. 대충 보관해 두었다가 괜찮겠거니 하며 요긴하게 쓸려고 꺼내 보면 겉모습은 틀림없는 무인데 속은 구멍이 숭숭 뚫려 솜방망이가 되어 있다. 꼭 무로 요리를 해야 제 맛이 나는 경우에 무는 그렇게 망가져 있다. ..

좋은 수필 2022.06.16

비린比鄰구멍 / 허숙영

비린比鄰구멍 / 허숙영 도시의 뒷골목을 걷는다. 누군가 마주치면 몸을 옆으로 돌려 게처럼 걸어야 할 것 같은 이 길이 낯설지 않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접든지 높이를 달리해야 비켜갈 수 있다. 퀴퀴한 하수구 냄새 진동하는 골목에는 허드렛물이 홈통을 타고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일도 예사다. 조무래기들이 흘린 '자유시간'이란 과자 봉지는 뜯겨 자유는 하수구를 따라 흘러가 버리고 시간이란 글자만 뎅그러니 맨홀 뚜껑에 걸려 있다. 이 골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일 테니까. 하루 종일 해도 들지 않고 낮고 음습한 지대, 부엌 하나 방 하나가 대부분인 이곳에는 질병에 익숙해진 노인들이 참으며 살아간다. 대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

좋은 수필 2022.06.16

황혼 / 설소천

황혼 / 설소천 석양이 창가에 머물러 있다. 저토록 가슴 설레게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따라 왜 이다지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내 눈에만 그럴까. 말없이 저무는 것에 대한 고통을 잠시 엿보았던 때문일까. 구순이 까까운 사람 중에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가게 오랜 단골인 이천댁과 섭이 할매는 그렇다. 내가 처음 가게를 시작한 때부터 두 분을 알고 지냈으니 수십 년 세월만큼 안면이 두텁다. 이웃에게 듣기로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우리 동네로 시집왔다고 한다. 평생을 제 자리에서 동네를 지켰으니 마을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천댁은 누가 봐도 복 많은 사람이다. 부잣집 맏며느리에 살림은 풍족했고 자식들은 건강했다. 잘 자란 자식들이 공부도 잘해 남들은 삼수, 사수해도 ..

좋은 수필 2022.06.13

신발 / 이복희

신발 / 이복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사진 한 장. 다리 난간 안쪽에 놓여있는 신발 두 켤레에 눈이 시리다. 한강에 투신한 부부의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존재했었다는 마지막 증표였을까. 아니면 삶의 미련을 내려놓듯 벗어버린 것일까. 그것을 보며 굳이 속내를 짐작해 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신발에서 느껴지는 결연함은 눈물겹고 쓸쓸하다. 그러나 또 한편, 그 광경은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 마치 바깥나들이를 마치고 흔연하게 벗어놓은 것처럼. 신발을 벗는 일은 그저 일상인 줄 알았다. 저렇게 삶의 마침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삶을 내던지며 남겨놓고 떠난 신발이 어떤 이에게는 생의 애착과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내 신발이 없어” 병고에 갇혀 일상을..

좋은 수필 2022.06.10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허석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허석 ​ 푸르스름한 동살이 담장을 넘어서나 보다. 아랫목 군불 열기가 아직 후끈거리는데도 창호지 너머로 벌써 마당 쓰는 소리 들려온다. “싸르륵 싸르륵” 새벽 강가에 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 햇살 알갱이거나 싸락눈 굴러가는 댓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싸리 비질 소리가 곧 여명이고 천명의 시간이 된다. 희붐한 빛줄기가 들자 마당의 민낯이 보자기처럼 펼쳐진다. 그 새벽의 마당은 언제나 집안 가장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외삼촌이, 고모부가 그 자리에 동바리처럼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힘에 부치면 아버지가, 그리고 또 그 아들이 장대비를 넘겨받았다. 장독대와 작은 텃밭이 있던 뒤란이 어머니의 공간이라면 대문을 향한 앞마당은 아버지들의 ‘터’이자 ‘품’이었던 셈이다. 이른 아침에 마당을 ..

좋은 수필 2022.06.08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지난 계절 된통 앓았다. 질주하는 감정에 집중하느라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어쩌면 회복탄력성에 기댔는지 모른다. 야근으로 날밤을 새우고도, 몸은 때꾼해진 눈빛으로 뚝배기처럼 말없이 움직이지 않았던가.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은 애먼 몸에 무게를 부렸다. 속앓이로 심란할 적엔 허벅지가 무지근해지도록 트랙을 돌았다. 걱정이라는 훼방꾼이 넉장거리로 누워 발목을 잡을 때는 심장이 쿵쾅거릴 때까지 내달렸다. 우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기 위해 근육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갉아먹는 온갖 것들에게 먹잇감이 되어주는 몸인데, 고약하게 굴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속을 굶기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프고 억울해서 눈물이 솟구치면 참으라고 성..

발표작 2022.06.08

부엌궁둥이/강돈묵

부엌궁둥이/강돈묵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유년이 고향 집에 가 있다. 산골짜기의 눈을 끌어안고 내려온 바람이 텃논 가운데의 짚가리에서 한바탕 상모를 돌린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오락가락 몰아치는 눈발. 바람의 궤적이다. 깃털을 헤집고 달려드는 바람을 밀치며, 짚뭇에 앉아 나락을 찾는 산새들이 신이 났다. 그들이 한참 놀다 간 후 차분히 볕이 내려앉는다. 해가 중천을 지났지만 바람이 역시 차다. 태어나면서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여러 형제 중에서 엄마의 속을 가장 썩였던 자식이었다. 자주 골을 부렸고,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물론 한 고집했던 기억도 난다. 한편 부지런하여 가만히 쉬는 적이 없었다. 산에 올라 토끼를 잡아들이고, 장끼를 허리춤에 달고 내려왔다. 심지어 짚가리에 내려온..

좋은 수필 2022.06.05

고무장갑/송종태

고무장갑/송종태 인연이란 무엇인가. 살다가 정이 들면 인연이라 하는가. 숙명처럼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 부르는가. 덩그러니 홀로 나동그라진 세상에서 새 친구를 만났다. 때론 아내 같고, 때론 스승 같은 진솔한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은 위안이요. 감치는 행복이다. 새 친구를 통하여 마음을 도스르고 겉치레뿐이던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 친구인 고무장갑을 끼고 나면 더럽다는 고정관념이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복싱 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사각의 링에 선 모습처럼 당당하였고,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음식물을 토해 놓은 지저분한 상황에도, 묽은 변이 변기 밖으로 너저분하게 얼룩져 냄새를 풍겨도, 공무장갑만 끼면 만사형통이다. 두려움도, 더러움도 모두가 해결된다. 그럴 때마다, 고무장갑에게 감사의 마음이 ..

좋은 수필 2022.06.05

그을음/임병식

그을음/임병식 흙투성이 옷을 입은 채 마루에 누운다. 집안에 배어 있는 오래된 냄새에 섞여 부드러운 촉감이 등줄기로 스며든다. 마당은 후끈 달아오른 햇살이 넘실대고 마루 위는 시원한 바람이 앉아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듯하다. 마루는 가슴을 열어 놓고 주말에만 오는 발길을 기다린 듯, 들에서 일하느라 늘어진 몸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천장에는 서까래가 투박한 몸짓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은 친정 집은 반백 년이 훨씬 지났다. 서까래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지문이 그을음 속에 묻혔다. 하얗게 칠했던 회벽도 시간의 더께가 묻어서 검게 변했다. 처마 밑, 기둥, 창호지를 바른 문살, 집안 곳곳에 그을음이 진득하게 앉아 있다..

좋은 수필 2022.06.05

갯벌/전해미

갯벌/전해미 신선한 공기가 나의 폐부 깊숙이 들어와 요동을 친다. 요양 차 고향에 내려서니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꼬막으로 유명한 벌교라는 작은 읍이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청정지역이라 펄 속에 사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천혜의 땅, 지명보다는 꼬막이라는 생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벌교는 포근한 안식처로 나의 유년시절의 그리움이 탱글탱글 영글어 있는 곳이다. 비릿하고 찐한 갯내음이 바닷바람에 실려 온 몸을 휘감는다. 고향 냄새이자 엄마의 포근한 품 속 냄새이다. 드넓은 펄 밭이 펼쳐지는 곳에 갯가를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난다. 펄 밭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갈대가 양 옆으로 줄지어 우거져 있다. 젖가슴과 같은 보드라운 진흙의 손맛은 갈대의 정화작용 속에 살아 숨 쉬는 바다가 된다. 조석으로 들고나는 ..

좋은 수필 2022.06.05

호미의 낮잠/박순태

호미의 낮잠/박순태 마을 곳곳에서 낯익은 풍경이 걸음을 세운다. 텃밭 옥수수는 수정되는 시기에 맞춰 대궁이마다 뿌연 애향(愛香)이 풍긴다. 감자 씨알은 나날이 굵어가면서 주변 흙을 불룩하게 부풀어 올린다. 울도 담도 없다던 울바자를 따라 양대 콩은 벼름벼름 깍지를 뚫고나올 기세다. 모두 부풀고 일어나고 기를 세운다. 초여름 주말 오후가 조용히 기지개를 켜는 시골 풍경이다. 아내와 시골집을 들르는 길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온해진다. 고향을 찾아오는 길은 아무리 익숙하여도 매번 오관과 육감을 새롭게 살려낸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변환이 머릿속이 아니라 나이 든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다. 고샅을 돌았다. 점심을 두둑하게 먹었건만 갑자기 허기가 진다. 구수한 냄새를 피워 올리던 소죽솥..

좋은 수필 2022.06.05

마당도배/박노욱

마당도배 / 박노욱 귀찮기만 했던 마당을 도배하던 일이 그립다.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럴까. ​ 마른 마당은 늘 평온하다. 비가 내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며칠을 마다하지 않는 비나 모다깃비가 쏟아지면 진흙탕이 된다. 비온 후 울퉁불퉁해진 마당을 삽이나 널빤지로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마당도배라고 불렀다. 옛날 마당은 요즘의 아파트 주차장보다는 우리 가족만의 공간인 거실과 더 가까웠다. 거실을 도배하듯 마당도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 갖가지 이유로 마당은 곰보가 된다. 아이들의 발자국은 나무랄 수 없다. 들일하고 돌아온 삼촌의 리어카 바퀴자국도 어쩔 수 없다. 수탉이 광기를 부린 자리와 강아지나 고양이 발자국까지도 봐 줄 수 있다. 막걸리에 건들 취하신 아버지가 남긴 갈지자 흔적은 마음이..

좋은 수필 2022.06.02

시골집 마루/마경덕

시골집 마루 ​ 마경덕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구시렁구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

좋은 수필 2022.06.01

막돌도 집이 있다/홍신선

막돌도 집이 있다 홍신선 주워 모은 잡석들로 터앝 배수로 돌담을 쌓는다. 막 생긴 놈일수록 이 틈새 저 틈새에 맞춰본다. 이렇게 저렇게지만 뜻 없이 나뒹굴던 돌멩이가 틈새를 제집인 듯 척척 개인으로 들어가 앉는 순간이 있다. 존재하는 것치고 쓸모없는 건 없다는 거지 그렇게 한번 자리 찾아 앉은 놈은 제 자리에서 요지부동 끄덕도 않는다. 사람도 누구나 어디인가 제 있을 자리에 가 박혀 오 돌담처럼 견고한 70억 이 세상을 이룬다

좋은 시 2022.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