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91

능소화 / 김애자

능소화 / 김애자 임금과 하룻밤을 지낸 소화라는 후궁의 기다림이 꽃이 되었다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는 귀한 꽃이지만 지금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출처도 분명치 않은 능소화 한 그루가 대문 옆에서 똬리를 틀더니 곁눈 한번 주지 않는 향나무 허리를 뱀처럼 휘감는다. 목걸이를 한 암캐의 부러움을 딛고 하늘을 감을 태세로 올라가는 줄기마다 처녀의 볼기짝 만한 꽃잎이 요염하게 웃는다. 6월이 되면 능소화와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집 안에서 얌전히 피라고 줄기를 담장 안으로 옮겨 놓으면 잽싸게 문밖으로 나가 서성거린다. 까치발로 목을 빼고 누군가 하염없이 기다리다 소리 없이 떨어진다. 한 여름의 태양을 이고 의기양양하게 떨치는 능소화의 화려함은 여인네의 치마 속까지 무단횡단하며..

좋은 수필 2022.07.29

장마 / 심선경

장마 / 심선경 비 내리는 날은 낮부터 불콰하게 취하고 싶다. 어쩌면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아니라 무료한 나의 나날들일 것이다. 비에 젖어 한결 선명해진 원고지 칸 같은 보도블록을 따라 걷는다. 서툴고 어설픈 보행으로 비틀거리며 잘못 써온 일상들이, 빗물을 게워내는 보도블록처럼 울컥울컥 솟구친다. 이런 날은 병원 진료 때 의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장 난 몸이 낡은 가죽 부대 속에서 삐져나와 뼛속까지 침투한 통증을 슬그머니 건네주고 간다.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착각. 내 좁은 시야로는 그 큰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용을 쓰다보니 온몸과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욱신거린다. 장마철 소나기는 항상 비를 피해 뛰는 내 발걸음보다 먼저 당도했다. 삽시간에 빗줄기는 시야를 가린다. 시커먼 먹구름 사..

좋은 수필 2022.07.29

호박 보름달/김영애

호박 보름달/김영애 21층 베란다에 늙수그레한 손님이 오셨어요 옮겨 앉으시면 속상하신다기에 별빛 잘 드는 곳에 모셔두고 늦가을 여문햇살 초겨울 시린 하늘 흠뻑 드시고 달달한 후생을 주십사 간청 드렸지요 가끔씩 똑똑똑 공손하게 안부를 여쭙는 동안 햇볕은 조금씩 김포공항 쪽으로 비켜서 주었어요 땅기운 깔고 앉았던 엉덩이가 얇아지고 토실토실하던 황금 피부도 푸석해지셨어요 오늘은 햇살 좋은 길일 만고풍상 다 겪은 노파처럼 충분히 달아올랐을까 엄마 엉덩이같이 접힌 골짜기에 심호흡을 대고 거부하는 칼날로 쾅쾅쾅 만삭의 배를 쪼갰어요 두 동강 난 몸 움싹으로 가득한 황금색 자궁 속에서 소름처럼 울컥 양수가 튀었어요 불쑥 내뱉은 어릴 적 생리통처럼 노란별꽃 뙤약볕우레 처서귀뚜리가 뛰어나왔어요 소스라쳤을 태아들, 나는 ..

좋은 시 2022.07.27

벌레 먹은 잎을 읽다/권정희

벌레 먹은 잎을 읽다 권정희 비바람 부는 날에 나무들이 몸 흔들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뭇잎들 울음을 찔러 넣은 채 바닥 위로 눕는다 묵묵히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잎 사이로 팽팽한 어둠 같은 침묵이 맴을 돈다 여리고 성한 잎들의 순서 없는 낙하행렬 바람이 지나가고 비조차 그친 후에 빈집처럼 남겨진 시리도록 맑은 하늘 그 아래 고요히 떠는 벌레 먹은 잎을 본다 남아도 그만이고 떠나도 그만인데 뜯기고 터진 몸을 얼레설레 곧추세워 햇살에 제 몸 말리며 반짝이는 저 빈생 무겁게 다가서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살아야지 버텨 보는 혈맥에 피가 돈다 구멍 난 잎사귀마다 얼비치는 어머니

좋은 수필 2022.07.25

어둠을 더듬다/최정신

어둠을 더듬다/최정신 언어의 보고寶庫에 과부하가 걸린 이즘 가을보다 서둘러 당도한 모 문학지 청탁 엽서를 받는다 고료라야 고작 한 술 밥물도 못 안 칠 책 몇 권이지만 요기가 동해 거미줄 쳐진 글고를 뒤적인다 빈 쭉정이 풀석이는 멍석에 낱알 한 톨 건질 게 없다 잘 보이고 싶던 구레나루 턱선이 오월 다래순 같던 갓 부임한 총각 선생, 눈동냥도 알아야 한다는 말매가 생각킨다 고단수 소비자를 사로잡을 재료를 어디서 구하나 현대풍이라는 젊은네를 뒤적인다 정녕, 저 문맥이 모스부호가 아니라면 허랑방탕 까먹은 시간이 무색한 청맹과니다 과거는 뽕짝, 작금은 K팝, 미래는 암호, 어중간한 표절을 해봐야 우스꽝스러운 피에로 뛰뚱걸음이다 에만 자판을 밀어 던지고 낚을 컨닝 거리를 찾아 마우스커셔를 즐겨찾기에 디민다 모든..

좋은 시 2022.07.20

첫눈/장석주

첫눈 장석주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의 빈 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감상] 첫사랑, 생각만 해도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명치 끝이 먹먹해지는 그런 단어다. 사람들은 철부지 시절의 풋풋한 ‘첫사랑’을 왜 쉬이 잊지 못하는 걸까 러시아의 심리학자는 이와 같..

좋은 시 2022.07.18

나무말뚝/마경덕

나무말뚝 마경덕 지루한 생이다. 뿌리를 버리고 다시 몸통만으로 일어서다니, 한 자리에 붙박인 평생의 울분을 누가 밧줄로 묶는가 죽어도 나무는 나무 갈매기 한 마리 말뚝에 비린 주둥이를 닦는다 생전에 새들의 의자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온 내력이 전부였다 품어 기른 새들마저 허공의 것, 아무것도 묶어두지 못했다 떠나가는 뒤통수나 보면서 또 외발로 늙어갈 것이다 -시집 『글로브 중독자』 중에서 [감상] 한 그루 나무말뚝으로 늙어가는 생을 읽는다 푸른 그늘 드리울 때는 새들의 놀이터가 되고 쉼터가 되었지만 날개달린 것들이란 훨훨 허공으로 날아가면 그뿐 더 이상 내줄 것도 없는 늘그막, 그래도 몸통만으로 일어서서 주어진 숙명이듯 밧줄에 몸을 건다 그게 인생이다 (양현근/시인)

좋은 시 2022.07.18

쑥부쟁이 / 박해옥

* 사진 : Heosu님 쑥부쟁이 / 박해옥 저녁놀 비끼는 가을언덕에 새하얀 앞치마 정갈히 차려입은 꼬맹이 새댁 살포시 웃음 띤듯하지만 꽃빛을 보면 알아 울음을 깨물고 있는 게야 두 귀를 둥글게 열어 들어보니 내 고향 억양이네 정성스레 냄새를 맡아보니 무명적삼서 배어나던 울엄니 땀내 울먹대는 사연을 들어보니 무망중에 떠나온 길이 마지막이었다는 고향집 언저리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쑥부쟁이야 쑥부쟁이야 층층시하 시집살이가 고달픈 거니 오매불망 친정붙이들 그리운 거니 옮겨 앉은 자리가 정 안 붙고 추운 것은 돌아갈 옛집을 갈 수 없기 때문이야 [감상] 가을 볕 고운 어느 날, 하얀 웃음인 듯 울음인 듯 남모를 슬픔을 살포시 베어 문 쑥부쟁이의 모습이 어머니의 결 고운 슬픔이랑 맞닿아 있는 것을 봅니다. 시인의 ..

좋은 시 2022.07.17

구슬을 꿰다/조경희

구슬을 꿰다 조경희 아침부터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구슬을 꿰기 시작한다 둥근 상심들을 모조리 한 곳에 끼우고 있는 시간 처마 끝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투명한 구슬들은 무슨 상심이 그리 많은 지 꿰어도 꿰어도 끝이 없다 한알 두알 구슬은 무게를 더해가는데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툭,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저절로 실이 끊어진다 도르르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구슬들 저것들을 다시 꿰어야하는 일상들이 장롱 밑으로 숨는다. [감상] 부질없는 걱정을 달고 사는 것이 어쩌면 삶인지도 모르겠다 처마 끝에 내리는 빗방울을 보면서도 구슬을 꿰듯 걱정을 한데 모은다 이런 저런 걱정과 근심으로 생각이 깊은 사이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그 무게를 차마 감당하지 못해 툭 끊어지는 저 일상의 실타래는 또 어찌할까 (양현근..

좋은 시 2022.07.17

채석강/서정임

채석강 서정임 그동안 틈만 나면 떡살을 얹어 온 대를 잇는 떡집이다 비 오는 날 거대한 떡이 익어가는 김이 오른다 먼 백악기부터 공룡들과 따개비와 고속도로를 달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갯강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시간을 사서 들고가는 저 오래된 떡집 떡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는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읽는다 차마 멀리 썰물에 쓸려 보내지 못한 채 한 알 한 알 알갱이로 가슴에 박힌 사연을 켜켜이 쌓아둔 그리하여 끝끝내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떡시루에 김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그 뼈아픈 회한을 읽는다 두 팔 걷어 올리고 오늘도 거대한 시루에 떡살을 안치는 누군가의 손길이 바쁘다 [감상] 채석강에 가면 누천만년의 시간이 쌓아올린 떡시루 같은 거대한 바위의 결을 만난다. 바람과 파도와 시간의 합작품에 무수히 ..

좋은 시 2022.07.17

가을, 곡달산 / 유현숙

가을, 곡달산 / 유현숙 퍼붓던 비 그쳤다 산등성이로부터 쏴아 바람 밀려온다 내 목이 꺾인다 간밤 내내 비에 젖으며 묵언 정진하던 잣나무들, 말할 거야 말해버릴 거야 다투어 소릴 지른다 황토등성이에 불 질러 갈아엎은 퍼런 젊음이 그 혈거시대를 살았던 정염이 곽란을 일으키며 수만 색깔 단풍을 게운다 함석지붕 위에서는 바람이 쿵쾅거리다 굴러 떨어지고 낡은 대소쿠리 하나 걸린 흙 벽담, 그 소리에 놀라 자빠진다 밤새워 제 속을 비워내고도 아직 가슴살이 붉은 저 땡초 문지르는 손바닥에 벌겋게 단풍 물 묻어난다 -유현숙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 어느덧 가을이다. 온몸을 휘감아오는 바람은 서늘하고 그동안 가꾼 수확의 기쁨을 맛보며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가을이 어떤 이에게는 허무와 쓸쓸함으로 다가와 잠 못..

좋은 시 2022.07.17

감꽃 1 / 양현근

감꽃 1 / 양현근 마당에 감꽃을 내려놓고 안산 너머 보리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내며 건너가면 서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엎질러진 계절을 주머니에 주워 담던 손끝에 해마다 감물이 들었다 붉은 기억의 저편 골목길을 지키는 감나무에 풋감처럼 매달린 기억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젓던 아이 그날의 풋내 나는 미소를 깔고 앉아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을 생각했다 유년의 뒤란에 다닥다닥 매달린 떫은 시간들 해거름 배고픈 송아지 울음이 감꽃에 앉았다가 후두둑 쏟아진다 묵은 감나무 그늘이 출렁거린다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 기억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맛이다. 덜 익은 감을 씹었을 때 입안에 달라붙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타닌 성분처럼 혀끝을 다시 한 번 굴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 ..

좋은 시 2022.07.17

못 / 권덕하

못 / 권덕하 옥탑 다시 환하다 어느 이주자 불 들인 모양인데 웃풍에 설핏 잠 깨면 하얀 입김에 낮은 천장 꽃무늬 실려 있어 처음엔 낯설 것이다 시린 햇살의 국경 넘어 와 벽지에 이울던 남십자성 별빛, 막막할 때 눈길 머물던 그 자리 벽 먼지가 그려놓은 사진틀이 숨표로 변한 못 자국에 걸려 생의 얼개만 남았는데 실 평수에 들지 못한 꿈에 박혀 한 땀 한 땀 십자수 놓아갈 형틀 파인 몸, 몇 바퀴 더 틀면 가족사진 걸 힘도 생길 것이다 - 권덕하 시집 ‘생강 발가락’ 전세난이 심각하다. 전셋값이 상승하면서 깡통전세에 대한 우려도 커지는 추세다. 이에 생활고를 겪는 사람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이주자가 옥탑에 불을 들였다. 누군가 잠시 살다 이사를 한 방, 잠을 자다 웃풍..

좋은 시 2022.07.17

푸른 기와/허영숙

푸른 기와 허영숙 우체부가 바람을 던져 놓고 가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집 밤이면 고양이들이 푸른 눈빛을 켜드는 오래된 빈집에 언제부터 들어와 살았나 낡은 전선줄을 타고 지붕을 새로 올리는 담쟁이 땡볕이 매미 울음을 고음으로 달구는 한낮에도 풋내 나는 곡선을 하늘하늘 쌓아올리는 저 푸른 노동 질통을 지고 남의 집 지붕을 올리던 가장家長이 끙끙 신열을 앓으며 뒤척일 때 얼핏 들여다 본 어깨의 멍자국 같은, [감상] 생각만으로 이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시절을 무성하게 덮은 담쟁이 넝쿨도 땡볕이며 비바람 마다하지 않고 푸른 허공을 길어 올린 고픈 노동의 손금일 터이다 한 가정을 꾸리고 기업을 경영하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 또한 담쟁이의 거친 손금과 닮아 있는 것을 본다 담쟁이의 푸른 기왓장에서 온갖 어려..

좋은 시 2022.07.17

간절곶/최정신

간절곶 최정신 소리 내어 울, 일이 산, 만큼 쌓이는 날이 있다 천 개의 손짓으로 천 개의 합장을 밀고 오는 간절곶에 파도가 산다 산다는 건 밀리고 밀리는 일 물살이나 뭍살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출렁이며 지글거린다 바람이 간짓대 포구에 실없는 말을 건다 포말이 하얀 이를 들어내 대꾸를 한다 저들도 혼자는 외로웠나 보다 기척 없이 오는 봄도 제 분에 겨워 저무는 중이라고 아직도 들어야 할 짜디짠 푸념이 모래주름 현을 뜯는다 화암化巖 주상절리에 핀 겹겹 사연은 언제 가서 다 듣나 억겁을 퍼 내어도 마르지 않는 시간 앞에 삭제한 다짐이 로그인 된다 예매를 빌미로 몸은 부산하고 마음만 사나흘 주저앉아 그렁그렁 깊어진다 [감상] 산다는 일은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히며 스스로를 몽글리는 일일 것이다. 세상과 어울..

좋은 시 2022.07.17

북엇국 끓는 아침/이영식

북엇국 끓는 아침 이영식 생목이 올라 눈뜬 아침, 아내는 북어를 패고 있다 우리 집 세간에도 패고 두드려 방짜로 펼쳐놓을 무엇이 남아 있던지 빨랫돌 위에 난장을 치고 있다 베링해에서 겨울 산정까지 가시뼈 움켜쥐고 얼리고 말리던 난바다 한 덩이, 살점 튀도록 곤장치레 당한 뒤에야 황금빛 속내 풀어놓는다 일찌거니 명란, 창란젓으로 장기臟器 내어준 보시덩어리 냄비 속 대파 몇 뿌리와 한통속으로 끓는다 기다리면, 내게도 올 것이 있다는 국 한 그릇의 희망이 뜨는 아침 어둠 벗은 길들이 환하게 일어선다. [감상] 지아비의 속풀이를 위해 북어 한 마리를 패대는 아낙의 따뜻한 마음을 읽는다 얼리고 말린 황금빛 속내에 우러나는 파란 바다와 바람 한 덩이, 술김에 벗어둔 골목이며 길들이 마침내 환하다

좋은 시 2022.07.17

막사발/김종제

막사발 구석기김종제 그래, 너희들 몇몇 가진 자들의 안방에 고이 모셔둔 백자도 청자도 아닌 것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개똥인지 언년인지 이름도 모르고 낯도 설다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무기라던가 원하지도 않던 불구덩이에서 잔뜩 달구어져 잘못 태어난 자식과도 같이 버리기도 뭐 해서 그냥 내버려 두다가 제대로 병구완 받지도 못해 황달기 오른 얼굴에 얼룩지고 껄끄럽고 잘 부서지는 우리네 민초(民草)와 왜 이리 닮았을까 그저 막 쓰다가 밥도 못 받아 먹고 굴러 다니는 그릇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먹고 살기 위해 사기막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우리 민족이 아니겠느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물이나 져 나르다가 진흙이나 개다가 발물레로 꼬박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종지 한 개를 만든다 숫돌에 간 낫..

좋은 시 2022.07.17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17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좋은 시 2022.07.17

점등인이 켜는 별 / 이정화

점등인이 켜는 별 / 이정화 어스름이 마당을 기웃거린다. 길 잃은 개인지 어린 고라니인지 모를 짐승이 살금살금 뜰을 건너온다. 길고양이 한 마리 담을 넘어 골목 저쪽으로 사라진다. 맞은편 산자락이 천천히 제 능선을 지우면서 어둠이 사위에 드리운다. 딸깍, 저녁의 처마에 낡은 등불을 켠다. 부엉이 울음소리, 쓰르라미 부비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밤의 교향곡 선율을 따라 시냇물 소리도 넘실거린다. 주근깨 같은 별들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밤하늘을 수놓는다. 저 별빛 중에는 수억 년을 달려온 것들도 있겠다. 시간의 장구한 길이를 가늠하자니 먼 빛이 더욱 아득해진다. 내 삶은 등 하나를 찾는 여정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린 그와 나는 두 손을 꼭 잡았다. 세찬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

좋은 수필 2022.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