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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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키우기/마경덕

돼지 키우기 마경덕 “돼지를 키워 학교에 가거라” 엄마의 한마디에 나는 돼지 세 마리의 철없는 어미가 되었다 집집마다 수챗가에 구정물통을 갖다 놓고 해거름에 거두러 다녔다 불어터진 밥알, 비린 생선대가리, 무 껍질, 시큼한 잔반냄새ⵈ 그것들이 몇 푼의 등록금이 되어주었다 동네 우물이 있던 윗집 턱수염이 거뭇한 자취생들이 우글거렸는데 내게 편지를 보내던 남학생도 끼어 있었는데 내가 그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휘파람을 불던 남학생들이 마루 끝에 앉아 키득키득 고1짜리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갈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던 그 집 먹새 좋은 돼지를 굶길 수는 없어 침착하게, 아니 뻔뻔하게 눈빛을 갈아 끼우고 멀건 구정물을 따르고 무거운 양동이를 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섰다 그때마다 사춘기의 뒤통수가 따가웠다 ..

좋은 시 2022.05.13

어리굴젓/김경윤

어리굴젓/김경윤- 아침 밥상에 굴젓이 올라왔다 흰 보시기에 담긴 굴젓이 울다 지친 눈동자 같다 뻘밭 같은 생生을 살아온 울 엄매를 닮았다 남들 앞에선 늘 굴껍데기처럼 강해보였지만 당신의 생애도 팔 할은 눈물이었다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칠순이 넘도록 갯바위에 쪼그려 앉아 굴을 까는 울 엄매 수심愁心 깉은 바다에는 얼마나 많은 파도가 울다 갔을까 그 얼얼한 세월 동안 생굴 같은 가슴 속도 죄 삭았으리 썰물 진 아침나절부터 밀물 드는 저녁 무렵까지 죽은 막내 생각 부도난 둘째 걱정 전화 한 번 없는 무정한 큰 놈 원망하다 혼자서 글썽해졌을 그 눈동자, 생각느니 내 오십 생애도 울 엄매 눈물을 파먹고 산 세월이었구나! 울다 지친 눈동자 같은 어리굴젓 아침 밥상 위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좋은 시 2022.05.11

비/장석주

비/장석주 봄비ㅡ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파블로 네루다)인 땅을 맹인이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 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은 책 읽는 것이다. 깊은 산속 쑥대 갈대 아래 숨어 사는 오류선생이나 다름없다. 이승의 인연들을 끊고 시골 구석에 들어와 빗소리나 키우며 사는 건 그윽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다만 조금 적적할 뿐이다. 살을 맞대고 체온과 냄새를 킁킁거리며 잠들..

좋은 수필 2022.05.11

여름이 좋다/ 장석주

여름이 좋다/ 장석주 태양에게 자비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불볕을 쏟는 태양은 만물에게 아주 가혹한 시련을 안길 따름이다. 한낮 이마에 떨어지는 촛농이라니! 태양이 이마를 태우려 드는구나. 한낮 태양이 던지는 금빛 그물에 포획된 생물은 허덕거린다. 하지만 나는 여름이 좋아! 여름이 오면 내 안에 사는 이마가 반듯한 착한 소년이 환호작약한다. 태양은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숲속 활엽수의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인다. 저 먼 곳에 있는 푸른 바다는 더욱 파랗게 빛난다. 태양이 만물에 흩뿌리는 빛은 그것이 기쁨, 희망, 자애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태양 아래서 토마토와 복숭아, 자두가 둥글게 익어 간다. ​ 한낮 공중에서 타던 해가 떨어진다. 해 진 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질 때..

좋은 수필 2022.05.11

마경덕 시 모음

우물 / 마경덕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

좋은 시 2022.05.08

태풍과 칼 / 이인주

태풍과 칼 / 이인주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실하게 영근 과일들을 하혈하듯 쏟아 내렸다. 다 털린 빈 몸으로 아랫도리를 휘둘리고 있었다. 짓밟힌 채마밭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태풍의 공습이었다. 열대의 바다에서 태어난 루사는 잉태된 그 뜨거운 입김을 몰아 제주도의 목덜미를 핥고 정확히 한반도의 심장부를 뚫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혹한 입김의 자취가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자연의 위력 앞에 손쓸 수 없는 한낱 인간의 허약함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일까? 독기를 품었으나 심중을 알 수 없는 여자처럼 그렇게 루사는 한반도를 관통했고 인간은 내장을 다친 어린 짐승처럼 신음했다. 이백 명이 넘는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조 원의 재산 피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막힘으로 오..

좋은 수필 2022.05.08

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열세 살 난 계집아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치마폭을 뒤집어 쓴 채 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자진했다. 효도밖에 모르는 어린것이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천길 물로 뛰어들었다. 뱃머리에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두 손을 꼭 잡은 소녀의 잔상이 남아있다. 그림 속 어린아이가 아무리 눈물을 삼키며 서있어도 긴장감은 생기지 않았다. 인형극이며 동화, 거기에 주워들은 이야기까지 보태져서 그 후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뒷일이 오히려 선명했기 때문이다. 인당수에 빠지기 전의 고난은 지워지고 꽃으로 피어난 이후의 삶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효녀 심청 그와 나는 처음 만난 그때나 지금이나 딸자식이라는 처지 하나 밖에는 손톱만치도 닮은 점이 없다. 젖먹이를 두고 어머니는 저세상으..

좋은 수필 2022.05.05

만灣, 만滿, 만晩 / 윤정인

만灣, 만滿, 만晩 / 윤정인 만灣 - 만나고 굽어지다 ​ 물마루가 밀려온다. 둥근 띠를 이루는 파도의 능선이 아래로 꺼졌다 위로 솟구친다. 바람을 따라 공중으로 물보라를 뿜어 올리다,방파제에 부딪쳐 포말로 흩어지기도 한다. 사납게 내달리던 파도는 만灣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파도는 과감하게 경계선을 넘어온다. 무방비로 서 있던 해안선은 뒷걸음치며 물러나지만 소용없다. 바다는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 자리를 만들어간다. 물굽이의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역동적인 바다는 제 몸피를 육지의 가슴속 깊이 밀어 넣었고, 망설이던 육지는 둥글게 몸을 말아 껴안았을 것이다. 만의 탄생이다. 어느새 훅 들어왔더라는 지인의 말처럼 그도 그렇게 내게로 왔다. 처음 만난 건 친구의 하숙집에서였다. 같은 학교..

좋은 수필 2022.05.01

강적들/신미균

강적들 詩人 신미균 ​ 의자 모서리에 다리를 부딪혔다 의자 모서리는 그대로인데 내 다리가 찢어졌다 ​ 책이 발등으로 떨어졌다 책은 멀쩡한데 발등에 멍이 들었다 ​ 땅바닥에 넘어졌다 땅은 아무 이상이 없는데 내 무릎만 깨졌다 ​ 스타킹을 신다가 스타킹 고무줄은 생생한데 손을 베었다 ​ 꼭 딱딱한 것들한테만 당하는 줄 알았는데 야들야들한 것들도 칼날을 숨기고 있다 ​ 세상에 만만한 것들이 없다

좋은 시 2022.04.28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여름의 길섶은 싱그럽고 풍성하다. 와르르 쏟아진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새끼 제비처럼 주둥이를 벌려 먹이를 받아먹는 것 같은 강물 위로 햇발이 깊숙이 뻗친다. 막 버무려 놓은 상큼한 달래 같은 강물이다. 아름다운 만남이랄까? 양 어깨가 무척 넓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가 우리를 맞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일렁이는 강물이 포옹을 끝내고 시침 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소화불량 걸린 작은 일상들의 체기가 서서히 풀리고 지끈거리던 머리와 지친 마음이 금세 맑아진다. 잃어버린 삶의 의욕이 다시 일어서고 불끈불끈 생각들이 치밀어 오른다. 낯선 통증이다. 누구보다 아픔이 많은 그녀다. 작년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남편마저 혈압으로 쓰러져 7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했다. 지금도..

좋은 수필 2022.04.27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 목성균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 목성균 지금은 다 산이 되었지만 강만돌 어른이 살아 계실 때는 윗버들미의 유지봉 넓은 산자락에는 따비밭들이 누덕누덕 널려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는 사랑간에 한방 가득 장정들이 모여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달빛이 방문을 하얗게 적시면 “달 떴네” 하는 좌장(座長) 말에 놀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랑 마당 가득한 지게에서 제 것을 찾아 지고 유지봉 따비밭으로 올라갔다. 아직 바심(타작)을 못하고 가려 놓은 채 있는 뉘 집 서슥(조) 더미를 울력으로 져 내리기 위해서다. 강만돌 어른네 따비밭의 서슥 더미를 헐어서 한 짐씩 짊어 놓고 앉아서 내려다보던 푸른 달빛이 어린 골짜기. 풀어 널은 명주자치처럼 달빛에 하얗게 바랜 냇물이며, 순산한 산모가 조용히 숨을 고..

좋은 수필 2022.04.27

다소곳이 오 4편/이삼현

다소곳이 외 4편 / 이삼현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또, 이만큼 자랐구나 살았구나 이 길이만큼의 목숨을 잘라내며 기쁨도 조금 감추고 살아온 슬픔도 조금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난 무덤덤한 날들을 미움인 줄도 모르고 섞인 흰 머리카락을 함께 자른다 동에서 서로 저무는 달처럼 아내 쪽으로 기울어 잠든 밤에도 너는 깨어 있었구나 일손을 놓지 못한 순간에도 칼바람이 뿌리를 드러낸 틈새 속에서도 너는 속도를 잃지 않았구나 키를 키웠구나 밀어 올렸던 성장판은 닫히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걸 잊었지만 또, 이만큼 깎는구나 버려야 하는구나 사진: 세상을 보는 또 다른눈 양파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

좋은 시 2022.04.22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둥글둥글한 버섯들 군생처럼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시골 마을이다. 한해의 결실을 보고 난 뒤의 들판은 허무인지 여유인지 텅 빈 충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담장 너머 등불처럼 붉게 매달린 홍시가 방학 때마다 외갓집 오고 가는 길목처럼 정겹기만 하다. 숲속 어딘가에서 갑자기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른 새가 폐곡선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조붓한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안내하듯 앞장선다. 오래된 시골집이다. 귀향을 염두에 두고 잠시 머물 거처를 찾던 중이었다. 뒤란에서 불어오는 대숲 바람, 호박넝쿨 타고 오르는 낮은 돌담, 우물가 옆에 돌확이나 숫돌이 주인 잃은 빈집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앞세운 일가족이 등가죽 따뜻하게 살던 집이었으리..

좋은 수필 2022.04.20

디지털 시대의 문장력 / 김시래

디지털 시대의 문장력 / 김시래 상도동 중앙대학교 후문에 유명한 닭볶음탕집 식당이 있다. 종로에 본적을 둔 계림닭도리탕이다. 대로변에서 올려보면 2층창문에 "곧 60년"이라는 문구가 눈에 뜨인다. "곧"이라는 토를 단 이유가 뭘까? 대학동기의 손에 이끌려 점심과 반주를 겸한 그곳의 인상은 그렇게 다가왔다. 솔직한듯해서 나쁘지 않았다. 반면 다소 의심쩍기도 했다. 방송국이 추천한 맛집이라며 제멋대로 미끼를 던지는 식당이 어디 한둘이던가. 가게안으로 들어서니 주방쪽 테이블 벽쪽에 걸린 액자에도 다소 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맛있으면 이웃에게 알리고 맛없으면 주인에게 알려주세요". 라는 글귀였다. 무슨 큰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창문에 적힌 글과 더해 가식없는 주인의 마음씀씀이를 가늠케했다. 그..

수필 이론 2022.04.19

나무의 꿈 / 문정영

나무의 꿈 / 문정영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

좋은 시 2022.04.16

멍석딸기, 수숫대, 까치밥 / 김서령

멍석딸기, 수숫대, 까치밥 / 김서령 멍석딸기.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이름이 멍석딸기지요? 멍석딸기는 넝쿨을 옆으로 떨치지 않느냐. 멍석처럼.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열매가 크지요? 잎도 크고 꽃도 크니까 그렇겠지.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맛이 신가요?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수숫대. 수숫대와 옥수숫대 밑동에는 설탕이 들어 있다. 공기뿌리가 삥 돌려난 마디의 바로 윗마디를 잘라 이로 껍질을 벗겨내고 뚝뚝 베어먹었다. 입술이며 입속을 베기 일쑤였다. 단물을 다 빼먹고 빡빡해진 섬유소를 뱉어내면 핏물 스민 것이 보이기도 했다. 까치밥. 양지꽃과 꽃다지와 지칭개와 제비꽃이 피는 봄의 논두렁과 길섶에는 까치밥이 여물었다. 신부 족두리에 꽂혀 있는 영락(瓔珞)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까치밥을 한 움..

좋은 수필 2022.04.15

신문으로부터의 사색 - 원정란

신문으로부터의 사색 - 원정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때 가장 값진 글감이 진실이란 것을 알았고 뼛속까지 정직하고 싶던 때라 더 울림이 컸다. 그러나 실현에 옮기는 일은 얼얼한 감동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그 후로도 좋은 책을 만나면 출렁거렸고, 그리고 40년 동안 은근하고 은밀하게 나를 중독시킨 안방마님 ‘신문’은 그 세계와의 소통에 다리가 되어주었다. 조간신문, 변화무쌍한 나를 매일 붙잡고 있는 절대불변의 공간, 한동안 아이들 뒷바라지로 분주한 풍경 뒤에서도, 이제 각자 무대로 진출해 호젓한 풍경 뒤에서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있는 친구. 그 잉크 냄새가 커피 향과 섞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쾌감으로 뻑뻑했다. 이내 목을 타고 내리는 커피 ..

좋은 수필 2022.04.14

글쓰기와 관점 / 김시래

글쓰기와 관점 / 김시래 도전에 응한 이유를 묻자 48살의 추성훈은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을 가야 배울 것이 많을 것'이란 아버지의 가르침을 꺼내들었다. 모두 감동했다. 남은 그의 여정도 그럴 것이다. 백전노장의 말에는 인생을 대하는 관점이 담겨있다. 말과 글은 관점의 도구다. 글속에 담긴 관점은 그의 인생처럼 유일무이해야 한다. 공감마저 얻는다면 세상을 넓히고 세상을 키울 자격을 얻는다. 단어와 어휘가 사용되고 매끄러운 문장력이 동원 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라. 단골 손님이 그릇 구경하러 음식점에 가는 게 아니다. 맛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은 문체가 아니다. 관점이다. "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 때일까" ,"구겨진 종이가 더 멀리 간다". 하상욱 작가의 단문이다. 댓구로 이뤄진 감각적 문..

수필 이론 2022.04.11

채독/이순혜

채독/이순혜 자금산 기슭에 내려앉은 덕동마을은 어머니의 품같이 편안하다. 오래된 나무와 고택이 어우러져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덕동마을은 농재 이언괄 선생이 양동에서 옮겨와 정착하면서 마을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택 사이를 거닐다 덕연관 앞에 섰다. 이곳은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 생활 용구, 농기구 등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곳이다. 문화마을로 지정되면서 흩어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유물을 주민들이 기꺼이 내놓아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시관 입구에 부끄러운 듯 돌아앉은 채독이 눈길을 끈다. 채독은 나무 항아리다. 싸리나무의 낭창한 성질을 이용하여 큰 장독처럼 모양을 빚어 안쪽과 바깥쪽에 창호지를 바른다. 채독은 통풍이 잘되어 주로 마른 곡식을 갈무리하거나 옷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 내 기억..

좋은 수필 2022.04.06

장조림/길상호

장조림 길상호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의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스위치를 끄면 어둠이 고여드는 방 밤은 적당히 짜고 달고 매콤하고 얽힌 손길에 더는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지금은 저 방에 나란히 갇혀야 해요 배꼽 속 지루한 인연이 모두 우러나오고 눈에 담긴 통증도 흐물흐물 풀리면 액자 속 다정했던 시절로 우리 찰칵 찰칵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요 방 안 가득했던 어둠이 졸아들면 정수리에 모여든 쓸쓸한 거품을 걷어주면서 이제 어떤 말에도 쉽게 상처받지 않는 짭조름한 심장을 갖고 살기로 해요 한없이 뒤척이게 되더라도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배어들기 위한 일 검은 밤이 너무 일찍 끝나버리면 안 되니까 심장의 불꽃을 중불로 내려주세요

좋은 시 2022.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