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91

끝/박시윤

끝/박시윤 땅 끝에 와 있다. 물결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바다 앞에 아이를 안고 섰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이 아이와 나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해는 수평선 끝에서야 비로소 마지막 한계를 불살라 놓고 유유히 사라진다. 묽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건물과 산들이 엷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틈틈이 비워진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나간다. 해넘이가 끝난 사방천지는 어둡고 싸늘하다. 끝을 본 전쟁터의 뒷날처럼 숨죽인 채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 속에 파도 소리만이 가슴으로 자작이 흘러든다. 모래밭에 다다라서야 조각조각 깨어져 생을 마감하는 파도의 눈물은 가슴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켜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하리라. 아이를 품에 꼬옥 안고 바람을 맞는다. 뜻하..

좋은 수필 2022.03.13

햇살요양사/손준호

햇살 요양사 / 손준호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록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

좋은 시 2022.03.13

몽돌/백명철

몽돌 백명철 쏴 밀려왔던 파도가 스르르 밀려나간다. 봄날 오후, 눈부신 햇살아래 바다가 고른 숨을 내쉰다. 푸근한 그 품에 안겨 눈을 감는데 신기하게도 자그락거리는 숨은 소리가 들린다. 연인들의 은밀한 속삭임 같기도 하고, 아픈 상처를 하소연하는 웅얼거림 같기도 하다. 돌이 파도에 구르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있는 바닷가에는 크고 작은 돌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옅은 갈색, 검은 색, 회색 등 색깔은 제각각이지만 모양새는 동글납작한 것이 대부분이다. 자세히 보니 어느 돌이나 몸 전체가 부드러운 곡선이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흘렀을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구르면서 서로 다듬어 마침내 둥그스름한 모습이 되었다. 문득 저 돌들처럼 나의 각진 삶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삶의 파..

좋은 수필 2022.03.12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뒷모습을 읽는다. 의식하거나 꾸미지 못해 정직한, 말이 없어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숨겨진 마음을 보여주는 다층의 실루엣이 뒷모습이다. 따라가다 보면 훤히 읽히기도 한다. 저물녘인데도 병원은 대기 환자로 북적인다. 진료를 마치고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뒤통수에 알밤이 날아든다. 약간은 장난스럽게, 살며시 튕기는 감촉이 생급스럽다. 뉘라서 꿀밤을 날리는 건가. 뒤돌아본다. 키가 껑충한 웬 젊은이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 곧 그가 아는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몇 초가 흘렀을까. 여전히 그는 요지부동이다. 누구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미숙씨 아니에요. 부드러운 말투로 그가 되묻는다. 아닌데요, 사람 잘못..

발표작 2022.03.12

글의 과녁 / 김시래

글의 과녁 / 김시래 얼마전 MBC ‘놀면 뭐하니?’를 연출한 김태호 PD가 백상예술대상에서 한 수상소감은 의아했다. 그는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놀면 뭐하니?’가 시즌제로 가야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재석씨가 혼자 끌어가는 것이 큰 스트레스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2년을 향해 달려갑니다.유재석씨가 데뷔 30주년을 맞았는데 센스있는 백상예술대상에서 그 선물을 준비해 주려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평소 담백했고 겸손한 프로듀서였다. 이날도 수상의 영광을 파트너의 수고와 공으로 돌려 시상식의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다소 방심했다. 시상식의 주인공은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아니라 시청자다. 시청율을 올려준 것도,시상식을 보는 사..

수필 이론 2022.03.12

섬돌/박양근

섬돌 박양근 별스럽지 않은 돌이다. 산이나 들판 웬만한 곳이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한 자 남짓 넓이의 돌덩이다. 주춧돌이 될 만한 모양새는 애당초 타고나지 못했고 솜씨 있는 석공의 마루와 마당 사이의 성긴 틈을 메우는 돌은 이것이 제격이다. 이 돌이 섬돌이다.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평범한 돌층계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황토가 곱게 다져진 앞마당을 다소곳하게 내려다 보듯 대청마루를 혼신의 힘으로 떠받치듯, 단단하게 괸 물상이다. 처음 그것이 놓여질 때는 빈틈도 흔들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온갖 발자국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채석장의 파석처럼 부서져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를 지켜내는 미명의 아픔이 쌓이듯 박혀지는 곳이 섬돌이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집안 어른이 섬돌을 오르내릴 때의..

좋은 수필 2022.03.11

율포의 기억/문정희

율포의 기억/문정희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좋은 시 2022.03.11

돌의 미학/조지훈

돌의 미학/조지훈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다,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놓기도 하고, 10리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쇄한 산봉우리 밑, 물을..

좋은 수필 2022.03.11

너와집/김이랑

너와집/김이랑 죄라도 지었을까. 유배라도 떠난 듯 너와집은 두메에 있다. 산촌박물관에 전시된 집은 박제일 뿐, 그 영혼을 찾으려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주가곡선株價曲線에서 뛰어내리고 쿵쾅거리는 세상일랑 하루쯤 버려야 한다. 도시를 벗어나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에 유랑민의 노래 몇 소절 뿌리면 좋다. 저만치 누가 온들 돌아오는 사람이겠냐는 듯 너와집은 무덤덤하다.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았으니 허름해도 좋고, 빈틈없는 삶을 바라지 않았으니 허술해도 괜찮다며 매무시를 여미지도 않는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이 없으면 어떻고 물 한 그릇 건네는 이 없으면 또 어떤가. 먹어보고 입어보라는 새빨간 장삿속에 넋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 얄팍한 지갑 걱정이나 마음의 무장일랑 내려놓고 자적自適에 들어본다. 새끼 짊어지고 고..

좋은 수필 2022.03.10

돌갗/김정화

돌갗 김 정 화 눈가리개를 벗으니 세상이 눈부시다. 어른거리는 주변의 물체들을 제치고 하얀 천위에 놓인 콩알만 한 돌에 눈길이 꽂힌다. 그 동안 말문을 가로채고 침샘의 길을 막았던 숨은 주범이다. 몰골이 초췌하다. 몸속에서는 제 맘대로 돌아다니며 한시도 나를 편안하게 해 주지 않던 결석이 세상에 나오면서 꼼짝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사리 같은 고매한 품격과는 너무나 먼 한낱 돌조각에 지나지 않는 모양새다. 내가 수행자도 아닌 터에 내 돌은 결석일 뿐, 짝퉁 사리로도 여길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얼마 전 턱밑 침샘에 결석이 생겼다. 어쭙잖은 사람에게는 아픈 곳이 유별나다. 작은 돌이 입속 통로를 막는 바람에 며칠 동안 목이 부어올라 음식물을 잘 삼키지..

좋은 수필 2022.03.10

돌/함민복

돌 매끈한 강돌이 있다 돌의 나이테는 돌 바깥에 있다 돌의 나이테는 닳아 없어진 만큼 있다 돌의 나이테 속에 돌이 있다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 함민복(1962~ ) "강돌에는 흘러간 물의 물살이 기록되어 있다. 빠르고 센 물살은 동의 얼굴을 매끈하게 만들었다. 나무는 나이를 알 수 있는 둥근 테를 몸 속에 만들지만, 돌은 나이테를 겉면에 새긴다. 작아진, 더욱 매끈해진 돌일수록 나이가 많 다. 점점 몸집이 작아지고 겉쪽이 반드럽게 되면서 돌은 고령에 이른다. 돌의 나이테는 무었일까? 시 '돌에'를 읽어보면 시인은 '돌에는/ 세필 가랑비/ 바람의 획/ 육필의 눈보라/ 세월 친 청이끼// 덧씌운 문장 없다/ 돌엔/ 부드러운 것들이 이미 써놓은/ 탄탄한 문장 가득하니' 라고 썼다. 아마도 돌 의 나이테 문양..

좋은 시 2022.03.08

늦가을 문답 ― 임영조(1943∼2003)

늦가을 문답 ― 임영조(1943∼2003) 그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 (중략) … 잎 다 진 청미래 덤불 가시에 찢긴 저녁 해가 선혈이 낭자하게 저문다 잡목숲 질러 식은 조각달 물고 가는 저 부리 길고 뾰족한 홀아비 새는 거느리는 식솔이 몇이나 될까 내 빈 속이 문득 궤양처럼 쓰리다 어서 그만 내려가자, 더 늦기 전에 가을의 정취는 쓸쓸함이고, 정취의 최고조는 늦가을이 제격이다. 꽃도 지고 잎도 지고 이제는 가을마저 지려고 하는 때다. 이제, 이 ..

좋은 시 2022.03.07

마루 / 임영도

마루 / 임영도 마루는 불평하지 않는다. 찍히고 밟히고 뛰어도 아파하지 않는다. 따뜻한 온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벽창호로 막힘을 거부한다. 방밖에 앉아서 계절의 변화를 밤낮으로 바라보지만 감탄의 소리도 지르지 않고 무표정이다. 앞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간섭하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루는 집안 생활의 동선을 이끄는 으뜸자리이다. ​ 경남 함양에 있는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찾아 민박을 한 적이 있다. 마을 전체가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답게 고샅길마다 고풍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발길을 멈춰 세운다. 솟을대문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뒤틀린 서까래에서 애잔한 세월의 흔적이 담뿍 묻어난다. 단정하게 배열된 집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듯이 솟아오른 팔짝 지붕의 추녀마루마다 대학자의 기품..

좋은 수필 2022.03.07

목리/배문경

목리 배문경 장롱 한 짝을 들였다. 친정집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만 차지하던 장롱이다. 앞은 느티나무에 옆과 뒤는 오동나무로 된 전통 방식의 맞춤이다. 비록 유행이 지나고 낡았지만 합판에 무늬 필름을 덧씌운 가구보다 나을 것 같았다. 장롱은 부모님과 오래도록 한 방에서 숨을 쉬었다. 연륜이 있는 물건은 내력을 품어서 그런지 곳곳에 부모님의 숨소리가 배어있는 듯하다. 두런두런 나누는 말이며 갸릉갸릉 가래소리와 쿨럭쿨럭 기침소리 그리고 얼굴에 새겨진 주름까지 느껴진다. 물걸레로 닦고 광택제로 문지르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삶의 무늬가 깨어난다. 물결일까, 바람의 무늬일까, 아니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의 등고선일까. 이쪽에서는 산모롱이를 지나는 물처럼 유려하게 휘돌고 저쪽에서는 들판을 달리는 ..

좋은 수필 2022.03.07

바람악보 / 전성옥

바람악보 / 전성옥 바람이 내려앉는다. 힘없는 바람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내 앞에서 주저앉는다. 무릎에 얹힌 뼈 없는 바람. 먼 길을 지치도록 왔는지 긴 병에 몹시 시달렸는지 몹시도 야위었다. 가난한 집 굴뚝의 연기처럼… 참으로 가볍다. 야윈 바람의 무게에 휘청한다. 나는 풀썩 주저앉는다. 담도 없고 울도 없는 짙은 고동색의 마루청. 휑하니 넓은 그 마루청 한쪽 가장자리에 앞이 낮고 뒤가 높은 비스듬한 그 마루의 중간 높이쯤에. 벌써 한참 되었다. 초가을 아침의 눅눅한 하늘이 사람의 어깨로 내려앉은 지가. 팔랑팔랑, 얇은 것들이 날아 내린다. 마루청 가장자리를 따라 듬성듬성 둘러선 느티들. 어리다. 아직 어리다. 마루를 뚫고 선 세 그루의 느티들. 이들 역시 허리가 두어 줌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이. ..

좋은 수필 2022.03.07

내 몸은 생로병사를 세습한다 / 김서령

내 몸은 생로병사를 세습한다 / 김서령 초저녁 잠이 많아졌다.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꾸벅꾸벅 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면 좀 전에 보던 드라마가 아직도 계속된다. 이건 영락없이 우리 엄마의 동작이다. 만년의 엄마는 아홉 시만 넘으면 텔레비전 앞에서 지금 나처럼 꾸벅꾸벅 졸곤 했다. 그러지 말고 누워서 자라고 권하면 얼른 정색하곤 했다. “안 잤다, 야야. 안 자는 사람을 왜 자꼬 잔다카노?” 어떨 때는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 글쎄 안 잤다캐도!” 맞다. 졸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집중해야 마땅할 흥미진진한 프로그램 앞에서 내가 졸다니! 비록 자식이더라도 자존심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게 노화(老化)든, 피로(疲勞)든, 해이(解弛)든 스스로 수긍하기도 싫고 남에게 들키는 건 더 싫다. ..

좋은 수필 2022.03.07

스타킹/김경희

스 타 킹 김 경 희 에로티시즘의 기호학은 여인의 다리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스타킹에 환호한다. 본다는 행위는 육감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다리의 아름다움은 스타킹에서 완성된다. 발끝서 엉덩이까지, 입었지만 말갛게 속살이 비치니 감각이 핀처럼 날카로워지는 걸까.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에 유혹이 강렬한 원색 스타킹을 신은 여인이 계단을 오르면 남자들은 목이 탄다. 스타킹과 속살의 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특별한 자극을 선사한다. 늑대들의 심장박동이 다급해진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허벅지의 깊숙한 곳까지 숨바꼭질을 해대니 어질어질해지리라. 덩실 뜬 달도 내려와 핥고 싶어질 만큼 홀리는 아찔한 곡선에 남자들의 상상력은 꼭대기에 다다른다. 페티시즘도 스타킹에서 퍼지지 않았던가.《남자의 물건》으로..

좋은 수필 2022.03.04

몽돌/김만년

몽돌 김 만 년 한 바탕 격류가 휩쓸고 간 뒤라서 그런지 강가에는 지층 깊숙이 숨어 있던 햇돌들이 많이 나와 있다. 돌의 온기를 느끼며 자근자근 맨발로 걷는 이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돌들의 형상은 하나같이 닮은꼴이다. 마치 갓 입문한 동자승들이 절간 뜨락에 앉아 재잘재잘 일광욕을 즐기는 듯 모두가 개구지고 정겹다. 느린 발끝에 유독 둥글고 반짝거리는 돌 하나가 채였다. 작은 몽돌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나이테 같기도 하고 사람의 귀 모양 같기도 한 몇 가닥의 문양이 고지도처럼 흐리게 새겨져 있다. 회색빛 결이 무척 단단해 보였다. 돌에도 나이테가 있을까. 이 돌은 어느 먼 시간에 살다가 여기까지 흘러 온 것일까? 문득 돌의 여정이 궁금해진다. 돌의 문양 속으로 억겁의 풍화가 느껴진다. 흐릿한 돌의 등고..

좋은 수필 2022.03.03

홍어/김선태

홍어 - 김선태 ​ ​ 한반도 끄트머리 포구에 홍어 한 마리 납작 엎드려 있다 폐선처럼 갯벌에 처박혀 있다 스스로 손발을 묶고 눈귀를 닫아 인고와 발효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 아무도 없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이 어둡고 비린 선창 골목에서 저 혼자 붉디붉은 상처를 핥으며 충만한 외로움을 누리고 있다. ​ 그리하여 비바람 눈보라는 쳐서 그 신산고초에 제맛이 들 때 오래 곰삭아 개미*가 쏠쏠할 때 형언할 수 없는 알싸한 향기가 비로소 천지간에 가득하리라. ​ ​ *개미 : 곰삭은 맛 ​ ​ ​ 홍어를 잡숴 보셨는가? "형언할 수 없는 알싸한 향기”를 풍기는 홍어,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의 “알싸한 향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그 곰삭은 냄새가 역겹기 때문이다. ​ 아무튼 이 시에서 홍어의 이미지..

좋은 시 2022.03.03

바지랑대 / 허이영

바지랑대 / 허이영 가을장마인가 보다. 잠깐 해가 비추더니 금세 퉁퉁 부은 하늘에서 횃대비가 쏟아지고는 하다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이 열렸다. 그 동안 궂은 날씨로 볕을 보지 못한 이불은 습기가 차고 쾨쾨한 냄새가 났다. 문득 이불에서 나는 햇살 냄새가 그리웠다. 여름의 흔적을 털어내기 위해 가을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어스름 땅거미가 내릴 쯤, 이불 걷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하루 종일 낮볕이 다듬이질한 이불에서 폴폴 날리는 햇볕 냄새와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질 때, 하루의 피로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땀이 밴 속옷과 여름살이 흰옷을 모아 찜통에 넣고 푹푹 삶았다. 밥을 짓는 소시랑게처럼 북적거리던 거품이 이내 찜통 밖으로 울컥 끓어 넘쳤다. 속옷에..

좋은 수필 2022.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