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익다 / 이문자 태풍에 얹혀온 가을이 상처투성이로 보채다가, 어느새 순환의 섭리에 맞춰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촌부들이 내놓은 좌판을 훑어 애호박 한 아름을 안아다 창가에 썰어냈더니, 조금씩 들어앉는 볕 덕분에 오글오글 잘 마르고 있다. 호박오가리와 벌이는 ‘사랑 놀음’에 빠지다 보면 애지중지 손자 녀석들 보듬는 듯해서 가을날의 소소한 일상이 행복한 여인네로 만든다. 결벽증(?) 다분한 남편이 창문 열어놓고 산다고 성화가 심해 어렵사리 이 일을 하면서도, 첫서리 전까지 끝 호박 사 나르는 일을 접을 수가 없는 건, 백로가 지나면서부터 도지는 내 유년의 그리움 때문이다. 새발 마냥 가는 다리를 총총거리며 내가 제일 신나했던 심부름은, 저녁밥솥에 쌀을 안치며, ‘어서 호박 따오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