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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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테크닉이 아니다/김서령

삶은 테크닉이 아니다 올해가 사흘 남았다. 지진과 해일이 남아시아를 휘덮어 수만명을 검불같이 끌고 가고 멀쩡하게 파안대소하던 사람이 배 속에 암세포가 가득 찼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래도 아침해는 잔인할 만큼 무심하게 떠오르고 앞산도 태연하게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새삼 사람의 무력이 실감나는 연말이다. 해는 사흘 뒤에도 분명 똑같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미 낯설고 새로운 2005년의 해일 터이니 올해의 남은 사흘을 안타깝게 부둥켜안지 않을 수 없다. 뭘 할까 궁리하다 나는 결국 피같이 아까운 이 시간을 청소에 쓰기로 작정한다. 군사정부 시절 징역살이를 경험한 소설가 송기원 선생의 말 중 잊지 못하는 대목이 있다. "감방을 새로 옮겨가면 통 정이 안 붙는단 말이야. 그러면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

좋은 수필 2022.02.24

가을무에 단맛을 들여라/김서령

가을무에 단맛을 들여라/김서령 가을무에 맛이 들 철이다. 알다시피 제철 채소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철마다 다른 채소를 길러내는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이승에 생명을 얻어 사는 보람은 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 외의 것은 모조리 덤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새 옷을 입는 것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주 앉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그 아이의 입안에 밥을 넣어주는 것도, 내 몸이 이 땅에 발을 디디는 기쁨 이후에 감각하는 덤에 속한다. 누구의 삶이든 이 덤이 크니 생명을 얻어 지상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꽤나 남는 장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린 덤에 취해 정작 본질을 잊고 산다. 생의 본질! 그건 가을무의 푸른 어깨에 있다. ..

좋은 수필 2022.02.24

아카시아에 바친다/김서령

아카시아에 바친다/김서령 아카시아가 아니라 아카시라고? 침대 머리맡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꿀처럼 흐르는 아침, 아카시아 꽃 위로 꿀벌 잉잉대는 소리 소란한 오월 오후, 아카시아 꽃주저리가 송이마다 빗방울을 달고 있는 어스름,그런 때엔 새로 바뀐 아카시라는 한글 표준어법 대신 애뜻하고 경쾌하게 두 입술을 활짝 벌려 라고 덧붙이는 걸 용서해줘야 한다. 비구니의 피부는 왜 저렇게 맑은 건가 늘 궁금했다. 밭일로 얼굴이 검게 그을렸어도 흰 살갗에 못지 않게 투명한 게 신기했다.유명 피부 미용실의 특수 석고 맛사지를 받는 것도 아닐테고 백화점 일층의 수입화장품 코너의 수십만원 하는 수분크림을 바르는 것도 아닐텐데... 여승들이 얼굴에 투명함과 윤기를 유지하는 비결은 생리심리학이 연구해볼 과제이기도 하고 뷰티 컨설턴..

좋은 수필 2022.02.24

사과/김서령

​​사과 김서령 나는 행복하지만 언제나 똑같은 뉘앙스로 행복한 건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희망이 없다고, 지금껏 잘못 살아왔다고, 곁에 손 내밀 사람 아무도 없다고 착각하는 날도 종종 있다. 그럴 때 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워 줘야 할 필요와 의무를 느낀다. 그런 날 꺼내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직접 처방한 묘약인데 도마뱀의 눈물, 소금 뿌린 로즈마리, 밀랍과 복숭아씨 같은 까다로운 재료가 필요한 건 절대 아니다. 외려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만 효능은 즉각적이고 강력하다. 그건 사과 한 알을 껍질째 와사삭 깨물어먹는 일이다. 너무 시시하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까다로우면 까다롭지 간단하다고 비웃을 일은 아니다. 사과는 와사삭 소리가 입안에서 비강을 통..

좋은 수필 2022.02.24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김서령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 김서령 내 등뒤에 나목으로 이뤄진 숲이 있다. 저 나무들은 아마도 참나무일 것이다. 누가 심은 게 아니라 원래 이 땅에서 절로 돋아난 나무들. 참나무에 꿀밤이 열리면 꿀밤나무다. 도토리를 꿀밤이라고 부르지 상수리라 부르는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나무일 땐 도토리나무보다 상수리나무라고 부르는 빈도가 더 높은 건 왜일까(난 아직도 세상에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참'이라니, 그 외의 다른 나무는 '거짓'나무라도 된다는 뜻일까. 전에 꿀밤 나무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산에 꿀밤이 열리면 그걸 다람쥐가 먹고 꿀밤을 먹고 사는 다람쥐를 오소리 같은 좀 큰 짐승이 잡아먹고 오소리를 잡아먹는 너구리같은 더 큰 짐승을 또 호랑이가 잡아먹고, 그런 먹이사슬의 고리가 제대로 꿰어지자면 ..

좋은 수필 2022.02.24

콩을 심자/김서령

콩을 심자/김서령 봄이 온다. 봄은 땅에서 뭔가 맹렬히 돋아나는 계절이지만 반대로 땅이 입을 벌려 씨앗을 맹렬히 삼키는 계절이다. 나무라면 꼬챙이만 꽂아둬도 물이 오르고 씨앗이라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만 해도 싹이 돋는다. 우주가 약동한다. 모든 길짐승, 날짐승의 피톨과 핏줄들이 바쁘게 요동친다. 땅에 뭔가를 심지 않으면 안된다. 봄에 땅에 씨앗을 묻어본 사람은 그 짓을 안하는 봄을 견딜 수 없어진다. 한톨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이 피고 한들거리다 수백 배의 알곡으로 여무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는 가을이 무슨 소용 있으랴. 봄에 씨앗을 묻는 이의 일년은 암만 빨리 흘러도 허망하지 않다. 진작 내 인생의 봄날에 깨우쳤어야 할 진리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 알고 나면 너무 늦다. 대신 봄이 오면 나는 회한을 곱..

좋은 수필 2022.02.24

노숙露宿 / 김사인

노숙露宿 / 김사인 ​ ​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좋은 시 2022.02.23

칼잠 / 최일걸

칼잠 / 최일걸 ​ ​ 칼잠을 자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마모되어야 잠이 번득이는 날을 세워 칼에 이르는 건지 녹슨 양철지붕 같은 밤, 어떤 폭압이 저들을 협소한 공간에 몰아넣어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걸까 꿈마저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이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생의 갈피갈피를 비비며 칼갈이를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잡이를 꿈꿔보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아 온돌이 되어 아랫목을 넓혀 가며 아궁이 보다 깊게 서로의 속을 헤아린다 부지깽이 같은 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다 보면 군감자 보다 더 따스해서 입김 호호 불며 한 덩어리가 된 삶을 나누어 먹는다 겹겹의 칼날을 이룬 그들이 허기의 단속을 피해 곤한 잠으로 풀어지려면 무허가의 밤은 도대체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할까

좋은 시 2022.02.23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이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 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 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을 하고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좋은 시 2022.02.23

삼겹살에 대한 명상 / 고 영

삼겹살에 대한 명상 / 고 영 ​ ​ 여러 겹의 상징을 가진 적 있었지요 언감생심, 일곱 빛깔 무지개를 꿈꾼 적 있었지요 불판 위에서 한 떨기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 있었지요 ​ 흰 머리띠를 상징으로 삼았지요 피둥피둥 살 바에는 차라리 불판 위에 올라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요 육질이 선명할수록 사상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요 달아오른 불판이 멀리 쏘아 올리는 기름은 발가벗은 내 탄식이었지요 ​ 몸 뒤틀리고 몇 번쯤 뒤집혀지고 나면 (제발, 세 번 이상은 뒤집지 마세요) 내 사명도 끝난 줄 알았지요 노릿하게 그을린 얼굴들이 참기름을 두르고 앉아 마늘처럼 맵게 미소를 주고받을 때 소원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저 말라비틀어진 살점들을 어찌할까요 ​ 어쩌다 간혹 안부나..

좋은 시 2022.02.23

꽃밥/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 ― 엄재국, 〈꽃밥〉 전문 ​ 담양에서 태어났지만 갓난아이 때 이사 온 후 쭉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는 풍경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게 전부. 당연히 가마솥 밥을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 시의 매력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밀어 넣어봅니다. 불이 붙은 나무에서 함빡함빡 목단, ..

좋은 시 2022.02.22

싹튼 양파들 / 조말선

싹튼 양파들 / 조말선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 신호음을 들었다 나는 한번 시도한 일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한번 들어선 길은 돌아갈 줄 몰랐다 뚜, 뚜, 뚜, 뚜 듣지 못할 응답이 나에게로 돌아와 꽂 혔다 차창 밖으로 발개진 꽃잎들의 통화가 소란스러워졌다 세상는 모 두 통화중이었다 나는 나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안에 통화중 신 호음이 가득 차올랐다 귓바퀴가 수백 다발의 코일을 빨아들였다 나는 나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 간 거야. 나는 나의 응답을 찾지 않았다 나는 고독해졌다 나는 팽창했다 귓속에서 입이 찢어졌다 백년은 늙은 내 입 속에서 푸르른 말들이 나를 겨냥했다 조말선: 1965년 경남 김해 출생 1998년 으로 데뷔 시집: 소통되지 않는 전화와 ..

좋은 시 2022.02.21

신춘문예평론

1. 몸의 기억에 부여되는 리얼리티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쩌면 예술이 끝자락에 도달해 있고 이제 “규정 불가능성”(하이데거)에 빠진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현대는 예술 과잉의 시대이자 ‘무(無)예술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헤겔이 비유한 것처럼, 이제는 예술이 인간의 비대해진 욕망을 더는 채워 줄 수 없다는 “예술의 종언”을 증명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쓰고 읽는 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현대성과 서정성이 미학적으로 반목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은 이분법적 폐쇄성이 낳은 관념적 산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의 속성을 탈(脫)서정성에 두려는 해체적 사유는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현대성과 서정성은 대척적 개념이 아니라..

평론 2022.02.21

변명과 거짓말, 그리고 새벽 4시 / 노경실

변명과 거짓말, 그리고 새벽 4시 / 노경실 남동생 부부와 사는 엄마와 나누는 아침 통화.. 나는 문안인사 뒤, 늘 같은 질문을 한다. "오늘은 어땠어요" "오늘도 울고 갔지." "오늘은 왜요?" 그때마다 엄마의 답은 다양하다. '머리 모양 마음에 안 든다고', '반지 끼고 간다고', '비 오는데 구두 신고 간다고', '체육복 입고 오라는데 원피스 입고 간다고', '팔찌를 두 개나 차고 간다고', '밥 먹기 싫다고', '졸리다고', '괜히 짜증을 내고.' 6살이 된 조카, 채원이는 날마다 날마다… 어린이집 버스를 타기 전까지 할머니와 제 부모를 뒤흔들어놓는다고 한다. 공주 되는 게 꿈이라는 어린아이 앞에서 팔십 인생을 살고 있는 백발과 청청한 마흔 초반의 두 사람이 절절매는 것이다. 단지 그 아이가 울며..

좋은 수필 2022.02.21

도마소리 / 정성화

도마소리 / 정성화 함성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다각다각' 하는 소리가 끼어들고 있었다. 도마소리였다. 잠결에 듣는 소리는 가까이 들리는 듯하다가 다시 멀어진다. 그래서 아련하다. 윗동네의 예배당 종소리나 이른 아침 '딸랑딸랑' 들려오던 두부장수의 종소리, 도마 소리가 그러했다. 어머니는 소리로 먼저 다가오는 분이었다. 펌프질을 하는 소리, 쌀 씻는 소리, 그릇을 챙기는 소리 등. 그 중 도마소리는 잠을 더 자라고 토닥여주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이불 삼아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다. 한 스무 평밖에 되지 않는 집이었다. 부엌이 집 가운데에 자리하고 양쪽으로 방이 붙어있는 ㄷ자 구조의 집이라 부엌에서 나는 소리와 냄새는 어느 방으로든 이내 전해졌다. 도마소리가 잠잠해지고 '보글보글' '자글..

좋은 수필 2022.02.21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겨울에는 불광등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상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께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에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 봄 한 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 본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좋은 시 2022.02.20

대통밥 / 이정록

대통밥 / 이정록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좋은 시 2022.02.20

새해라서 당신/전영관

새해라서 당신/전영관 붙박이장처럼 완고해서 당신을 숨막히게 했다 채칼 같은 단호함을 명쾌함이라며 타협도 없는 일곱 살마냥 우쭐거렸다 고장난 전기주전자여서 그칠 때를 찾지 못하고 불안하게 했다 후춧가루만큼 예민한 성격을 자상함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떨어뜨린 소금 그릇처럼 강퍅으로만 악화시켰다 가득찬 쓰레기통 속 나태를 머뭇거림의 매력으로 둔갑시켰다 내심 반성하면서, 부러워하면서 도마만큼 자명한 타인의 결단들을 무모함이라 빈정거렸다 냉동고같이 외골수로 지겹게 했다 깨진 간장 항아리로 쓰러져 당신의 통곡이 응급실을 채웠다 가족이란 천막 안에서 당신을 막막하게 했다 무관심을 고부 관계의 중립이라 착각했다 사위 노릇을 손님인 척하는 것으로 알았다 눈치 없음을 시라는 몰입의 부작용이라고 방심했다 동그란 뒷모습에서 ..

좋은 시 2022.02.19

부왕산터에서/전영관

부왕산터에서 기단도 버젓한데 기둥 없다고 기와가 스러졌다고 공간까지 무너진 건 아닙니다 바람은 누대의 습성대로 추녀에 달려 있던 쇠붕어를 찾습니다 잔해를 헤치고 마루판까지 뜯어간 산촌 필부들도 쉽게 아궁이에 던지지는 못했을 일입니다 사천왕이 출타 중이니 승병인 양 불두화가 법당 협시를 지속합니다 동지까지는 달포도 남지 않았는데 초록 발심(發心)을 견지합니다 나의 문장은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긋습니다 구름이 백운대 이마를 훤하게 씻어놓았습니다 터라는 어휘는 과거형이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감이기도 합니다 종결과 착수가 맞물리는 11월 폐업과 개업이 하나의 화환에 나란한 문구로 걸린 11월 끝까지 폐허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도 있음을 부언하지 않겠습니다 (전영관 시..

좋은 시 2022.02.19

약속도 없이/전영관

약속도 없이 전영관 하룻밤 물에 불린대도 멥쌀의 찰기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 같아 찰밥 해드려야 안심이지 싶은 사람 하나 있다 수수꽃다리가 조청만큼 달달하니 서둘러 왔는데 늦었다 해도 넘겨줄 수 있겠다 찬 없는 두레상에 모셔도 결례는 아니려니 어스름 무렵에야 찹쌀 뼈가 다 무르면 만월과 겸상으로 올려드리련다 비린 것 한 토막을 앞으로 밀어놓고 잔가시 없는 등 쪽으로 떼어드리련다 숭늉 권하는 동안도 꽃은 피고 봄은 뜸 들고 여름을 당겨올 것처럼 눈빛이 짙어지리라 창밖으로 만발한 이팝나무 숭어리가 보인다 바람으로 씻고 늦은 안개에 불려 헛밥이나 짓는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봄을 다잡아보려 찰밥이라 고집 부리는 것이다 내 것인지네 것인지도 모르게 뒤엉겨 어쩔 수 없으니 주저앉자고 생떼라도 써볼 사람을 기..

좋은 시 2022.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