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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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풍추수(春風秋水)로 가는 글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박양근

춘풍추수(春風秋水)로 가는 글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박양근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터키의 시인 (1902-1963) 명문장의 종착지점은 있는가. 그것에 다다르면 순결한 영혼에 덕지덕지 붙은 굳은살을 벗겨지련만. 원래의 심성으로 돌아갈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명..

수필 이론 2022.02.10

벼랑에 핀 꽃 / 고경서(경숙)

벼랑에 핀 꽃 / 고경서(경숙) - 굳게 닫힌 시간의 수문을 열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지나고, 빈 원두막을 돌아 오솔길로 접어들면 솔향기가 먼저 달려들었다. 밀밀한 솔밭에서 젊은 아버지는 걸음이 느렸고, 나는 펄쩍펄쩍 뛰어가도 자꾸만 뒤처졌다. 그 길을 벗어나면 저수지가 나왔다. 저수지 양옆으로 바다를 밀어낸 해안선과 갈대를 품은 늪지가 있었다. 그 사이를 차지한 방죽이 우리가 즐겨 찾던 낚시터였다. 저수지 수문이 열리는 날이면 아버지는 발목까지 찬 물속에서 낚시를 하셨다. 석축 틈새는 뱀장어들의 은신처였다. 거름더미에서 파낸 지렁이를 일 미터 남짓한 댓살 끝에 미끼로 달았다. 소쿠리 안에는 내 손목보다 굵은 뱀장어들이 뒤엉켜 똬리를 튼 채 미끌미끌한 점액질을 게워냈다. 긴 등짝에 새긴 흑갈색무늬가 선..

좋은 수필 2022.02.10

돌매 / 류영택

돌매 / 류영택 콩콩 마늘을 찧는다. 아래층에 소리가 울릴까봐 사타구니에 백철절구를 끼고 마늘을 찧는다. 절굿공이에 빗맞았는지 메뚜기처럼 마늘한쪽이 절구를 타고 넘는다. 어디로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는다. 겨우 손이 닿았지만 슬슬 짜증이 난다. 믹스기로 갈면 될 텐데 굳이 절구에 찧어달라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어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 보듯 두 눈을 치켜뜬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것 같다. 나는 반항이라도 하듯 쿵쿵 공이를 내리찧는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믹스기로 갈면 편하잖소!" "찧는 것과 가는 게 같아요!" 아내의 말에 뚱한 표정을 짓지만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 말마따나 불린 콩을 믹스기에 가는 것은 ..

좋은 수필 2022.02.09

맷수쇠/정원정

맷수쇠 정원정 한낮이다. 길가 목 좋은 모퉁이에 벌여놓은 보자기가게坐商에 들렀다. 무 하나, 애호박 두 개를 사 들고 쉬엄쉬엄 오는 길에, 어찌나 걸음걸이가 팍팍하던지 길녘 벤치에 앉았다. 맞은 편, 눈부시게 하얀 아파트 한끝에 머문 시월막사리 하늘은 푸른빛이 깊다 못해 왕연旺然한 반물빛이다. 지난겨울, 이사한 집의 묵은 때를 벗기느라 힘이 들었다. 그 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정형외과에 가 보았더니, 엑스선 사진을 살펴본 의사 설명인즉 걸어가다 쉬고 싶을 거라며 척추골 네 개가 협착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게, 어느 시인이 어머니 말투를 빌린 시구에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하듯 나도 그랬던가 보다. 척추는 저뭇한 세월에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끈끈한 묵은 정으로 몸 매무시를..

좋은 수필 2022.02.09

풀매 / 신정애

풀매 / 신정애 두 개의 행성이 맞물려 돌아간다. 드르륵 드르륵! 어처구니를 잡은 손등 위로 더운 김이 솟아오른다. 밖엔 눈이라도 내리는지 소란하던 사위가 고요하다. 미열로 시작된 감기에 잣죽이 좋다며 엄마가 풀매를 돌린다. 따뜻한 방 안에는 어린 내가 누워 있고 대청마루에 그린 듯 앉아있는 엄마의 치마폭에서 솔향기 같은 잣 냄새가 난다. 유년 시절에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흐르던 콧물로 코밑은 성할 날이 없었다. 환절기가 되면 편도부터 부어올라 밥보다 죽을 먹은 기억이 더 많다. 뽀얗게 불린 찹쌀과 잣을 풀매에 곱게 갈아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이면 온 집안에 잣 향기가 아늑하게 퍼졌다. 엄마는 남은 찹쌀가루로 작고 동글납작한 녹두전이나 찹쌀전병을 만들었다. 그 위에 꿀을 듬뿍 뿌려 ..

좋은 수필 2022.02.09

맷돌/주인석

맷돌/주인석 눈이 보살이다. 친정 뒷마당 응달에 측은하게 머리를 박고 있는 맷돌을 발견했다. 박박 얽은 피부에는 집 밖에 산 고생의 흔적으로 이끼가 군데군데 나 있다. 음식 한 번 제대로 못 얻어먹어 그런지 아가리에는 백태처럼 흙이 끼였다.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아랫돌과 윗돌이 껴안고 있는 모습이 왠지 사람 같아 가엽기 그지없다. 비가 올 때마다 튀어 오른 흙덩이가 곰보 자국에 붙었고 거기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끼가 뿌리를 내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전을 폈다. 편리한 믹서기를 두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어머니는 잔사설이 많았지만 그런 소리보다 내 마음이 더 앞섰다. 어머니는 구경만 하시라 큰소리치며 옛날 기억을 떠올려 남편과 나는 어설픈 두부 만들기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에 맷돌로 곡물 가는..

좋은 수필 2022.02.08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 ​ 도르르 말려 있는 꽃봉오리 마음을 닮아 연분홍인데 설레는 가슴 피어보면 아무도 보지 않는 서러움에 하늘을 좇아 파란색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작은 꽃 가슴 한가운데엔 그래도 버릴 수 없는 노란 꿈을 부여안고 실바람에도 꽃마리 가로눕는다 ​ ​ 선선하니 서그러운 분초록 몸매 수수하니 수줍은 보랏빛 얼굴 누군들 원해서랴만 누추한 곳이라도 깔끔하니 끌밋하다 꿋꿋한 여인 하늘을 짝사랑하여 쪽빛으로만 살고프나 몸 속 뜨거운 피는 놔두지 않아 달빛 아래 시퍼런 칼 어제도 갈았구나 흐트러진 심사 오늘도 가다듬네 세 장 바깥 잎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세 장 안 잎은 손 모아 기도하네 언제 어느 곳에 어떻게 살더라도 하늘이여 비옵나니 헛된 욕심 버리고 청초한 숨결로만..

좋은 시 2022.02.08

속수무책 / 김경후

속수무책 / 김경후 내 인생의 단 한 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척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 절벽에 가서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 산다는 것, 속수무책의 페이지들을 읽어 내려간다는 것. 대책도 없이 대책을 모색할 시간에 속수무책의 페이지들이 넘어간다. 타들어간 꽁초들과 함께,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을 지나 진흙참호 속을 지나 당신은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바다절벽으로 향한다. 속수무책, 이것이 당신이 세운 유일..

좋은 시 2022.02.08

노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은/황진숙

노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은/황진숙 병원 대기실에서 코로나 백신을 맞으려는 방문객에게 문진하기 바쁘다. “최근 14일 이내 백신 안 맞으셨어요?” “그러믄유.” “백신 접종 후 알레르기 반응 나타난 적 있으세요?” “아이, 그런 거 없어유. 골치 아픈께 물어보지 마유. 여기 노다지 다니는 사람인데유.” 만사가 귀찮다는 듯 창수씨는 쇳소리로 되받아친다. 수액실에서는 간난씨가 소리를 지른다. “아이고, 사람 죽이네. 큰 바늘로 찌르니까 아프잖어.” 작은 바늘이라고 설명하는 간호사의 말에도 간난씨는 병원이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인다. “워매, 누가 모를 줄 알고. 내가 큰 병원 다녀봐서 다 알어. 어디서 그짓말이여.” 수액이 들어가자 겨우 진정이 된다. 세월을 먹은 당신은 이방인 차지다. 혈압 당뇨가 불침번을..

발표작 2022.02.07

생각 따로 말 따로 / 홍혜랑

생각 따로 말 따로 / 홍혜랑 학기말이 되면 자신의 학점이 생각했던 것보다 덜 나왔다고 문의하는 학생이 간혹 있다. 학생의 짐작이 맞다. 특히 주관식 서술형이 아닌 외국어의 경우는 시험 본 당사자의 채점이 어지간히 맞아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딴 사람들이 시험을 잘 보면 본인의 점수가 내려가고, 딴 사람들이 시험을 못 보면 본인의 점수가 올라간다'는 상대평가의 성적 산출 근거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설명을 듣고 난 학생은 체념이 빠르고도 명료하다. 그럴 적마다 마음이 우울한 건 오히려 내 편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상대적 경쟁의 터널을 지나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상대평가라는 잣대는 그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핸드폰의 존재만큼이나 친숙하고도 당연한 것 같다. 나의 능력, 나의 노력대로가 아니라..

좋은 수필 2022.02.07

분이/김아가다

분이/김아가다 곱다. 꽃 속에 파묻힌 어머님이 웃고 계신다. 향년 100세. 상객들이 모두 호상이라면서 웃고 떠들썩하니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너도나도 망자와 얽힌 추억을 회상하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사진 속을 걸어 나온 어머님이 기웃거리며 자손들 이야기에 참견하고 다니시는 듯하다. 무연히 타고 있는 향불 연기 속에서 이태 전의 일이 떠오른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께 생신을 축하드린다면서 꽃바구니를 안겨드렸다. “오늘이 이월 열사흘이냐?” 그 말씀에 깜짝 놀랐다. 머리끝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간간이 정신 줄을 놓으시더니 자식도 못 알아보고, 아득한 과거 속으로 묻혀 지낸 지 오래되었다.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보는 처지에 생일의 기억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월 열사흘은 어머님께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한 ..

좋은 수필 2022.02.04

놋그릇/서소희

놋그릇/서소희 놋그릇을 닦는다. 거친 수세미에 모래를 묻혀 서걱서걱 소리가 나게 문지른다. 온몸에 앙금이 되어 까맣게 붙어 있는 세월의 흔적을 벗겨낸다. 검은 녹이 흩어지며 표피가 오래된 침묵을 밀어낸다. 저 작은 물건이 삶의 고달픔을 검은 녹으로 껴입고 있었던가 보다. 사지를 포박하며 피어났던 푸른 녹이 겹겹이 쌓여 꺼멓게 될 때까지 놋그릇의 운명도 묶여 버렸는지 모른다. 새삼 아무 꾸밈없는 소박한 물건이 한 세상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한참 만에 광택을 잃은 그릇의 표면이 거친 물질에 의해 땟자국을 벗어갔다. 우악스러운 손놀림만으로 누런색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다. 녹이라는 것은 몸의 한 귀퉁이와 함께 헐어내야만 사라지는 것인 모양이다. 시간의 흔적을 헐어낸 자리에는..

좋은 수필 2022.02.04

둑길/함명춘

또 갈 곳 잃어 떠도는 나뭇잎이랑, 꼭 다문 어둠의 입속에 있다 한숨처럼 쏟아져 나오는 바람이랑, 상처에서 상처로 뿌리를 내리다 갈대밭이 되어버린 적막이랑, 지나는 구름의 손결만 닿아도 와락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별이랑, 어느새 잔뿌리부터 하염없이 젖기 시작하는 풀잎이랑,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나무 없인 잠시도 살 수 없는 듯 어느 결에 맨발로 내려와 둑길을 걷는 달빛이랑 ㅡ함명춘(1966-- ) 책의 옛 사진을 보다가 지금의 내 사는 동네를 만나 반가웠습니다. 반쯤 부서진 살곶이 다리 풍경이었는데요, 돌다리 저편 뚝섬 언덕 위가 아름다운 ‘둑길’이었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곡선으로만 이어진 그 생명 가득한 길 위에 어린아이들이 노는지 걷는지 아득한 몇 점으로 보였는데 보나마나 신이 났겠습니다. 그 둥긂..

좋은 시 2022.02.04

헛글 / 황선유

헛글 / 황선유 ‘나’는 실재의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입니다. 나는 진실의 인물이 아니라 허위의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가상으로 허위로 쓰는 글로 이른바 헛글이죠. 그렇다고 실존과 진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니 누군가 이 헛글의 행간에 웅크린 참나를 찾아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 안 해도 그만이지만요. 십이월 치고는 포근한 한 날의 저녁 어스름에 강둑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곳을 ‘강둑길’이라니 대번에 거짓임을 눈치채겠지요. 대놓고 거짓이니 글쓰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나는 무언가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는 당위의 심정으로 이즈음 안팎으로 머리를 죄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떠올려진 것들이 잠시 가을 하늘 고추잠자리처럼 머릿속을 선회하다가 일제히 한 곳으로 응집됩니다. 손에 들고 있던 스타벅스 커피의..

좋은 수필 2022.02.03

황홀한 노동/송혜영

황홀한 노동 / 송혜영 그들이 왔다. 긴 머리를 야무지게 뒤로 묶고 왼쪽 귀에 금빛 귀걸이를 해 박은 대장을 선두로 그들은 우리 마당에 썩 들어섰다. 젊은 그들이 마당을 점령하자 이끼 낀 오래된 마당에 활기가 넘쳤다. 대장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재며 장비를 풀어놓았다. 그리곤 진군하듯 헌 집을 접수해 나갔다. ‘두두둑’ 오랜 세월 소임에 충실했던 노쇠한 양철지붕이 끌려 내려왔다. 이가 빠진 창문도 급히 몸을 빠져나왔다.. 제 구실을 못한 지 오래된 굴뚝이 뭉개졌다. 마당 가득 유월의 때 이른 폭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로, 귀 뒤로, 싱싱한 뒷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셔츠의 등판은 금세 땀에 젖어 몸에 척 들러붙었다.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무더위가 내 탓인 것만 ..

좋은 수필 2022.02.03

빈집에 대한 시

빈집 / 복효근 ​ 큰딸 집에 간 할머니 지난 겨울 죽은지도 모르고 마당엔 동백꽃이 한창 ​ - 복효근,『꽃 아닌 것 없다』(천년의시작, 2017) ​ ​ ​ ​ 빈집 / 이상국 ​ 박정희 때 이은 슬레이트 지붕이 마분지처럼 낡아 바람에 미어질 것 같은데 삭아 테두리만 겨우 걸린 도라무깡 굴뚝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집을 보고 있다 ​ -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 1998) ​ ​ ​ ​ 빈집 / 고광헌 ​ ​저 산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이쁘다 ​ 저 빈집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눈물난다 ​ - 고광헌, 『시간은 무겁다』(창비, 2011) ​ ​ ​ ​ 빈집 / 기형도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으로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

좋은 시 2022.02.02

감성어 낚시 / 고경서

감성어 낚시 / 고경서 불 꺼진 방 안은 심해를 방불케 한다. 한낮의 쪽빛 바다를 여러 번 덧칠한 듯 검은 색채를 띤다. 자정이 지났으나 파도 소리에 뒤척이는 잠을 열고 문밖으로 나선다. 캄캄한 어둠을 끌어다 덮은 바다도 잠들지 못한 채 출렁거린다. 심연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 이곳은 대뇌라는 바다다. 리아스식 해안처럼 들쭉날쭉한 전두엽의 해역이다. 먼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는 생의 해류를 타고 이동해가는 욕망의 바다, 이를테면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생각이나 기억 따위가 유영하는 황금어장인 셈이다. 나는 감성 낚시를 한다. 아니 감성어 출조에 나선다. 시각과 청각, 후각이 가장 예민하다는 '바다의 제왕'을 포획할 참이다. 슬픈여*가 마주 보이는 해안에 포인트를 잡는다. 갯바위에 몸을 앉..

좋은 수필 2022.01.29

손/최장순

손 / 최장순 골똘히 생각을 받치고 있는 저쪽이 클로즈업된다.. 저 손은 지금 아득한 고민을 감당하고 있을까. 탁자의 찻잔은 이미 식은 듯하다. 문득, 생각을 괴었던 나의 손을 내려다본다. 손을 잡아준 따스함 덕분에 나는 고민을 내려놓은 적이 있다. 인간은 섬세한 손을 가졌다. 원숭이의 손이 인간과 닮았다지만, 세밀한 움직임은 따라올 수 없다. 원숭이의 두 손이 네 발의 일부라고 생각해 볼 때, 온전히 손의 역할만 감당하는 인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엄지가 짧아 다른 손가락 끝과 합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외부의 뇌’로 불릴 만큼 뇌의 가장 큰 지배를 받는 운동기관이자 감각기관인 손. 먹이를 사냥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온갖 감정을 표현하지만, 가만 살펴보면 손은 여러 의미를 집..

좋은 수필 2022.01.29

시장을 품다 / 김정화

시장을 품다 / 김정화 삶에 지칠 때 시장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그곳에서 퍼덕이는 물오른 생선과 상인들의 힘찬 목소리에서 잃었던 활력을 얻는다. 뿌리째 탄탄한 푸성귀를 고르고 뜨끈한 장터국밥 한 그릇 먹으면 시들했던 삶에도 생기가 돋게 된다. 우리 동네는 바닷가라서 배릿한 해변시장도 있고 오래된 담장을 끼고 사시절 골목시장도 열린다. 틈을 내어 버스라도 타면 역전시장에도 가고 도떼기시장이라 부르는 국제시장도 닿고 구제품이 즐비한 깡통시장까지 구경한다. 해변시장은 갈치와 꽃돔과 꼼장어가 얼음판 위에 버티고, 골목시장에는 아직도 맷돌을 돌려 콩물을 내리며, 명절이면 뻥튀기 기계를 돌려 쌀강정을 만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어디 그뿐인가. 돼지껍데기가 쥑이는 집도 있고 서울 사람도 알아주는 부산 오뎅집도 반기..

좋은 수필 2022.01.29

잠의 종류

잠의 종류 갈치잠, 발칫잠, 칼잠, 봉놋잠, 새우잠 ​ 장소 문제로, 즉 공간이 좁아서 제대로 편하게 자지 못하는 경우를 묘사한 말들이다. ​ 갈치-잠 명사 / 비좁은 방에서 여럿이 모로 끼어 자는 잠. 좁은 방 한 칸에 열두 명이 자려니 어쩔 수 없이 모두 갈치잠을 잘 도리밖에 없었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갈치라는 생선이 길고 좁기 때문에, 아마도 이런 외형의 특징을 빗대 만들어진 낱말일 듯하다. ​ 발칫-잠 발음 [ 발치짬 ] [ 발칟짬 ] 명사 / 남의 발이 닿는 쪽에서 불편하게 자는 잠. 발칫잠을 자다. 어려서부터 길러 내듯이 보아 오던 문희니 발칫잠쯤 재우는 것이 싫을 것은 없었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발칫잠’은 대개 경험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씩은 발칫잠을 ..

향기로운 글 2022.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