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86

시간은 어떻게 껍질을 벗는가 / 최민자

시간은 어떻게 껍질을 벗는가 / 최민자 비닐하우스 위로 운석이 떨어졌다. 장갑을 낀 지질학자 몇이 수상한 돌덩이를 조심스레 거둬 갔다. 극지연구소의 분석 결과 그날 진주에 떨어진 두 개의 암석은 별에서 온 게 확실하다 했다. '별에서 온 그대'는 하늘의 로또라,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귀하신 몸이어서 뉴스를 접한 사람들마다 자다가 떡 얻어먹은 하우스 주인을 대박이 터졌다며 부러워했다. 올여름, 나도 대박을 터트렸다. 내 집에도 별 그대가 당도한 것이다. 친견 일자를 통보받고부터 내도록 가슴을 설레며 기다렸다. 어느 별에선가 성운에선가 새로 출시되어 배송되어 온 특허품은 엄정하게 말하면 '메이드 인 헤븐' OEM인 셈이다. 3년 전쯤 지구별 모퉁이에 M&A로 설립된 합작공장에서 처녀 생산된 하청품인 바, 식..

좋은 수필 2021.12.27

길 위의 할머니들 / 정희경

길 위의 할머니들 / 정희경 내가 사는 동네에는 벌거벗은 가게가 몇 곳 있다. 간판도 없고 커다란 유리벽도 없고 계산대도 없고 심지어 출입문조차도 없다. 횡단보도의 양 끝자락이나 버스 정류장 옆, 길이 휘어지는 모퉁이에 보자기만 한 가게들이 온종일 그림처럼 앉아 있다. 그 가게에는 끝없는 행인의 발길이 이어진다. 출퇴근길이나 약국에 가거나 정육점에 가거나 혹은 천 원 김밥집으로 가기 위해서 그곳으로 온다. 그저 지나가기 위해서. 발길들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물결처럼 무심하다. 가게들의 주인인 할머니들은 그 끝없는 변화와 흐름에도 아랑곳없이 밑바닥에 단단히 박혀 강물을 지키는 자갈 같다. 내가 한 점 물살처럼 거리로 흘러나왔을 때 할머니는 벌써 어디로부턴가 나와서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손수레에..

좋은 수필 2021.12.26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 김태경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 김태경 솜 죽은 핫이불에 멀건 햇빛 송그린다 골다공증 무릎에도 바람이 들이치고 재봉틀 굵은 바늘이 정오쯤에 멈춰있다 문 밖의 보일러는 고드름만 키워내고 숄 두른 굽은 어깨 한 평짜리 가슴으로 발틀에 하루를 걸고 지난 시간 짜깁는다 신용불량 최고장에 묻어오는 아들 소식 호강살이 그 약속이 귓전에 맴돌 때는 자리끼 얼음마저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감치듯 휘갑치듯 박음질로 여는 세밑 산타처럼 찾아주는 자원봉사 도시락에 그래도 풀 향기 실은 봄은 오고 있겠다

좋은 시 2021.12.25

대바구니에 빛살 담듯/이가은

대바구니에 빛살 담듯/이가은 습작하는 불면은 살아 있음의 확인이다 빗장 굳게 잠글수록 흔들리며 타는 갈증 끝없는 미로 속으로 가물가물 잠긴다 엉겅퀴꽃에 달라붙는 진딧물 저 진딧물 나만이 만질 수 있는 끈적이는 언어들로 웅크린 세상의 날을 무디게 할 순 없을까 성긴 바람 다독이며 촘촘히 엮은 소망 대바구니에 빛살 담듯 줄줄이 샐지라도 더러는 강물에 찰방찰방 은비늘로 뜨고 싶다

좋은 시 2021.12.25

막사발/이남순

막사발/이남순 왜바람과 맞서느라 금이 간 허리 안고 이저리 차이다가 이 빠지고 살 터진 채 이름도 개명을 했다, 꼼짝없이 '이도 다완' 선비들의 찻상에도 의젓하게 올라갔고 비가 새는 난달 부엌 흙바닥에 엎드려서 저 백민 간당한 목숨도 숨죽이며 지켜봤다 장독 위에 별을 띄워 정화수 받아 놓고 퇴락한 왕조 앞에 그래도 살아보자고 어쩌다 비겁한 목숨도 그렁그렁 달래었다 개밥그릇 냉가슴도 참을 말이 따로 있지 분에 넘친 대접하며 기고만장해 봤댔자 우리네 도공 품에서 주먹 쥐고 태어났다

좋은 시 2021.12.25

컵/조경선

컵/조경선 옆에 놓여 있는 컵이 하나여서 다행입니다 나도 그 감정이어서 다행입니다 둥글다는 것은 입술을 편하게 하고 일정하게 맛 들여진 곡선의 촉감들은 손끝으로 읽어 주고 싶어집니다 뜨거운 차를 수십 번 입에 댔다 떼는 사이 외풍이 옆자리를 떠올리다 스스로 식어지곤 해요 양손을 떠받힌 사기그릇이 처음부터 뜨겁지는 않아요 홀로 급하게 먹어 치우는 점심이 갈증을 불러와도 한 번에 들이키면 기억까지 데이고 말죠 매번 불투명한 속에 얼굴을 채워도 내 얼굴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요 살다보면 컵 속의 가라앉은 자들이 얼굴을 내밀지요 뜨겁고 차갑고 쓰고 달착지근한 입김들이 바닥에 엎드려 눌러 붙어 있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컵 밑은 이유 없는 생채기로 흔들렸어요 컵하고 발음하고 나면 상처도 저 혼자 아물 것 같아..

좋은 시 2021.12.24

꽃사과 꽃이 피었다/황인숙

1. 한국시단의 독특하고 경쾌한 상상력, 황인숙 시인의 자선 대표시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는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고,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 등을 수상한 황인숙의 첫 시선집이다. 1988년부터 2007년까지 30년간 황인숙 시인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시집들에 수록된 시들 중 시인이 가려 뽑은 시선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에는 발랄하고 경쾌한 상상력을 통해 사물에 아름다움을 불어넣어주는 황인숙 시인 특유의 깔깔거림과 쓸쓸함의 시어들로 가득 넘친다. 시인은 일상과 사물에 부여된 낡은 옷과 생각을 벗기고 새로운 옷을 입히며 답답한 현실을 새로움의 충동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리하여 시인의 통통 튀는 개성적인 문체와 ..

좋은 시 2021.12.24

배꼽 / 황영선

배꼽 / 황영선 언제쯤이면 엄마라는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배꼽 부위가 떫은 감 하나가 떨어져 나간 자리 같이 아릿하다. 가만히 손을 뻗으면 만져지는 몸의 중심 자리인 그곳. 두 손 모으면 자연스레 그곳에 손이 가닿는다. 그곳은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또 자식에게로 보이지 않는 길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곳이다. 종착역인가 하고 돌아보면 그곳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점이었다. 탯줄을 끊고 배꼽을 묶었던 어린 딸아이가 작년 여름, 제 아비를 꼭 닮은 사윗감을 소갤 시키더니, 날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어미와 자식으로 몸이 분리된 지는 오래 되었지만, 지금껏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채 살아왔나 보다. 딸아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어미가 딸을 떼어내지 못해 분리 불안증이 생긴 모양이다. 딸을..

좋은 수필 2021.12.24

숟가락 이야기 / 류미월

숟가락 이야기 / 류미월 몸이 지쳐 힘들 때 뜨거운 죽이나 국물을 휘휘 훌훌 떠먹다 보면 힘이 솟는다. 기운을 북돋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도구가 숟가락이다.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노숙자든, 연예인이 든, 기업 총수든, 아니면 최고위 권력자는 신분과 직업에 관련 없이 밥을 먹을 때는 누구나 숟가락을 사용한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 금수저나 은수저뿐 아니라 놋수저도 찾기 힘들다. 보통 우리네 밥상에 오르는 것은 스테인리스 숟가락이다. 최근에는 수저에 계급론이 불거져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 금수저들이 갑질을 하는 오만함을 접할 수 있고 금수저나 은수저로 태어나지 못 한 흙수저들의 가슴 시린 애환도 종종 등장한다. 숟가락은 흥겨울 때는 밥상을 두드리는 타악기가 된다. 작거나 큰 밥상에 둘..

좋은 수필 2021.12.24

달달한 자궁 / 피귀자

달달한 자궁 / 피귀자 칼맛을 보더니 더 독해진 걸까. 날 선 칼을 튕기며 길을 내주지 않는 단호박. 남반구의 강렬한 햇빛이 키운 완강한 근육을 진작부터 알아봤지만 이리 돌 같을 줄이야. 칼의 길을 더 이상 용납 않는 호박과의 씨름이 낭패스러웠다. 겉가죽이 검푸른 단 호박 한 덩이를 샀다. 작은 크기에 비해 묵직한 뉴질랜드산 호박이다. 깨끗한 공기와 끝없이 푸른 들판을 머금은 환경은 직접 보기도 했지만 숨긴 속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먼 길을 돌았어도 상처 하나 없이 암팡지게 내려앉은 모습이 유장하기까지 하다. 말쑥하게 목욕시키고 식초 단장까지 마친 후 자르려고 칼을 넣었다. 처음부터 이가 약한 세라믹 칼을 들고 설친 게 실수였다. 칼끝을 날리고서야 겨우 빼내고 무쇠 칼로 바꾸었다. 쇠 칼날을 물..

좋은 수필 2021.12.21

파도에 너울거리는 비릿한 것들/마경덕

파도에 너울거리는 비릿한 것들 짜고 비릿한 것들이 내 기억 속에서 출렁거린다. 녹슨 양철지붕을 흔들던 사나운 바람 소리, 갯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 수정처럼 맑은 물의 뼈들, 길게 뱃고동을 울리며 장군도를 지나가던 여객선, 아득히 수평선 너머로 멀어지던 통통배 소리, 끼익끼익 적막한 밤바다를 헤집는 노 젓는 소리ⵈ 모두 바다의 숨소리였다. 밤바다는 내 머리맡까지 밀려와 철썩거렸다. 지척에 있는 장군도에 해마다 벚꽃이 피고 홀로 봄이 다녀갔다. 사람이 살지 않던 장군도는 급류가 흘러 가깝고도 먼 섬이었다. 마을 아낙들이 장군도까지 씨알 굵은 조개를 캐러 가다가 거친 물살에 배가 뒤집혀 죽을 뻔했다고 숙모는 몸서리쳤다.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우리 마을은 술병, 화병(火病)에 골병들고 노름과 폐병으로 가..

좋은 수필 2021.12.19

사람 지나간 발자국/이경림

사람 지나간 발자국 사람 지나간 발자국 이경림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이경림(1947∼) 사랑시에서 고독은 좋지 않은 것이다.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마주 보는 둘이 있어야 하니까, 홀로 있는 고독이 좋을 리 없다. 고독한 연인은 이별 앞의 연인이다. 혼자서 하는 사랑은 슬픈 사랑이다. 그렇지만 사랑시를 제외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시와 고독은 오래전부터 유명한 짝꿍이었다. 슈타이거라는 이론가가 정리하기를, 서정시는 대체로 고독의 공간을 다룬다고 했다. 혼자 고요히 앉아, 삶과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분명 ‘시적인 시간’이다. 이것이 단 오 분이라도 주어지면 우리는 좀 충..

좋은 시 2021.12.19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피재현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피재현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 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 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톱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울었다-피재현(1967∼) 시를 읽으러 오신 분들은 모두 시의 손님이다. 손님께는 물 한 잔이라도 정성껏, 맑은 차라도 계절에 맞게 드리는 법. 그래서 봄에는 꽃과 나비의 시를, 겨울에는 흰 눈과 쓸쓸함을 준비하곤 했다. 그러니 오늘, ‘별이 빛나는’ 시를 준비한 것이 어색하지 않다. 늦게까지 별을 올려다보는 계절은 여름날이니까. 나아가 감나무 이야기를 준비한 것도..

좋은 시 2021.12.19

낙타가시나무 / 김삼복

낙타가시나무 / 김삼복 매번 낯선 길이다. 여러 겹의 얼굴을 가진 사막 안, 밤새 돌개바람이 별빛을 뿌렸는지 다져놓은 발자국은 노란 모래로 덮여 있다. 꾸역꾸역 마른 바람이 나를 떠민다. 엊그제 살짝 삐끗한 발목이 시큰거린다. 내가 들어가는 곳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 한복판, 사구 위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건물 속이다. 그 속에서 온종일 길을 찾고 먹이를 구하려 서먹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목에 사원증을 걸고 컴퓨터를 보며 일하는 그들 또한 먹이를 벌기 위해 주눅 든 사막여우들이지만 나에게는 고객님이시다. 잘 차려입은 여직원 손에 구수하게 내린 커피가 들려 있다. 아침 식사를 커피로 대신하는 그녀에게 식사 대용 전단을 주었다. 커피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눈길 한번 없이 새침하다. 숙취로 눈이 빨간..

좋은 수필 2021.12.18

각시붕어에게 쓰는 편지/윤영

각시붕어에게 쓰는 편지/윤영 각시붕어에게 쓰는 편지장맛비가 사나흘 내리더니 무논에 미꾸라지가 살이 제법 올랐더라.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도 네가 읽을 수 있을까? 몇 번 생각했지만 결국 내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버렸어. 사실은 그날 내가 많이 힘들었어. 정사각형이 되고 싶었지만 꼭짓점 하나 떨어져 나가 버리고 삼각형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날엔 그 강가로 훌쩍 떠나 물속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는 거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다층의 집을 짓고 아웅다웅 눈에 불을 켜듯 살아가는 물 위의 세상과는 다르게 수면 아래 풍경은 고요 그 자체더라. 이끼를 덮어쓴 채 바위에 붙어 있는 다슬기, 자갈 더미를 쿡쿡 쪼다가 이방인의 숨결을 느꼈는지 바위틈으로 쏜살같이 숨어버리는..

좋은 수필 2021.12.18

가을 손/이상범

가을 손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

좋은 시 2021.12.17

돌아오는 길/김강태

돌아오는 길/김강태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보기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김강태(1950∼2003) SF(Science Fiction) 영화에는 외계인도 나오고 우주선도 나오니까 황당한 거짓말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SF의 묘미는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같은, 더 낯선 상상력에 있지 않다. 이 장르의 본질은 인간 바깥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라는 명제에 있다. 사람 아닌 자의 눈에 비친 사람은 어떠한가, 혹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걸 탐색하는 것이 SF 장르다. 차가운 AI와 인조인간 사이에서는 뜨거운 인간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심정으로, 우리는 추운 겨울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것들을 그리워하고 ..

좋은 시 2021.12.17

꿈 다 잊으려고/정양

꿈 다 잊으려고 정양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게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 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몇 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정양(1942년∼) 박태원의 소설 중에 ‘적멸’이라는 작품이 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인생은 꿈이다. 그리고 인생이 좇고 있는 것도 꿈이다.” 무려 90년 전에 박태원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인생..

좋은 시 2021.12.14

녹/이두래

녹/이두래 호미는 죽은 듯 보인다. 꼿꼿한 몸에 고개를 외로 꼬고 누워 온몸은 말라붙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사람 손에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을 호미자루는 잡으면 바스러질듯 거무죽죽하고 촘촘히 갈라졌다. 날이 부러져 버린 곡괭이 자루엔 이름 모를 버섯까지 뿌리를 내렸다. 버섯의 생장은 그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곡괭이의 야무졌던 이빨에는 여지없이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을 것이다. 낫이며 쇠스랑, 곡괭이, 호미 등 그것들은 소용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아래채 처마 밑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맏형 격인 경운기는 아래채 소 마구간에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출 많은 상답上沓을 갈고 추수한 곡식들 실어 나르느라 달달거리며 바빴을 경운기..

좋은 수필 2021.12.12

칼과 도마/심선경

칼과 도마 / 심선경 악연이다. 너와 나 사이엔 오로지 끊임없는 전쟁만이 계속 될 뿐이다. 그 뻔뻔한 낯짝이 이제 막 물오른 듯한 싱싱한 야채를 만나 어떻게 요리해볼까 깐죽대는 꼴이란 차마 두 눈 뜨고는 못 볼 만큼 아니꼽다. 너는 유달리 고깃덩이를 선호했다. 정육점에서 뭉텅이로 잘라 온 아직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홍두깨살을 보는 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네 몸 위에 던져진 제물을 향해 너는 사악한 뱀처럼 혀를 내밀어 그 뜨거운 피를 빨아들인다. 너의 몸과 더불어 뒹굴던 다른 매운 몸들이 질투로 활활 타오른 내 손에 의해 으깨어지고 짓이겨진다. 선창가의 비릿한 심장들이 파닥이며 너의 가슴팍에 안겨들 때 네 입가에 번지는 야릇한 미소가 부아를 치밀게 한다. 너는 근본을 속일 수 없..

좋은 수필 202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