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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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기형도

10월 -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좋은 시 2021.11.19

모과의 위치/ 조정인

모과의 위치 ​ 조정인 그 윗가지 그 옆가지 그 아래가지에 문득문득 새처럼 날아 앉은 푸른 모과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게 내려앉은 모과의 동쪽은 지금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 사물이 지닌 기쁨의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 발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들어온 이후 잎사귀 사이 모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과 쪽으로 얼굴을 돌려 모과만을 보여주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까치가 호젓한 하느님에서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선반 위의 퉁명한 모과는 어느 날 불쑥 한 덩어리 의혹을 내밀며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살덩이 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는 지금 갈애를 품은 심장의 위치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시인의 초상처럼 외로..

좋은 시 2021.11.19

두부의 공식/마경덕

두부의 공식 마경덕 저것은 네모난 공식 문제를 풀면 네 개의 각을 얻을 수 있다 ​사방을 나누고 눈어림으로 재는 중량 해답은 말랑해서 비닐봉지에 담기거나 팩에 담긴다 ​첫 문장은 함부로 구르고 튕겨나가는 딱딱한 공식 변수가 있어 정량의 물을 더하고 거품을 뺐다 ​회오리처럼 휘돌다가도 뜨거운 불길만 무사히 건너면 잘 될 거라 믿었던 사내 완성품을 기다리며 허기진 시간을 견뎠다 간수를 넣는 과정만 통과하면 쓸 만한 물건이 될 거라고 부글거리는 잡념까지 걸러내었다 ​순두부처럼 몽글거리는 아들에게, ​반듯하게 살아라 물러터지면 아무 짝에도 못 쓴다 네모난 틀은 아버지의 공식 거름포를 깔고 뭉친 마음을 부었지만 반듯한 각을 얻지는 못했는지, ​구치소 앞 두부를 들고 기다리는 아버지 ​저기 물렁한 두부 한 모 걸어..

좋은 시 2021.11.19

나선형의 등 / 조옥상

나선형의 등 / 조옥상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 ​ 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이러한 달팽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다소 짭조름하다. 달팽이도 한때 바다가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 비개..

좋은 수필 2021.11.19

먼 길 /박금아

먼 길 / 박금아 차는 가파른 황톳길을 돌아 북녘을 향해 달린다. 시고모님과 함께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우리는 외투 차림으로 앉아서 가는데 고모님만 내가 골라 드린 삼베옷 한 벌 입고 누워서 간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이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가. 차에 앉은 사람들은 오감이 정지된 듯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누구 한 사람 차 앞을 가로지르는 이 없고,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지도 않는다. 풀어헤친 몸으로 누웠던 땅도 일어나 옷깃을 여민다. 생을 다하고서도 이루지 못한 귀향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고모님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이승을 떠나던 날까지 타향에서 살았다. 열아홉에 결혼하여 시집에 들어가 살다가 친정 나들이를 갔던 길에 전쟁을 만났고, 혼자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금방이면 돌아갈 ..

좋은 수필 2021.11.18

미용실 소묘 / 신성애

미용실 소묘 / 신성애 “죽일까요? 살릴까요?” 나는 날이 선 금속의 차가움을 손끝으로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린다. “죽여주세요.” 소파에서 책을 뒤적이던 여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하고, 여자는 죽여 달란다. 이 순간 나는 냉철한 집행관이 되어야한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빈틈없게 일을 처리해야한다. 잘 갈린 기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바짝 말라 있는 머리카락에 촉촉이 물을 뿌려야한다. 미세하게 숨 쉬는 머리카락의 아우성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못들은 척 완전히 무시해 버려야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일 곳과 살릴 곳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람의 지붕 하나를 꾸미는 일이다. 처음 지붕을 올릴 때는 비..

좋은 수필 2021.11.16

삭발 / 신성애

삭발 / 신성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한줄기 따라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모습의 그녀가 성큼 들어서고 있다. 말없이 털썩 의자에 앉는 그녀의 뒷모습이 잎새 떨구어낸 겨울나무같이 썰렁하다. “살 빠졌어요? 날씬해진 것 같아요” “십 오 킬로그램이 빠졌어” “그래요, 참 좋으시겠어요” “나, 빡빡 밀어줘요”” “정말, 결혼식은요?" "상관없어요" 그녀의 단호한 음성을 듣고 약해지려는 내 마음을 다잡았다. 바리캉을 집어 들고 숱 많은 그녀의 머리를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움켜잡았다. 무성하게 자란 머리카락은 발 디딜 틈 없는 뻣뻣한 억새풀 밭 같다. 부처님을 집에 모시고 있는 그녀는 얼마 전부터 무남독녀를 시집보내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라난 머..

좋은 수필 2021.11.16

꽃 보자기/이준관

꽃 보자기 ―이준관(1949∼ )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풍기고 송아지는 음메 울고 있겠다.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 밥주발을 꼭 품고 있던 밥보자기며,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 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며,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 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며, 그러고 보면 봄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냈나 보다. 민들레 꽃다지 봄까치풀꽃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꽃 보자기에 싸서.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봄은 한 걸음..

좋은 시 2021.11.16

11월에 머물고 싶다 / 서성남

11월에 머물고 싶다 / 서성남 나는 11월을 좋아한다. 가을 같기도, 겨울 같기도 한 그 모호함이 좋다. 책장을 넘기듯 분명하게 가르지 않고 다 어우르는 넓은 마음 같아서다. 떨어지는 나뭇잎, 두 장 남은 달력,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옅은 햇살들이 쓸쓸하고 허전하게 하면서도 아직 한 달이 남았다는 위안을 주어서 좋다. 곰곰이 생각하면 11월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어릴 적 11월은 풍성한 달이었다. 시골에서는 벼를 베면 그 자리에 길게 줄가리를 쳤다. 그러고는 보리파종을 끝내고 콩이며 고구마를 수확하여 저장을 다 마친 뒤에야 벼 타작을 했다. 타작을 끝낸 마당에는 짚으로 된 두지가 만들어지고 축담에는 벼 가마니가 쌓였다. 곳간과 빈방마다 곡식이 차곡차곡 들어찼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좋은 수필 2021.11.14

저승꽃/김원순

저승꽃 / 김원순 하늘색 철 샛문에 저승꽃이 만발했다. 구순이 넘은 어머니 육신 곳곳에 핀 저승꽃처럼, 살짝 손만 대도 부스스 떨어진다. 생전에 피우지 못한 꽃송이 피워보고 싶었던 것일까. 저승의 문턱에 닿아서야 흐드러지게 피운다. 여류하는 세월의 물살에 떠밀려 갈라지고, 찢기고, 벗겨진 육신의 진집마다 핀 붉어서 서러운 꽃, 서러워서 진정 애달픈 꽃. 굴곡진 삶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흘린 피눈물로 피운 꽃이며,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흔전만전 뿌리는 꽃이다. 이승을 떠나는 날 담담히 즈려밟고 갈 저승꽃에서 샛문의 지난했던 삶의 지문과, 당당하고 지엄한 자존과, 어기차게 살아온 시간의 지층을 읽는다. 사는 날까지 뜨겁게 살다가 떠날 때는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속절없이 지는 차갑고 따가운 꽃이다. 육신에..

좋은 수필 2021.11.11

가을 손/이상범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돈을 가져..

좋은 시 2021.11.08

호박꽃 / 변재영

호박꽃 / 변재영 신념의 꽃이 있다. 옥토와 박토를 고집하지 않는다. 논두렁 밭두렁이면 어떠랴. 햇빛 한 줄기 드는 곳이면 쇄석 자갈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뼘의 빈 땅만 허락하면 가나안의 복지인 양 바득바득 덩굴손을 뻗어 꽃을 피운다. 인심 넉넉한 외할머니를 닮은 꽃, 담장 위에 노란 별로 뜨는 꽃이 호박꽃이다. 소낙비 한 줄금 긋고 간 아침, 텃밭을 뒤지던 뒤영벌 한 마리가 나를 시간 저편으로 끌고 간다. 유년시절, 초가집 일색인 동네에 유일한 기와집이 우리 집이다. 땡감나무에 몸을 숨긴 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면 담장 위에는 분칠한 듯 노랗게 핀 호박꽃이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내겐 어머니가 둘이다. 살을 주신 어머니는 내가 일곱 살일 때 병마로 하늘의 별이 되셨고, 지금은 키..

좋은 수필 2021.11.08

식은태 / 이정숙

식은태 / 이정숙 식은태는 순수한 우리말로 도자기에 균열이 생긴 상태를 말하는 데 태토胎土와 유약의 수축률이 달라서 생기는 금이다. 이것을 한자로 말하면 빙렬氷裂이다. 글자 그대로 얼음 빙자는 ‘세차다, 없다’의 뜻이 있고, 열은 ‘찢어진다. 무너진다’이다. 이를 이어 보면 비약된 표현일지 몰라도 얼음과 불의 조합은 얼음이 세차게 무너짐을 말한다. 온종일 말없이 지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사막처럼 고독하다. 변방으로 밀려나 고독을 일상처럼 함께했다. 역시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사는 존재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거침없는 사막에서 통제와 간섭이 무시 때보다 더 더워져 숨이 막혔다. 한 방향을 향해 느낌을 공유하며 지낸 열흘, 열악한 긴 여정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포만감이 있었더라면 발생하지 않..

좋은 수필 2021.11.05

양밥 / 김아인

양밥 / 김아인 현관 신발장 문고리에 걸린 가위가 놀리듯이 내려다본다. 애써 피한다. 수십 년 고수한 가치관을 바꾸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그럴싸한 말솜씨의 유혹에 넘어갔다하면 변명이 될까? 그만큼 답답해서라고 하면 조금 덜 부끄러울까? 연말에 구미 사는 지인 내외분이 찾아오셨다. 연고 없는 도시에서 누군가의 방문은 빈손이어도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까지 사오셨으니 상기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낮부터 몇 순배의 술잔이 돌았다. 오래 전에 짜놓은 각본인 듯 흥겨운 분위기가 건조한 겨울 피부에 수분크림을 바른 것처럼 촉촉해졌다. 이사 이야기가 나왔다. 새집으로 안 가느냐는 질문에 이 집이 팔려야 가지요, 하면서 속사정을 꺼냈다. 불황 탓도 있겠지만 타이밍을 한번 놓치자 영 기회가 오지 ..

좋은 수필 2021.11.05

물들이다 / 전미경

물들이다 / 전미경 서녘 하늘은 불의 몸짓이다. 노을이 짜낸 주황빛을 스러지는 뒤태라 하기엔 되살아난 축제장이다. 긴 그리움을 지나 재회의 순간을 맞이하는 연인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달뜬 붉음에 눈빛만 담아도 온몸을 붉게 물들일 것 같은 태움의 시간이다. 마음은 이미 붉음으로, 시간보다 더 빨리 닿아 있다. 이렇듯 붉은 날이 온몸에 스며들 때면 아끼던 소지품 하나 둘 꺼내어 마음을 성형하듯 물들이고 싶다. 서랍 속 빛바랜 손수건이 재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때는 부러울 것 없는 귀족의 삶이 아니었던가. 드러내는 일에 가장 먼저 얼굴 내밀던 시절이 있었다. 예를 갖춘 자리일수록 그의 가치는 더했다. 외출할 때나 슬픔을 이기지 못할 때 마음을 닦아 내며 평정심을 유지시켜 주기도 했다. 다시 세상으로 ..

좋은 수필 2021.11.03

발령 / 김현숙

발령 / 김현숙 남편이 대구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객지생활 3년 만에 집에서 출근하게 되어 내심 반기는 눈치다. 어제는 이전 숙소에 부려놓았던 세간을 옮기느라 이쪽저쪽 두 집이 분주했다. 곧 비울 방이라 여겨서인지 곳곳이 손을 놓고 지낸 흔적이었다. 객지 밥이 아무리 근기가 없어도 그렇지, 살림을 어찌 이만치나 날림으로 살았을까. 홀아비 냄새로 도배한 주방 벽에 양은냄비 하나와 손잡이 부러진 국자 하나가 겨우 달렸고, 몇 날을 깔아놓고 뭉갰는지 모를 이부자리는 작별을 눈치 챘는지 풀이 죽어있었다. 어느 것 하나 착 달라붙는 살림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지난 3년 남편의 지친 몸을 꿋꿋하게 받쳐낸 곳이다. 가족의 품을 대신했고 내 시중을 자처한 보금자리였다. 부평초 닮은 삶일지언정 바닥없이 떠돌지 않도록..

좋은 수필 2021.11.02

조새 / 김희숙

조새 / 김희숙 바위에 부딪친 파도가 하얀 가루로 부서진다. 육지까지 올라올 것처럼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어느 샌가 뒷걸음치는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그제야 파도에 몸을 내어주었던 바위들이 바닷물 사이로 하나둘 되살아난다. 해안가 사람들이 오밀조밀 동네를 이루듯 갯바위에도 다닥다닥 갯것들이 모여 산다. 숨어 있던 게들이 슬그미 기어나오고 엎드렸던 따개비와 굴들은 참았던 긴 숨을 토해낸다. ​ 추위가 뻣속까지 스며드는데 낡은 가방을 멘 노인이 얼른거린다. 한손에는 바구니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길쭉한 쇠갈고리를 쥐었다. 이 바위에서 저 돌 위로 겅중거린다.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는지 굽은 허리를 더욱 깊숙이 구부린다. 돌돌 말아놓은 거뭇한 보따리 하나 바위에 얹어 놓은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

좋은 수필 2021.11.02

걸레/배종팔

걸레 배 종팔 시월의 가을볕이 베란다 창틈으로 날아들어 건조대에 닿는다. 빨래 건조대엔 제 할 일을 다 끝내고 한가하게 햇빛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는 옷들이 서거나 누워 있다. 한동안 늦가을의 쌀쌀함을 막고 몸의 온기를 데워주고 반듯하게 맵시도 나게 해 주었으니 이제 맘껏 가을볕의 휴식을 즐길 수 있지 않느냐며 뽐내는 듯하다. 건조대 한쪽 귀퉁이에 널린 천 조각에 무심히 시선이 닿는다. 아내의 베이지색 면바지를 자르고 덧대어 테두리따라 촘촘히 꿰맨 걸레다. 근 오륙 년을 아내의 다리와 동거동락하다 옷의 수명을 다해 박복하게도 걸레가 되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누빈 세월에 닳아 올이 성기고 때깔마저 잃어 주위 옷들의 눈을 피해 제 스스로 한데로 나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걸레에 별스런 애착이 간다. 척박하고..

좋은 수필 2021.10.29

초여름 글밭을 짓다/허숙영

초여름 글밭을 짓다/허숙영 초여름 이랑사래는 초록 문장으로 빼곡하다. 너른 밭이랑 곳곳에 나름대로 구두점이 찍혀있지만 나는 수시로 난독을 하고 만다. 고추 감자, 채소들은 목차에 일치감치 자리매김을 끝내고 느긋하다. 마지막으로 심은 참깨가 애를 태웠다. 연장 탓으로 돌려보지만 탈자가 너무 많았다. 띄어쓰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흩뿌린 티가 난다. 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표가 난다. 실패를 거듭 한 후에는 손으로 직접 씨앗을 넣고 흙을 덮어주었더니 겨우 자리를 잡았다. 세 번째 씨를 뿌린 뒤에야 겨우 착상이 된듯하다. 깨알 같은 단어들이 오종종 실눈을 뜬다. 제대로 된 문장하나 건지기 위해 이렇듯 애를 쓰는데 제아무리 단단한 땅인들 품을 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단단히 뿌리 내..

좋은 수필 2021.10.29

겨울소리/문경희

겨울 소리 ​ 문경희 ​ 사방 바람의 우범지대다. 홀로로는 결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부조리에 맞서듯 바람은 닿아지는 모든 것들을 다그쳐 소리를 만들어낸다. 소리를 앞세워 자신을 과시하고, 소리를 채찍 삼아 세상을 평정하려 든다. 뒷산 능선을 넘어오는 북풍 역시 을씨년스러운 소리부터 앞세운다. 수척해진 나무들의 등짝에 냉랭冷冷한 문신을 새기고 있는지, 바람의 손이 스칠 때마다 구성없는 비명이 쏟아진다. 바람의 소리인지, 소리의 바람인지, 오늘따라 집 뒤 굴참나무 숲정이는 귀곡산장이 따로 없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헤살을 놓는 날엔 무조건 퇴각의 외쳐야 한다. 바람에 항거하는 방법이란 고작 문이란 문을 꽁꽁 닫아걸고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문도 소리의 출입까지는 막을 수 없..

좋은 수필 2021.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