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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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을 구으며/전영관

생선을 구으며 전영관(1950~2016) 중간불로 뒤집고 약한 불로 다시 뒤집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일상의 알몸을 통째로 굽는다. 노릇노릇 구워져 하루의 밥상에 오를 때까지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뒤집히고 또 뒤집힌다. 탁탁 소리 내며 반항하고 싶은 젊은 날도 있었지. 큰 불만 고집하다가 상처까지도 모두 태운 때도 있었지. 비린내가 풍긴다. 비린내가 묻는다. 한 끼의 맛있는 밥상을 위해 인내를 해야 하는 많은 시간들이 훨훨 날지 못하는 시든 지느러미 날개가 되어 불꽃 속으로 사라진다. 내가 피웠을 냄새와 연기 지금쯤 어느 자리에 엉겨 붙어 부끄러운 모습으로 녹슬어 가고 있는지. 어느 가슴에 남아 아프게 하고 있는지. . 시인은 생선을 구우며 시 한편도 같이 구웠으니 그는 다만 아침상을 차린 것이 아..

좋은 시 2022.01.22

울음의 인연/손창기

울음의 인연 손창기 왕릉 곁에서 손을 펴고 있으면 생명선의 어느 마디가 죽은 자의 입김이라도 받은 듯 손금에 얼마큼 보태지고 있는 느낌 지긋이 손금의 인상을 흐뭇해하지만, 죽은 자는 내 손금을 꼭 무인상武人像의 손금과 닮았다고 말한다 손바닥에 전생이 흘러왔을지도 모른다 이미 내 안에 얼마간 살고 있는 고구려 안시성을 지킨 도부수이거나 신라왕을 호위한 아랍인이거나 친일파를 척결한 아나키스트이거나 서글픈 귓불을 만지면 토막 난 삼생의 길을 잇는 새소리, 천 년 전에 조율되고도 다시 울리는 현들 구부정 소나무 속 수억 광년 떨어진 후투티 울음의 인연을 나는 모른다 무인의 칼날 위를 스쳤던 새의 조상으로부터 어떤 새는, 무인의 목청을 새겨두고 있었을까 새소리 전에는 전생이거나 새소리 후에는 후생이거나

좋은 시 2022.01.22

나무 한 그루를 읽는 동안 / 최지안

나무 한 그루를 읽는 동안 / 최지안 여름이 문을 닫고 간다. 변심한 애인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그렇더라도 여름이 남긴 발자국은 아직 푸르다. 보리수도 한창이다. 봄에 빨간 열매가 골목을 환하게 밝혀주던 나무다. 키가 크지 않아도 열매를 달았다는 자부심도 있었으리라. 인심도 좋아 동네 아이들이 오며가며 따 먹어도 부러 가지를 내어주고 본척만척하였으리라. 많은 열매를 품고도 나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고작 열 개가 채 못 된다. 아마 나무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몸에 달렸어도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양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아이의 손이 놓치거나 바람에 실족한 것들이 보리수의 몫이었다. 제 발밑에 오종종하게 떨어진 것을 내려다보며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나마도 몇 개는 개미나..

좋은 수필 2022.01.22

마늘 까던 남자 / 민 혜

마늘 까던 남자 / 민 혜 언젠가부터 마늘을 까는 일은 그 남자의 몫이 되었다. 퇴직하고 하릴없이 늙어가는 터수에 아내를 도와 마늘 좀 깠기로서니 유난 떨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이변이요 사건이었다. 왕년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밥 한 끼 챙겨먹지 못했으며 자기 마누라가 허리 다쳐 누워 있을 때도 설거지 한번 도와주지 못했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퇴직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집밥 먹는 남자를 ‘삼식이’라 한다는데 그는 정말 집 밖에 모르는 원조 삼식이었다. 착실한 삼식이 생활로 접어든지 어언 6년, 까칠해진 마누라의 눈치를 의식한 거였을까. 어느 날 그는 아내인 내가 바가지에 수북 담아 놓은 마늘을 보더니 까주겠노라고 자청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몇 해 전만 해도 김장철에 마..

좋은 수필 2022.01.22

몌별 / 황선유

몌별 / 황선유 온통 붉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벌겋게 물든 바다와 하늘과 그 경계에서 타는 햇귀. 달리 말이 없으니 일출인지 일몰인지조차 모른 채, 망아의 일순간. 시선을 타고 들어온 붉은 바닷물이 심장의 피와 섞여 전신을 붉혔다. '붉다'를 잇는 다음은 필시 '유혹'일 터. 무어 확답도 없이 바삐 길을 나섰다. 막상 당항포의 일몰은 시시했다. 순천만의 장엄함과는 한참 멀다. 채석강의 홀림도 다대포의 아련함도 아니다. 색도 힘도 반이나 잃은 햇발은 쓸데없이 길어 성가시기만 하다. 썰물로 잦감이 된 개펄에 조개껍질만 듬성하다. 저만치 나앉아서 해안도로와 멀어진 바다가 겉만 불그스름하여 아쉬운 일몰의 면치레를 한다. 열린 차창으로 물바람이 좀 낫다. 죽 이어진 해안길의 상수리나무들이 헐벗었다. 다옥했을..

좋은 수필 2022.01.20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은 기억의 방이다. 아주 내밀하게 드나들 수 있는 나만의 통로다. 문을 열면 아스라이 멀어져 간 추억이 머물고, 손을 뻗으면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닿을 듯한 그리움의 곳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써 떠올렸던 흔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통증만 남겨두는 시간의 속을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지나간 시간을 열면 그리움과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하루가 다르게 조바심 내던 시간이 마침내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지 8개월 만이었다. 단, 1분 만에 생과 사를 정확하게 갈라놓은 시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초침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승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사흘뿐이다. 한정된 시간은 야속하게도 융통성이 없다. 어머..

좋은 수필 2022.01.20

숨비소리 / 김미향

숨비소리 / 김미향 잔잔한 물면을 뚫고 열정을 뿜어대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부레를 부풀려 다시 물속으로 사라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사뭇 나를 붙들어 앉힌다. 시간조차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듯한 짙푸른 바다를 나는 미동도 없이 바라다본다. 태초의 바람으로 돌아가는 양 희푸른 바닷바람은 까마득한 기억을 건져 올린다. 어머니의 눈물은 바닷물보다 짰다. 언니, 오빠의 등록금 때문에 골목골목 다니며 남에게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일상은 언제나 고달파 보였다. 한뎃솥 앞에 앉아 치맛단을 뒤집어 눈가를 닦는 어머니의 그 모습에서 학비 마련을 위해 스스로 해녀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고향이기에 해변 여자들만의 본능이 내게도 잠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열다섯 살 먹..

좋은 수필 2022.01.19

물을 달래다 / 김현숙

물을 달래다 / 김현숙 물이 끓는다. 차(茶) 한 잔이 되기 위해 물은 지금 뜨거운 주전자속에서 제 살을 뜯고 있다. 가혹한 끓는점에서 사정없이 부서지고 있다. 상처투성이가 된 물을 찻잔에 부어놓고 후우, 후우, 입김을 불어 달랬다. 나는 그렇게 찻물을 달랜다. 알맞은 온도도 없고 따라야 할 다도(茶道)는 더욱 없다. 입 바람을 타고 물결이 켜를 지으며 찻잔 벽에 가 부딪혔다. 늙은 찻잎은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잔결 사이를 파고들어 물의 깊은 속살까지 찢어놓고 수몰되어버렸다. 그 갈라터진 살갗에 신록 빛의 새살이 차면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다. [찻물을 달래다] 지난겨울, 나는 모처에 있는 찻집에서 이 문구를 처음 봤다. 흰 광목천으로 만든 조각보에 주인을 닮은 글씨체가 수(繡) 놓여있었다. 주인 여자..

좋은 수필 2022.01.14

그릇의 종류

가. 그릇의 종류 귀박:나무를 직사각형으로 네 귀가 지게 파서 만든 함지박. (예)저 귀박에 담아둔 밤은 작은댁에 보낼 거니까 손대지 말아라. 대고리:대오리로 엮어 만든 고리. (예)그는 부업으로 대고리를 만들어 파는데 플라스틱의 유해성이 알려지면서부터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 댕댕이바구니:댕댕이 덩굴의 줄기로 엮어 만든 바구니 (예)길녀는 그 사내를 보자 댕댕이바구니를 내팽개친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고리:둥글납작한 작은 버들고리. (예)삼십년 넘게 쓴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바로 시집 오실 때 가져 오신 동고리 였다. 동방구리:동이보다 배가 부른 질그릇 (예)동방구리에 쌀을 가득 담아 두었는데 장마가 지니까 바구미가 득실걸렸다. 밀박:큰 바가지 (예)어른 하나가 들어가도 충분할 그 큰 독의 물도 밀박..

향기로운 글 2022.01.11

매화/한광구

매화 한광구 창가에 놓아둔 분재에서 오늘 비로소 벙그는 꽃 한 송이 뭐라고 하시는지 다만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여네 이쪽 길인가요? 아직 추운 하늘문을 열면 햇살이 찬바람에 떨며 앞서가고 어디쯤에 당신은 중얼거리시나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 하나가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이쪽 길이 맞나요? ―한광구(1944∼) 좋은 것 중에서도 드문 것에 대하여 우리는 ‘귀하다’고 표현한다. 매화도 그중의 하나다. 봄날의 꽃은 많아도 혹한을 이기고 피는 꽃은 드물다. 옛 선인들은 백매화를 보면 깨끗하다 칭송했고 홍매화는 보면 신비롭다고 사랑했다. 그들에게 매화는 결코 물체가 아니었다. 그 속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화분 안에 심겨 있는 것은 분재가 아니라 일종의 마음이었다. 역사상 매화..

좋은 시 2022.01.10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최민자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 최민자 사람의 신체에서 눈과 손처럼 돈독한 사이도 없다. 그림을 그리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물건을 고르고 과일을 깎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눈과 손은 함께 일한다. 눈이 손을 이끄는 건지 손이 눈을 거드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일 궂은일을 함께 도모하며 먼 듯 가까운 듯 일생을 살아낸다. 눈을 최고사령부의 파수병이라 치면 손은 변방의 행동대원이다. 위치로 보나 생김으로 보나 가까운 촌수는 아닐 성싶은데 무슨 연고로 의기투합하여 상부상조를 하게 된 것일까. 둘 다 말단이니 상명하복(上命下服)이 통할 리 없고,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으로 소관부처마저 다른데 말이다. 어쨌거나 무관한 듯 유관한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역학구조에는 미심쩍으면서도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

좋은 수필 2022.01.05

억새의 노래 / 나대영

억새의 노래 / 나대영 ‘여백(餘白)을 가득채운/저 숨가픈 날갯짓,/꿈꾸는 세상(世上)은/아직도 아득한데/바람이/키운 씨앗들/눈꽃으로 피어난다.//무위(無爲)로 뿌려놓은/수많은 아우성,/별빛에 씻기우다/꽃등에 맺힌 이슬은/어쩌다/서럽게 흘린/눈물인 줄 알았다.//세월(歲月)뿐인 산등성이/적막(寂寞)도 인연(因緣)이니/덩실덩실 춤추고/허공을 걷노라면/무심한/가을 노을도/너털 웃음 터뜨린다.’ ​ 한 계절 아름다운 채색(彩色)과 향기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미나 모란, 국화 등은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애지중지하며 가꾸어진다. 그에 비해 억새풀은 결코 뭇사람들의 관심을 갖고 자라나는 풀이 아니다. 물론 화려한 빛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짙은 향기를 품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찌 보면 빈 공간에..

좋은 수필 2022.01.05

눈꽃막사발 / 류영택

눈꽃막사발 / 류영택 봉긋한 모양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건조대에 엎어놓은 막사발이 여인의 젖가슴 같아 보인다. 주방 한쪽에 놓여있는 상자에는 그릇이 담겨져 있었다. 이게 웬 건가.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누가 빼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엣말로 ‘새미골 가마터’에서 빗은 하동막사발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잘도 참는다 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아내는 영화 취화선 촬영장을 다녀온 후 막사발을 사고 싶어 안달을 했었다. 이럴 때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면 좀 좋을까. 나는 그릇을 살피다말고,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며 맥 빠지는 소리를 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했던지 환하게 웃음 짓던 아내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졸지에 분..

좋은 수필 2022.01.04

돌챙이/오미향

돌챙이 / 오미향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로 들어서자, 암벽 위에 작은 돌집이 보였다. 벼랑 위 깔깔한 소금기를 벗 삼아 삶의 모퉁이를 돌아선 그곳에는 삭정이 같은 무릎을 보듬고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만 불어도 거친 말 한마디만 내 던져도, 금세 기울 것 같은 수평을 아버지는 꼭 붙들고 있었다. 숭숭 구멍 뚫린 관절에 햇볕을 끌어모으고 먼바다를 내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잊었다는 것인지 다 지나간 일이라 모른다는 것인지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단물 쓴물 다 빠진 아버지의 빈 가슴에 찾아 든 것은 무엇일까? 보는 이의 마음도 마른 웅덩이처럼 젖어들었다. 말랑하게 가라앉은 가슴이 울컥했다. 아버지가 평생 쌓아 놓은 돌들은 말이 없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거칠고 힘..

좋은 수필 2022.01.04

쪽항아리/김희숙

쪽항아리- 김희숙 그가 움직인다. 손짓춤에 살결 같은 무명천이 내려서고 조리질에 참깨 올라오듯 누런 진흙물이 일어난다. 토닥거리며 매만지고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니 항아리 안에 울돌목 회오리바람이 인다. 강바닥이 뒤집힌 듯한 너울에 정신이 혼미하다. 토해낸 물거품이 모여 수런거린다. 그가 젖은 천을 치켜들고 훑어 내리자 하늘 한 조각 떼어온 양 푸른 쪽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흙을 빚어 태어났다. 잘록한 목선 타고 흘러내린 허리는 어린아이 두어 명을 거뜬히 품을 정도로 넉넉하고 진한 흑갈색 겉옷엔 빗금 몇 개 그어 멋을 부렸다. 풍만한 맵시는 미스 항아리 대회라도 나섰더라면 등위 안에 당당히 들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여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이 타들어가는 뜨거움을 견딜 때는 어느 종갓..

좋은 수필 2022.01.04

발에 관한 시 모음

+ 발 나는 발이지요. 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 하루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 때로는 바보처럼 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 그러나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 김정호 선생의 발. 아우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누나의 발. 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던 김좌진 장군의 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발. 그러나 나는,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고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이지요. (권오삼·아동문학가, 1943-) + 웃는 발 동생 발을 씻겨준다. 미끈미끈 비누칠을 하니까 간질간질 까르르 발가락도 꼼지락거리며 웃고 뽀글뽀글 뽀르르 거품들도 웃다가 배 터진다. (함기석·아동문학가) + 빗방울의 발 바닥으로 떨어지는 ..

좋은 시 2022.01.03

막사발의 철학 / 복진세

막사발의 철학 / 복진세 한국의 그릇에는 도자기와 막사발이 있다. 가만히 보면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도 달라서 재미있다. 사람도 도자기 같은 사람이 있고 막사발 같은 사람이 있다. 도자기는 관요에서 이름난 도공에 의하여 질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자기는 관상용 또는 화병이나 찻잔, 식기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하여진다. 격식 있는 상을 차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 탕기 찜기 접시며 주병 등과 같이 용도대로 사용해야 한다. 국그릇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릇 하나에 하나의 용도만이 정하여졌다. 도자기는 활용 면에서 보면 매우 편협한 그릇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장식장 등에 전시되어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행여 다칠세라 다루기에도 여간 조심스럽..

좋은 수필 2022.01.03

종이접기 / 이춘희

종이접기 / 이춘희 색종이 위에 온 마음을 담는다. 모서리를 맞추어 엄지로 지그시 누른다. 멀리 떨어진 꼭짓점을 맞대고 힘주어 문지른다. 접을수록 좁아지는 종이를 따라 마음도 쪼그라든다. ​ 종이접기는 유년의 나를 다양한 상상의 나라로 데려갔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올라 손오공을 만나고, 돛단배를 타고 무인도에 발을 디뎠다. 종이 인형에 빨간 저고리와 초록 바지를 입히며 엄마가 된 듯 흐뭇했다. 완성품을 만날 때마다 동심은 꿈속을 걸었다. 그 뒤로 성취감과 자신감이 따라왔다. ​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색종이는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종이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며 마음의 종이를 무던히도 접었다. 교과서적인 자를 들이대고 접은 모서리는 칼날처럼..

좋은 수필 2022.01.03

<라면에 관한 시 모음>

<라면에 관한 시 모음> + 라면을 끓이면서 물을 데운다 라면을 끓일 요량으로 봉지를 뜯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이 한때 허기진 오후, 외출 중인 아내의 빈자리가 공복처럼 쓰리다. 멀리 낮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냄비엔 물이 끓고 가지런히 누운 대파를 숭숭 썰어 넣는다. 잘 익은 김치를 밥상 위에 올리면 더 이상 부러울 것 없는 시간 사람들아, 무지한 식욕을 부끄러워 말자 산다는 것, 정말 산다는 것은 허기를 다스리는 일 권력도 富도 라면 한 개의 포만감보다 못한 것을. (정구찬·시인) + 라면·1 쉽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작고 은빛 나는 법랑냄비에 라면을 삶는다. 세상 사는 재미도 함께 끓여보면 어떨까? 뜨거운 라면가락 속에 살다 얻은 슬픔을 녹여 담을 수 있다면 매운맛 수프는 뿌리지 않아도 되겠지...

좋은 시 2021.12.31

숲, 내 머리위의 자화상/윤혜주

숲, 내 머리위의 자화상/윤혜주 도끼빗을 들고 거울을 본다. 푸석하게 언 땅 같은 머리위에 널브러져 누운 반백의 머리를 만난다. 메마르고 거칠어진 내 삶의 흔적이다. 굵은 빗살이 머리 밑 깊숙이 들어가 부실한 뿌리를 일으키려 애써보지만 서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드라이기의 뜨거운 열기를 들이댄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던 머리카락이 뽑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애처롭다. 저 황량한 산등성이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일까.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화장대 서랍을 연다. 손을 넣어 까만 봉지 하나를 꺼내들고 망설인다. 헤어보톡스(가발)다. 작년 봄, 단짝인 친구가 숭덩숭덩 비어가는 내 머리 밑을 걱정하며 그것을 권했다. 몇 번 손사래 치며 거절했지만 또래들보다 늙어 보인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 ..

좋은 수필 2021.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