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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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손/이상범

가을 손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

좋은 시 2021.12.17

돌아오는 길/김강태

돌아오는 길/김강태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보기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김강태(1950∼2003) SF(Science Fiction) 영화에는 외계인도 나오고 우주선도 나오니까 황당한 거짓말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SF의 묘미는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같은, 더 낯선 상상력에 있지 않다. 이 장르의 본질은 인간 바깥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라는 명제에 있다. 사람 아닌 자의 눈에 비친 사람은 어떠한가, 혹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걸 탐색하는 것이 SF 장르다. 차가운 AI와 인조인간 사이에서는 뜨거운 인간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심정으로, 우리는 추운 겨울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것들을 그리워하고 ..

좋은 시 2021.12.17

꿈 다 잊으려고/정양

꿈 다 잊으려고 정양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게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 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몇 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정양(1942년∼) 박태원의 소설 중에 ‘적멸’이라는 작품이 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인생은 꿈이다. 그리고 인생이 좇고 있는 것도 꿈이다.” 무려 90년 전에 박태원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인생..

좋은 시 2021.12.14

녹/이두래

녹/이두래 호미는 죽은 듯 보인다. 꼿꼿한 몸에 고개를 외로 꼬고 누워 온몸은 말라붙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사람 손에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을 호미자루는 잡으면 바스러질듯 거무죽죽하고 촘촘히 갈라졌다. 날이 부러져 버린 곡괭이 자루엔 이름 모를 버섯까지 뿌리를 내렸다. 버섯의 생장은 그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곡괭이의 야무졌던 이빨에는 여지없이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을 것이다. 낫이며 쇠스랑, 곡괭이, 호미 등 그것들은 소용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아래채 처마 밑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맏형 격인 경운기는 아래채 소 마구간에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출 많은 상답上沓을 갈고 추수한 곡식들 실어 나르느라 달달거리며 바빴을 경운기..

좋은 수필 2021.12.12

칼과 도마/심선경

칼과 도마 / 심선경 악연이다. 너와 나 사이엔 오로지 끊임없는 전쟁만이 계속 될 뿐이다. 그 뻔뻔한 낯짝이 이제 막 물오른 듯한 싱싱한 야채를 만나 어떻게 요리해볼까 깐죽대는 꼴이란 차마 두 눈 뜨고는 못 볼 만큼 아니꼽다. 너는 유달리 고깃덩이를 선호했다. 정육점에서 뭉텅이로 잘라 온 아직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홍두깨살을 보는 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네 몸 위에 던져진 제물을 향해 너는 사악한 뱀처럼 혀를 내밀어 그 뜨거운 피를 빨아들인다. 너의 몸과 더불어 뒹굴던 다른 매운 몸들이 질투로 활활 타오른 내 손에 의해 으깨어지고 짓이겨진다. 선창가의 비릿한 심장들이 파닥이며 너의 가슴팍에 안겨들 때 네 입가에 번지는 야릇한 미소가 부아를 치밀게 한다. 너는 근본을 속일 수 없..

좋은 수필 2021.12.11

부지깽이 / 김미경

부지깽이 / 김미경 싸늘히 식은 부지깽이가 도망가던 등 뒤 마당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가시나가 허구한 날 책만 들다보고 그라쌋노. 엄마 좀 거들면 손가락이라도 뿌라지나.” 뒤따라 날라 온 엄마의 잔소리는 피할 새도 없이 등짝에 바로 내리꽂혔다. 갑자기 날라 온 부지깽이를 용케 피하긴 했지만, 바깥 추위만큼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서늘하다. 그 당시에는 겨울 날씨가 꽤나 매웠다. 밤새 창가에는 고드름이 아이스크림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꽁꽁 언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너나없이 방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을 먼저 헤집어댔다. 아랫목에는 수건에 똘똘 싸여 푹 파묻힌 밥이 어김없이 식솔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집어넣었을 때 온몸으로 스며드는 구들장의 온기는 그 날의 고단함을 녹여주는 위로와도 같았다. 뜨뜻한..

좋은 수필 2021.12.11

바닷바람의 지문/장미숙

바닷바람의 지문/장미숙 어디서부터 발원하여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바람이 한입 물어다 놓은 잔물결이 몽글몽글 피어난 이팝나무 꽃 같다. 바다는 물결을 휘감고 뒤척인다. 생명의 꿈틀거림이다. 일시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파랑(波浪)의 모양은 가지각색이다. 작고 큰 게 있는가 하면, 동그랗고 모난 것도 있다. 뭉쳐서 움직이면 곱게 빗질한 머리카락이 바람의 오선지를 두드린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마구 헝클어진 봉두난발이 되기도 한다. 바다 위로 우뚝 솟은 바위 옆 파도가 짓궂다. 겁도 없이 높은 바위벽을 기어오른다. 뒤이어 높이뛰기 선수처럼 놀치다가 곤두박질친다. 부서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 거대한 거품을 잉태한다. 부서지는 것들은 망설임이 없다. 시간을 쪼개 그 속으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물..

좋은 수필 2021.12.11

입장불가 함에도 불구하고/김정옥

입장불가 함에도 불구하고 / 김정옥 탁구 동호회 가을 야유회 날입니다. 어제가 입동이라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바깥바람을 쐬는 게 한참만입니다. 옷은 두툼해도 마음만은 가을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아기 궁둥이처럼 탱탱하게 부풀었던 기분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습니다. 관광지에서 ‘루지’를 타려는데 65세 이상은 입장이 불가하다는 바람에 혼자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회원들은 나만 떼어놓고 타려니 미안한 모양입니다. 누군가 같이 남겠다느니, 괜찮다느니 하며 실랑이를 했습니다. 예순예닐곱 살만 같아도 신분증 보여 달라면 안 가져왔다고 둘러대고 어떻게 회원들 틈에 묻어 들어가 볼 것입니다. 내 나이 칠십 살이나 되었으니 그럴 엄두나 낼 수 있겠습니까. 회원들에게 신경 쓰지 말..

카테고리 없음 2021.12.07

걸레/박시윤

걸레 박시윤 봄같이 따스한 날이다. 꽁꽁 얼었던 수도가 녹고 잔뜩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켠다.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방문을 열어젖히신다. 모처럼 맞는 휴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나 대청소를 하자는 말씀에 못 이기는 척 걸레부터 집어 든다. 손부인 내게 걸레가 쥐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걸레를 물에 텀벙 던져 넣는다. 비틀린 채 바싹 건조된 걸레는 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움츠린 몸을 푼다. 푸른 추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원래의 제 모습으로 풀어지는 걸레다. 뽀얀 빛깔과 가녀린 고름이 제법 앙증맞다. 쳐다보는 내내 물처럼 맑은 미소가 걸레 위로 떨어진다. 하늘하늘 잘도 풀어져 느낌마저 보드랍다. 욕조 속에서 여린 몸을 드러내고서 첨벙첨벙 조심스레 물길 질을 하는 아이의 모습 같다.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번질 즈..

좋은 수필 2021.12.05

글쟁이들 대장간/이문자

글쟁이들 대장간/이문자 풀무질에 쇳덩이가 익어간다. 벌겋게 달궈진 쇠가 모루에 놓이자 드디어 시작되는 메질.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리드미컬한 연주다. 앞 메 옆 메가 번갈아 치고 때리면 엿가락처럼 휘었다가 늘어난다. 대장장이가 집게로 잡아주는 방향에 따라 대충 매무새가 잡히다가 불 속에 들고 나기를 수십 차례. 두드리고 펴고 다듬기는 또 몇 번이던가. 찬물 담금질을 수없이 거쳐야만 온전한 모습으로 탈바꿈 한다. 시우쇠 한 도막이 명품 연장으로 탄생되는 순간이 감격스럽지 않은가. 글 대장간이 차려졌다. 글쟁이들이 차린 온라인 대장간이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단숨에 좌정하는 장인들! 이레 만에 지척에서, 수천수만 리에서 눈결에 달려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야말로 인간의 IT 두뇌는 찬사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좋은 수필 2021.12.04

귀명창 / 정연원

귀명창/정연원 소리에는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에는 추임새가 날고 있다. 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 귀명창을 만났다. 부채를 쥔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 뿐인 단촐한 무대다. 고수가 엇!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을 치자, 소리꾼이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시작한다. '그때 춘향이는 옥중에서 머리를 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인 아니리를 한다. 다시 고수가 엇! 타당 탁, 북을 치면 소리꾼은 '쑥대머리~' 하며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등 추임세로 소리꾼의 목을 풀고 흥을 불러낸다. 소리꾼의 창과 고수의 추임새에 몸짓의 발림이 어우러지면 조용하던 관중석이 소란해진다. 판소리를 들을 줄 아는 관중이..

좋은 수필 2021.12.02

바람 부는 날/윤강로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윤강로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만을 보면서 오래 오래 기다려 보았나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로 세상에 매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에 시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이 되어 스친 것들을 잊어 보았나 삶이 소중한 만큼 삶이 고통스러운 만큼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개의 낡은 잎새를 사랑해 보았나 윤강로(1938∼) ‘감응’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만난 결과, 우리 마음이 따라 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 만나면 변하기도 하겠지’ 싶지만 시에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시는 감응을 마법같이 대단한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시인은 오롯이 저 혼자서 시를 빚어내지는 못한다. 오늘 만난 타인, 말, 장면, 심지어 지나가는 바람마..

좋은 시 2021.11.29

풍로초 2 / 정성화

풍로초 2 / 정성화 동생이 전화를 했다. 엄마가 요즘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매일 챙겨 보던 TV 드라마도 재미없다고 하며 그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고 했다. 폐질환으로 심년 넘게 입 · 퇴원을 반복했으니 그럴 만하다고 이해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옷을 사드리고, 신나는 노래 테이프를 틀어드려도 엄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감정이란 걸 죄다 내다버린 것 같기도 했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사는 게 귀찮다고 했다. 위로하는 차원에서 달달한 믹스커피를 한 잔 타 드렸더니, 몸에 좋지 않은 걸 권한다며 타박하셨다.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도 엄마는 좁은 마당 한 편에 분꽃과 채송화를 심었고 종종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보곤 했다...

좋은 수필 2021.11.28

바다로 가는 따뜻한 바람처럼/곽재구

바다로 가는 따뜻한 바람처럼 곽재구 오후 4시 나는 한라산의 제2횡단도로를 건넜다. 갈대밭에 떨어지는 햇살들이 보기 좋았다. 공항에서 렌터카 회사 직원은 내게 두 가지 당부를 했다. 그의 웃음 끝이 맑았으므로 나는 끝까지 그의 말을 따랐다. 과속하지 말 것, 섬 안의 모든 도로에 감시 카메라가 있어 육지로 돌아 간 뒤 한두장의 속도위반 스티커를 받는 것은 기본이라는 것이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첫 번째 그의 부탁은 내게 필요 없는 것이다. 나는 이미 3개월전에 그의 말에 상응하는 전과를 제주에서 경험한 적이 있었다. 두 번 째 당부는 그가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차 열쇠를 건네주며 그가 내게 오늘밤 어디서 묵을 것이냐고 물었고, 내가 서귀포라고 대답하자 그의 웃음 끝이 한층 싱싱해지더니 아침에 서귀..

좋은 수필 2021.11.28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이웃집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여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릴 하시지 않는 분인데 단단히 벼르고 오신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우리도 적잖이 놀랐다. 시골살이를 하러 오기 전부터 이웃과 잘 지내고 싶어 마음 준비를 많이 했었다. 이사 와서는 집집이 떡도 나누고 음식을 만들어 경로당에도 가져다 드렸다. 어르신을 뵈면 살갑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인사성 바르다고 좋아들 하셨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때문에 이웃의 핀잔을 받게 되었다. 청송으로 귀농을 결정하고 암수 강아지 한 쌍을 분양받았다. 오래 사귀던 친구와 이별할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청이와 송이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중 송이는 잘 생긴 수컷이다. 송이가 어느새 자라 어엿한 총각이 되었다. 애교라..

좋은 수필 2021.11.28

수염 / 주인석

수염 / 주인석 씨 없는 싹이며 거꾸로 자라는 줄기다. 여느 생물과는 달리 굴광성이 작용하지 않는다. 씨앗이 없어도 멸종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길러도 꽃이 피거나 열매 맺지 않는 줄기다. 필요성은 없으나 세대를 이어 유전되어 내려오고 퇴화되지도 않는다. 성숙한 남자의 뺨이나 턱에 자리를 잡고 남성만의 관능미를 자랑하고 액세서리 역할까지 한다. 오후보다 오전에 더 잘 자라며 케라틴이라는 단백질을 먹고 산다. 몸에 있는 털 중에서 가장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수염이 아닐까. 눈썹이나 코털, 머리카락은 이물질이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사명을 다한다. 이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꺼번에 잘리거나 밀려 나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수염은 아침마다 한꺼번에 쓸려 나간다. 남성 상징 액세서리..

좋은 수필 2021.11.28

고사목의 변(辯) / 이은희

고사목의 변(辯) / 이은희 고사목이 눈에 든다. 금방이라도 연둣빛 신록에 묻혀 나무줄기 여기저기에서 푸른 잎이 돋아날 것만 같다. 구병산 팔백여미터 산길을 오르는 중에 만난 허옇게 말라버린 소나무. 꽃 빛바랜 화석 같다. 몸체가 굵고 하얘서 유난히 도드라진다. 시선은 나무의 줄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지만, 신록에 가려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고사목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낱말이 뇌리를 스친다. 혹여 이 나무가 바로 '고독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른다. 고독도 깊으면 병이 되고, 관계 또한 과하면 탈이 나지 않던가. 저 많은 나무 중에 누구와도 소통이 어려워 지쳐버린 나무인가. 주변의 수종을 살펴보니 대부분 활엽수종이다. 참나무와 아기단풍, 산진달래 등속이다..

좋은 수필 2021.11.28

씨, 내포하다/문경희

씨, 내포하다 / 문경희 씨 마늘이 발을 내렸다. 파종 전에 하룻밤 침지를 했더니 밑둥치에 하얀 실밥 같은 뿌리를 내민 것이다. 왕성한 생명의 피돌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뿌리가 정靜이라면 발은 동動이다. 끝내 한 자리만 파고드는 것이 뿌리의 속성이라면, 끊임없이 앉은자리를 박차게 만드는 도구가 발인 까닭이다. 부지런히 걷고 뛰어야만 겨울이라는 냉혹한 계절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다는 다그침 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마늘에 뿌리가 아닌 발을 달아주기로 했는가 보다. 나도 그들을 흉내 내며 마늘이 내민 뿌리를 발이라 읽는 중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발이 난 마늘을 꾹꾹 눌러 심는다. 얼었다 녹았다, 비록 월동의 가풀막이 험난하다하여도 발의 투지가 저리 다부지니 옹골찬 봄을 의심할 수는 없겠다..

좋은 수필 2021.11.28

칠월/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좋은 시 2021.11.26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류시화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 -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

좋은 시 2021.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