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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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억/ 박종희

어머니의 기억/ 박종희 계절은 늘 누군가의 손을 잡고 돌아온다. 매화꽃이 세상을 물들일 때면 하얀 기억 속을 걷던 어머님 생각이 난다. 기억은 잊었어도 몸짓말로 나를 반기던 어머님이 올해도 어김없이 봄을 데리고 왔다. 빼꼼히 열린 병실 문 사이로 나를 발견하고는 쑥스러운 듯 당신 코를 잡아당긴다. 기다렸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어머님만의 몸짓이다. 어머님 눈에 낯익은 눈부처가 들어앉는가 싶더니 이내 잇몸을 다 드러내며 까르르 웃는다. 병실에서 무에 그리 웃을 일이 있을까만 며느리를 웃게 하려는 어머님의 배려일 성싶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꼿꼿하던 어머님이 큰아들을 앞세우고 나서는 맥없이 들어앉았다. 불덩이 같은 오 남매를 품어 키우느라 당신 몸이 녹아내리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어머님한테 아주 특..

좋은 수필 2021.10.08

소멸에 대하여/이성복

?소멸에 대하여? - 이성복 ​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셍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을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좋은 시 2021.10.07

소처럼 느린 당숙/김용택

소처럼 느린 당숙 김용택 여름엔 점심밥을 먹으면 모든 동네 사람들이 강가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누가 오라고 하지도 않고 누가 부르지도 않고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네 사람들은 모두 밥숟갈을 놓기가 바쁘게 정자나무 아래로 끄덕끄덕 더위와 힘든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드는 것이다. 진메 마을 정자나무는 툭 터진 강가에 있기 때문에 그 그늘 아래 들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선풍기 아래 앉아 있는 것보다 몇백 배 시원하다. 그렇게 정자나무 아래 앉아 잠자거나 쉴 때 이따금씩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칠 때가 있다. 비는 꼭 우골이라는 골짜기에서 묻어오게 마련인데 누군가 “우골에 비 묻었네” 하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잠에서 부스스 깨어 잠을 쫓으며 저 비가 참말로 여그까장 소낙비로 올랑가 안 올..

좋은 수필 2021.10.06

신기료 / 신성애

신기료 / 신성애 삼 층 요리 학원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감영공원 한 귀퉁이 도장 가게 처마 밑에 풍경처럼 신기료장수가 있다. 오늘도 담벼락을 등지고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노인이 돋보기안경 너머 아스팔트 길을 내려다본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땅을 울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신발의 상태를 가늠하는 모습이다. 널빤지에 ‘신발 닥음, 신발 수선’ 이라고 엉성하게 쓰인 글씨에는 고삐를 놓아 버린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오전에는 햇살이 들이 비춰 적나라한 모양이 어설퍼 보여도, 그늘이 반쯤 내려오면 제법 오래 된 가게 티가 난다. 사람도 공구도 반지르르 세월이 묻어나는 짙은 갈색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곳이 십 리라도 되는 양, 나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새로 신발을 끌며 갔다. 멀리서 볼 때는 ..

좋은 수필 2021.10.06

미용실 소묘/신성애

미용실 소묘 신성애 “죽일까요? 살릴까요?” 나는 날이 선 금속의 차가움을 손끝으로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린다. “죽여주세요.” 소파에서 책을 뒤지던 여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하고, 여자는 죽여 달란다. 이 순간 나는 냉철한 집행관이 되어야 한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빈틈없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잘 갈아진 기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바짝 말라있는 머리카락에 촉촉이 물을 뿌려야 한다. 미세하게 숨 쉬는 머리키락의 아우성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못 들은 척 완전히 무시해버려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일 곳과 살릴 곳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람의 지붕 하나를 꾸미는 일이다. 처음 지붕을 올릴 때는..

좋은 수필 2021.10.06

발/최장순

발 최 장 순 jschoi0426@hanmail.net “발목 잡힌 정부, 야당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뉴스가 발목을 잡는다. 소파에 앉아 무심히 발을 내려다본다. 지금 나의 걸음을 막은 것은 나의 발목, 그렇다면 내 발목을 잡은 것은 누구인가. 맨발이 멀뚱멀뚱 올려다본다. “고생이 많다” 굽은 발가락이 대답이라도 하듯 꼼지락거린다. 왜 나는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 발에는 무심했을까. 나를 온전히 받쳐준 든든한 바닥. 발은 주춧돌이다. 몸의 끝자락에서 나를 지탱해준다. 수많은 뼈와 관절, 근육과 인대, 혈관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구조다. 발바닥에는 인체의 각 기관과 상응하는 반사구가 밀집되어있다. 이곳에 자극을 주면 피돌기가 좋아지고 통증이 가라앉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사람들이 발마사지를 즐기는 이..

좋은 수필 2021.10.05

거미/ 배종필

거미/ 배종필 아무리 봐도 그는 신이 내린 건축가임에는 틀림없다. 덫이라 하기엔 짜임새와 균형, 간격이 한치의 빈틈도 없어 적어도 먹잇감이 걸리기 전까진 아름답고 섬세한 고품격의 구조물이다. 눅눅한 이불을 널려 베란다 방충망을 열어놓은 사이, 거미가 들어와 베란다 들창과 회벽을 축으로 그물을 짰나 보다. 그물의 얼개가 되는 발판실과 세로실은 거미 뱃속의 점액이 공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굳어진 거미줄로, 거미의 이동을 위한 통로이면서 그물의 축을 이룬다. 그러나 정작 사냥의 비결은 가로실에 있다. 가로실은 공기와 접촉을 해도 끈적끈적한 끈끈이로 남아 걸려든 곤충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물살처럼 퍼져나간 동심원의 한가운데 블랙홀에 거미는 낮게 엎드려 이 가로실의 미동을 감지한다. 어린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

좋은 수필 2021.10.05

업어준다는 것/박서영

업어준다는 것/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하략) ―박서영(1968∼2018) 무릇 세상에는 안 해보면 모르는 일이 아주 많다. 업는 것도, 업히는 것도 그렇다. 업혀보지 않았다면, 혹은 업어보지 않았다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로 업어주고 업혀주는 것..

좋은 시 2021.10.05

일요일의 문장들/최해돈

일요일의 문장들 ​ ​ 최해돈 ​ ​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떨림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담벼락에 사는 벽돌의 나이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걸어오는 봄의 머리카락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의 속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적색 신호등이 살아있는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온종일 비행하는 먼지의 행방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쓸쓸히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까만 볼펜 뚜껑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주고받은 언어들의 동그란 모양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굴러가다 멈춘 바퀴들의 그늘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도서관 2층과 3층 사이, 계단의 묵언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방으로 들어오는 빛의 따스함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여백을 채우는 사각 유리창에 대하여 생각하..

좋은 시 2021.10.05

빈 쌀독/박희선

빈 쌀독 박희선 오래된 빈집 마당에 금이 간 쌀독 하나가 하늘을 향하여 울었다 쌀독 안에서는 아직도 식구들의 저녁 먹는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제일 크게 들리는 것은 젖이 모자라 보채던 세 살짜리 막내딸 울음, 찬바람 부는저녁이면 목발 짚은 바람들이 와서 새우잠을 자고 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가난한 굴뚝의 저녁때가 되면 키 작은 안주인은 깊은 쌀독에다 상반신을 묻고 바가지로 바닥을 긁었다 바닥 긁는 소리가 언제나 축축했다 삼십 촉 백열등 아래 저녁 밥상 푸른 아욱죽 위에는 바가지 긁던 소리가 동동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좋은 시 2021.10.05

고등어 한 손/전태련

고등어 한 손 전태련 너와 나 속을 다 내어놓고 빈 마음으로 등을 갖다 대며 서로의 몸을 받아들이지 능숙한 간재비 손에 맛깔진 한 생이 되려나 더러는 사막의 소금밭을 뒹굴기도 하겠지 내 속이 네 속이 되기 위해선 나를 다 비워야 하는 것을 바다 깊이 떼 지어 다니던 너와 나 이렇게 한 손으로 엮일 줄 어찌 알았으리 수천의 옷깃의 인연 지어 여기 지아비와 지어미로 나란히 누워 서로의 반쪽이 되었나 간 쓸개도 버리고 지글지글 구워지는 당신과 한 생이여. 함께 한 방향 바라보기 더러 숨겨둔 가시지느러미 있어 찔리기도 하겠지만 내상(內傷)은 그리 깊지 않으리라 너와 나 속을 비웠으니

좋은 시 2021.10.05

구겨진 집/김윤환

구겨진 집 김윤환 구겨진 채 여러 대(代)를 살아 온 집이 있었다 마당 귀퉁이 마다 빈한(貧寒)한 풀꽃이 피고 해마다 알맹이가 서툰 앵두가 자라고 있었다 할배는 새벽마다 헛기침으로 새들을 깨우고 어매는 식은 다리미에 숯을 넣곤 했다 얕은 처마 밑에 고인 그늘에는 타다만 숯덩이 다리미가 식솔들의 가슴을 다렸지만 화상(火傷)만이 눌러 붙어 주름이 더 짙곤 했다 안개 사이로 햇살이 길을 만들 무렵 구겨진 집은 주름이 깊었지만 먼저 길을 떠난 아버지의 발소리가 젖은 마당을 다림질 하고 있었다 식은 채로, 숨죽인 채로 어매는 오래된 집에 연신 다림질을 했었다 제비꽃이 여러 번 피고 지는 동안 할배와 아비와 어미는 주름진 집을 떠나고 아이의 눈에는 그들이 남긴 눈망울이 마당을 하얗게 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과 ..

좋은 시 2021.10.05

몽당빗자루/김자희

몽당 빗자루 ​ 김자희 ​ 베란다 그늘진 구석에 눈치만 남은 몽당 빗자루 얼마나 많은 길을 제 살 깎아 끌고 다녔는지 닳고 닳아 엉치 뼈가 보인다 허리 펴고 살아온 날이 있기나 했을까 세월의 깊은 골을 건너 헐거워진 빗자루 매듭 풀린 제 몸에 둘레길 내고 바람 들여앉혔다 긴 밤 잔기침에 무거워진 눈꺼풀 그리움 보다 더 단단한 뼈대로 문득 걸어온 길 뒤돌아본다. 그늘 고인 틈과 틈 허리 접어 구석구석 쓸던 빗자루 저녁노을 한 장 한 장 넘기면 해질녘 숨어드는 바람처럼 아직 떠나지 못한 기억들 세월의 이끼가 너무 두텁다 ​

좋은 시 2021.10.05

돌의 노래/황봉학

돌의 노래 황봉학 무너진 성벽의 돌 하나 주워와 책상에 올려놓고 그의 노래를 듣는다 세상살이 과묵하게 지켜왔던 터라 그의 노래는 저음이며 바리톤이다 눈 딱 감고 듣는 그의 노래는 천 년의 천 년을 두고 발효된 소리 비이다가 안개이다가 천둥이다가 번개이다가 절규가 된다 고대의 고대 때부터 돌로 쌓은 성벽은 무너지곤 했다 허물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 돌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은 구르기 위해 생겨난 것 돌의 자유를 속박하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성벽을 쌓았는가 두텁게 쌓을수록 돌은 심장이 멎고 노래를 멈춘다 그를 자유롭게 풀어준 강물에 물어보라 그가 구르며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책상 위에 놓인 돌에서 나는 환청을 듣는다 지층 깊은 곳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그의 환상..

좋은 시 2021.10.05

빨래/김수우

빨래 김수우 신성동 산복도로 골목 햇발 번진 담벼락에, 옥상 파란 물통 옆에 빨래들이 정직하게 사람보다 더 곰살맞게 살아갑니다 바지는 사람의 무릎보다 기특하고 셔츠는 그 가슴보다 지극합니다 환상을 지우고 지린 풍경을 덜어내고 한 잎 기적조차 털어내고 제 속살 펼쳐내는 하루 기다릴 줄 알고 흔들릴 줄 아는 빨래의 공식은 뺼셈, 쪽바람에도 빛나는 남루입니다 매일 빨아 입는 슬픔도, 자주 빨아 입지 못하는 절망도 무심하고 절실하고 겸허하여 늙을 대로 늙은 작업복 무명 시편처럼 펄럭입니다 영혼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좋은 시 2021.10.05

바다달팽이/김수우

바닷달팽이 김수우 늙은 달팽이들이 버스에 오른다 매달린 집도 삐딱하니 늙었다 공동어시장 충무동 새벽시장 자갈치시장, 남항(南港)의 비린 터널을 통과하는 30번 버스 안 닳은 관절로 끌고 온 검은 봉지들 비릿한 아침을 물컥물컥 쏟아낸다 온몸 발이 되어 엉금엉금 경사진 하늘을 끌고 가는 비린 몸뻬들 수직을 잊은 지 오래 하지만 쥐라기의 사랑을 잊지 않았으니 비늘로 된 집을 지고 초록 신호등을 매일 기다리면서 시계집 정확당 철물점 대성건재 명성약국 차례로 지나면서 낯익은 지옥도 낯선 천국도 허공처럼 걸어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진 몸 한 번도 배우지 못한 하늘의 섭리를 국밥처럼 먹는 떠난 자식 잊힌 안부를 슬리퍼처럼 끄는 저 수학적 기울기 비릿한 점액질에 묻어나는 비밀, 투명하다 무수한 찰나를 미끄러져 우리 앞에..

좋은 시 2021.10.05

옛집 /김길녀

옛집 김길녀 이제 옛집 빈터에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다 버즘처럼 썩어가는 모과와 꽃바람에도 꿈쩍 않는 늙은 감나무 옆 부르튼 살결의 산수유 가지 끝에 차마 떨구지 못했던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 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 서둘러 골짜기로 찾아드는 저녁 햇살 붉다 덩그마니 댓돌 위에 앉은 흰 고무신 바람그늘 속 그네 타는 노란 꽃귀신들 풍장으로 뼈만 남은 허물어진 담벼락 감싸 안은 초록 넝쿨은 금이 간 장독 안에서 새벽이슬을 낳는다

좋은 시 2021.10.05

이빨의 싹/신종호

이빨의 싹 ​ — 생명은 모종(某種)의 분노. 신종호 짧고 굵은 분노다. 수백만 겹의 부드러운 함성이 씨앗의 정수리를 뚫고 4월의 땅으로 솟구쳐 올랐다. 예민하고 단단한 녹색의 송곳니들이다. 검은 흙 위에 음표처럼 박혀 바람의 연주를 기다리는, 일촉즉발의 폭탄들. 길들은 소리의 뇌관이 되어 나의 무력(無力)을 탐색한다. 싹들의 분노가 나의 혈관을 점령하고, 나는 그들의 확성기가 된다. 어둡고 우울했던 심장의 벽을 물어뜯는, 낯설고 강렬한 이빨들의 아우성. 4월의 주먹들이 팽팽하다.

좋은 시 2021.10.05

부사와 인사/김애란

부사와 인사/김애란 나는 부사를 쓴다. 한 문장 안에 하나만 쓸 때도 있고, 두 개 이상 넣을 때도 있다. 물론 전혀 쓰지 않기도 한다. 나는 부사를 쓰고, 부사를 쓰면서, ‘부사를 쓰지 말아야 할 텐데’하고 생각한다. 나는 부사를 지운다. 부사는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버려지는 단어다. 부사가 있으면 문장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말의 진실함과 긴장이 약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훌륭한 문장가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부사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나는 부사가 늘 걸린다. 부사가 낭비된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문장을 고쳐 읽게 된다. 한 번은 문장 그대로, 또 한 번은 부사를 없애고. 그러곤 언제나 나중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문장에 부사가 있었다는 걸 부사가 없는 자리를 보며 기억한다...

좋은 수필 2021.10.04

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아득한 옛날, 인간들은 에우그놋이라 이름하는 작은 토룡 한 마리씩을 제각각의 우리 안에 가둬두고 살았다. 몸길이 7~8센티 몸무게 50그램 안팎의 이 원시적 생명체는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갇혀 말라 죽지 않을 만큼의 물기로 연명했다. 눈도 코도 없었고 아가미나 지느러미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캄브리아 환형동물의 변종이거나 고생대 말쯤에 출현한 초기 파충류의 조상일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였다. 축축한 피부와 두루뭉술한 정수리, 미련한 듯 유연한 몸놀림으로 보아 그것들이 과연 이무기나 자라 같은 생물과 계통학적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는 주장은 그런대로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신화학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동굴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잠룡처럼 하반신이 결박된 ..

좋은 수필 202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