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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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이정화

꼬박 이 정 화 물레 위 흙덩이에 온 마음이 놓였다. 미끄덩거리고 부드러운 촉감에 흙덩이를 불끈 잡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미어터지듯 삐져나와 버리는 것이 아쉬워 남은 것을 그러모아 다시 주먹을 쥐어본다. 시원하고 차진 흙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그릇을 만들기 위해 질흙을 잘 반죽해 떼어 놓은 덩어리를‘꼬박’이라고 부른다. 두드리고 비비고 매만지며 썰질 할 땐 무엇을 만들지 기분이 들뜬다. 조형토를 주물러 도톰한 사발이든 너른 접시든 얼추 형체가 드러날 땐 설렘도 커진다. 옆자리의 도공은 빠르게 돌아가는 물레의 속도를 잊은 듯 혼신의 기를 모아 자유자재로 형태를 넓혀간다. 꼬박은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다. 어릴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꾸었던 건 성정이 말랑했기 때문이다. 화가도,..

좋은 수필 2021.10.29

센 녀석이 온다 / 이삼우

센 녀석이 온다 / 이삼우 햇살이 넘실거리는 주말 오후다. 소파에 상체를 파묻고 TV를 보면서 졸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의 컬러링이 절간 같은 집안의 정적을 깨뜨린다. 작은 며느리 전화다. 손자 녀석이 보채는 통에 할머니 집에 오겠단다. 작은 아들네는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안방 침대에서 주말 드라마를 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아내도 손자가 온다는 전화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집 안 청소를 안 했는데….” 혼자 말하듯 웅얼웅얼한다. 당신이 청소하겠다는 의사표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옆이 있는 남편한테 부탁하는 것도 아닌 삼인칭 유체이탈 화법이다. 아내는 잠이 덜 깬 푸석한 얼굴로 거울을 보더니 안 돼! 하며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가 버린다. 노부부만 사는 집안에 비상이..

좋은 수필 2021.10.28

노년이라는 왕관 / 최장순

노년이라는 왕관 / 최장순 “저승 노잣돈을 아들 눈에 얹게 해 주게” 영웅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였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던 왕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시체를 찾아오기 위해 변장을 하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아킬레우스는 늙은 프리아모스의 부성애에 경의를 표하며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아비의 간절함은 굴종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였기 때문이다. 프리아모스는 왕으로서 권위를 누렸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서도 존경을 받았다. 늙고 힘없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트로이의 대접받는 왕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에서 늙은 왕이 보여준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늙어서 대접받는 것들. 어떤 것이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의..

좋은 수필 2021.10.28

낱낱이 아프다 / 윤영

낱낱이 아프다 / 윤영 빗줄기가 도드라지는 사이 잠에서 깼다. 사나운 꿈을 꾼 것도 같다. 가로등 빛이 격자 유리창을 투과해 천장에 기찻길을 냈다. 내가 기차를 처음 타본 것은 스물 두셋 정도였을 것이다. 모자를 거꾸로 쓰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던 친구, 김밥과 통닭을 챙겨왔던 친구. 그렇게 동갑내기 예닐곱 명이 모여 영천 은해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고대하던 동요의 풍경은 기찻길 옆 어디에도 없었다. 칙칙폭폭 기적소리를 내며 오막살이집과 옥수수밭을 스쳐 가리라 생각했건만. 꽤 무거운 충격이었을까. 여전히 기억의 언저리에 남았다. 정작 생애 첫 기차를 탔던 내 모습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하다. 날 밝으면 사라질 기찻길을 보고 있자니 지워질 일이 비단 저 그림자뿐이겠는가 마는, 동무들 생각 ..

좋은 수필 2021.10.26

손목 /고은진주

손목 /고은진주 손목은 어떤 상징인가 최후의 결심이 생채기를 내는 곳이거나 톡톡 튀는 피의 압력이 움켜쥐는 힘을 손으로 보내는 곳. 안으로 접으면 드러나는 몇 줄 골 깊은 주름을 숨기고 있는 곳. 마음 없이 끌려갔던 손목. 그 경험을 뿌리쳤던 손목. 개인용 시간을 부리는 곳 또는 소매를 덧대고 걷어 올리던 곳. 한 십 년쯤 된 가출이 돌아와 서성거리던 골목 어귀 같기도 하고 햇살을 등에 업고 가는 아버지의 뒷짐 같은 것. 생의 맥박이 또박또박한 지점 이쪽과 저쪽 날씨 짚어주기도 한다 부질없이 걷어붙이다가 오해를 사기도 하고 철들면 여지없이 공손해지는 곳. 손목 비틀리기 전까지 실토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손목으로 모이고 두 손목이 묶이면 발목까지 엉키는 자리 대체로 가늘어서 만만하게 다가가게 되는..

좋은 시 2021.10.25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하략) ―김기택(1957∼ )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 중간에 ‘가을꽃’이라는 글이 있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이 영민한 소설가는 항상 옳은 ..

좋은 수필 2021.10.25

그 눈빛 / 안춘윤

그 눈빛 / 안춘윤 직업의 특성상 내밀한 대화나 상담을 하다 보면 모든 삶은 긴 서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삶도 평이하지 않았고 특별했으며, 귀하지 않은 인생은 없었다. 어떤 삶도 완벽하지 않았고 누구도 풍랑 없이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타인의 인생에 내 삶을 반추하면서 안달하며 집착하던 것들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말기 암처럼 병이나 사고로 생의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 사람을 만나면 말길을 찾기가 힘들었다. 살고 싶다는 강렬한 본능으로 더 선명해지는 의식은 오히려 고통스럽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절망 앞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버티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아주 오랜 기억 속에서 나에게 당신의 마지막 결정을 의뢰했던 어르..

좋은 수필 2021.10.25

시월이 가고 있다/이복희

시월이 가고 있다/이복희 가을은 겨울보다 더 쓸쓸한 계절이다. 그러기에 가수 최백호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라고 절규하지 않았을까. 열정이란 식고 나면 그런 것이다. 여름의 뜨거움이 갈 듯 말 듯 미련을 떨고 있지만 가을의 전조처럼 이미 바람결부터 달라졌다. 사실 여름은 견뎌내는 일만 해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거나 감상에 빠질 겨를이 없다. 시월이 깊어지면 구멍이라도 숭숭 뚫린 것처럼 가슴으로 바람이 마구 불어간다. 뜨거워서 허덕이는 여름이나, 한기에 움츠리는 겨울에는 존재감 없던 감상(感傷)이 늦가을엔 슬금슬금 사람을 흔들어댄다. 불현 듯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산에 신도시가 조성되기 전 잠시 행신리에 살 때였다. 지금은 고층아파트들이 또 ..

좋은 수필 2021.10.23

습기 혹은 눈물 / 박월수

습기 혹은 눈물 / 박월수 신혼시절, 내게는 말 잘 듣는 세탁기 '예예'가 있었다. 그전까지와는 달리 전자동으로 만들어져 동작단추만 눌러 놓으면 저 혼자 빨래를 했다. 하지만 거기엔 치명적이 결함이 있었다. 전원 단추가 포함된 계기판은 습기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세탁실이 따로 없는 탓에 세면장 습기를 뒤집어 쓴 '예예'는 차츰 말을 듣지 않더니 얼마 못가 중병이 들었다. 몸에도 물기가 차면 마음에 한기가 들고 나중엔 앓아눕게 된다는 걸 그 무렵 알게 되었다. 겉만 번듯하고 속은 허술한 이국풍의 집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집을 한 번 보고 대번에 전세를 들었다. 마주 보이는 언덕에 유채꽃이 살가운 봄볕을 이고 푸지게 피어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봄날일 것 같았다. 나는 차이코프스키와..

좋은 수필 2021.10.22

소리막골 / 정서윤

소리막골 / 정서윤 골 초입에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들이 잎을 버린 산등성이는 마치 용이 꿈틀대듯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앞서 길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 계곡의 야윈 물소리는 얼음 속으로 가늘게 속삭이며 골짜기 밖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골 안쪽으로 올라갔다. 능선이 구불구불 걸어가다 멈춘 것 같아 잡고 가던 길을 잠시 놓고 고개를 들었다. 골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언제부터 전해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곳은 소리막골이라고 앞서가는 이가 말했다. 제법 널찍한 터를 잡고 나직하게 엎드려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외로워 보인다. 마당에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충직하게 버티고 선 채 나그네를 맞았다. 누군가가 거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집은 비어있었다. 소리꾼 ..

좋은 수필 2021.10.22

아버지의 손 / 박정선

아버지의 손 / 박정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죽음과 아버지를 연관시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주실 줄 알았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주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성공을 미뤄두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약주를 사 들고 자주 찾아뵈었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엔 바람에 찢긴 대로 비가 오는 날엔 비에 젖은 채로 성공하지 못한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쑥불쑥 아버지 앞에 보여드렸을 것이다. 이젠 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버지의 손을 닮은 손을 보러 호미곶으로 달려간다. 동해안 포항 호미곶에 가면 떠오르는 해를 받치듯이, 또는 공을 쥐듯이 손가락이 안으로 구부러진 손이 있다. 손은 오른손..

좋은 수필 2021.10.20

단추를 달며/정해경

단추를 달며 정해경 벌써 며칠 째,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가 문틀에 매달려 드나들 때마다 춤추듯 흔들거린다. 진즉에 말랐으니 다림질 후 장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단추 하나가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원상복구만을 기다리고 있다. 단추를 단 다음 다시 빨아야 될 것 같다. 괜한 내 눈총에 더러움이 더 묻어난 것 같아서다. 갈아입는 셔츠 대열에서 이탈한 채 방치되고 있는 옷이 딱해 옷걸이를 빼내고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상해 남편과 관련된 건 가급적 눈길을 피했다. 그 와중에 와이셔츠의 단추가 실이 풀려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셔츠는 영문도 모른 채 한참동안 문틀에 걸려 벌을 섰다. 그러고 보니 까닭 없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솔기가 벌어진 것을 보고도 그냥 서..

좋은 수필 2021.10.20

손빨래하기 / 정해경

손빨래하기 / 정해경 빨래거리가 욕실 앞에 쌓여있다. 세탁기에 넣을까 손세탁을 할까.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세탁기로 빨려면 같은 색깔끼리 분리해야 하고 양이 웬만큼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손으로 빨면 귀찮고 물 낭비가 심할 텐데, 어떻게 할까. 세탁물들은 현장에서 잡힌 죄인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묻혀 들인 더러움이 어찌 눈에 뵈는 것뿐이랴. 죄인을 닦달하여 자백을 직접 받아내는 것도 짜릿하지 않을까. 힘 뒀다 뭐하나. 그래, 손으로 반 번 빨아보자. 피의자들의 행태도 가지가지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줄근해져 기가 꺾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청바지처럼 뻣뻣하게 오히려 심이 박히는 놈들도 있다. 더러는 아예 풀이 죽어버려 한 손안에 쥘 정도로 존재감이 작아..

좋은 수필 2021.10.20

꺼꾸리/김정옥

꺼꾸리 / 김정옥 얼마 전부터 허리가 안 좋았어. 병은 자랑하랬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냈더니 이구동성으로 허리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거야. 걷는 것도 좋고 몸을 거꾸로 뒤집는 것도 허리에 도움이 된다더라고. 천생 겁쟁이인 나는 뒤집는다는 게 무척 두려웠어. 어릴 적에 물구나무를 서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언감생심 어림없었거든. 걷는 것이 허리 근육 강화에 좋다니 그거야말로 참 쉽겠다 싶어 당장 실천했지. 뒷산을 걸었어. 정상 언저리 평평한 곳에 이르니 여러 운동기구가 있는데 그중에 ‘꺼꾸리’가 눈에 확 뜨이더군. 꺼꾸리는 기구 아래에 발을 걸고 천천히 뒤로 넘어가면 되잖아. 그런데 몸이 뒤집어질수록 쑤셔 박힐까 봐 겁이 나지 뭐야. 도저히 혼자 힘으로 할 수가 없었어. 든든한 옆지기의 도움으로 겨우겨..

좋은 수필 2021.10.20

차력사/유홍준

차력사[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7〉 돌을 주면 돌을 깼다 쇠를 주면 쇠를 깼다 울면서 깼다 울면서 깼다 소리치면서 깼다 휘발유를 주면 휘발유를 삼켰다 숟가락을 주면 숟가락을 삼켰다 나는 이 세상에 깨러 온 사람, 조일 수 있을 만큼 허리띠를 졸라맸다 사랑도 깼다 사람도 깼다 돌 많은 강가에 나가 나는 깨고 또 깼다 ―유홍준(1962∼) 얼마 전에 북한군이 차력을 선보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맞다. 차력은 놀랍고, 차력사는 강하다. 요즘에 차력은 무예보다는 묘기에 가깝지만 그래도 힘이 센 사람만이 행할 수 있다. 이런 것은 강한 자의 차력, 그리고 소수의 차력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약하디 약한 차력사도 있을까. 소수가 아닌 다수가 하는 차력도 있을까. 나는 ..

좋은 시 2021.10.18

무싯날/이정화

무싯날 이정화 아무날도 아닌 날이 아니었다. 휑하던 장터에 다섯 손가락을 꼽으면 전이 펼쳐진다. 그날이 오면 돈이 돌고, 곡식도 돌고, 인심도 돌아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제사장 보러 진고개를 넘어 온 할배의 쌈짓돈과 이른 새벽 황장재를 넘어 온 자반고등어는 주인을 바꾼다. 장터에 해가 떠오른다. 높다란 장대에 노란 고무줄, 흰 고무줄, 검정고무줄을 두툼하게 매달아 든 사내가 다가온다. 설핏 보면 사람 없이 긴 고무줄 장대가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 구경꾼이 겹겹이 둘러선 곳에는 원숭이가 곡예를 넘는다. 자발없는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은 여자아이 꽃핀을 낚아채자 아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친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포라이터와 돌, 손전등과 커다란 건전지와 잡동사니를 부려 놓고 파는 ..

좋은 수필 2021.10.15

앉은뱅이 밥상/정영선

앉은뱅이 밥상 ​ 정영선 ​ 오늘은 식탁을 놔두고 낡은 상에 밥을 차려 먹는다 청암동 비탈진 곳 구멍가게 뒷집 문간방과 가난해도 좋았던 나의 신혼과 함께 먹는다 연탄불에 갓 지은 냄비 밥과 석유곤로에 끓인 국과 소찬 몇 가지 정갈하게 앉히고 서른 살 신랑 앞에 다소곳이 내놓았던 작은 밥상 밥은 설고 국은 짜고 반찬은 싱거웠지만 밥상 앞에 마주 앉은 신혼 입맛은 딱, 두 가지여서 고소하거나 달콤했다 탱탱했던 내 얼굴이 늘어지고 골이 생겼듯, 옻칠 발라 반질거렸던 상 얼굴도 찰과상에 다리 관절은 삐걱거린다 우린 사이좋게 나란히 늙어간다 훤칠한 6인용 식탁에 곳간 열쇠 다 내주고 조용히 뒷방으로 물러난 그는 알고 보면 집안 내력 다 꿰는 우리 집 상床 노인이다

좋은 시 2021.10.14

돌담, 쉼표를 찍다 / 허정진

돌담, 쉼표를 찍다 / 허정진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마시게’* 집과 집으로 이어진 돌담이다. 담장 너머 안주인의 생이 조각보처럼 바느질된 것 같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퍼즐처럼 삶의 편린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진 것 같다. 채마밭처럼 푸른 이끼로 덮인 돌담들이 세월의 눈가에 주름진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돌담 위로 호박넝쿨이 느릿하게 타고 오른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의 언덕이고 기둥이었던 것처럼 오래된 생을 끌어안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이 탈출구를 찾아가는 미로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순간 나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선다. 귀를 기울이고 코를 벌렁거려본다. 뭔가 알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향과 표식보다 자기에게 익숙한 소리와 냄새를 쫓..

좋은 수필 2021.10.13

궤적(軌跡) /윤남석

궤적(軌跡) /윤남석 오동나무 줄기는 뒷날개 보호망 아래쪽에서 앞날개 보호망 위쪽으로 관통되었다. 굵은 줄기는 전․후망 고정 장치를 사정없이 찢었고, 보호망의 외주연테는 표피에 잔인한 궤적을 퍼렇게 그리고 있다. 마치 오동나무 토막이 유선형의 날개를 꿀꺽 삼켜버린 듯하다. 축받이에 달려있는 날개는 강하게 회전하며 찰나적으로 예리하게 후벼 판 듯 박혀 있다. 전동기가 회전축에 붙은 날개를 힘껏 돌리려했지만, 오동나무는 몸통이 심하게 베이면서도 악물스럽게 날개의 회전을 막아선 것처럼 보인다. 오동나무는 복부에 박힌 그 플라스틱 날개 때문에 여태껏 겨워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전․후망 고정 장치가 터지면서 질긴 스테인리스 재질의 외주연테가 오동나무 줄기를 심하게 옭아매고 있다. 통고痛苦의 여파가 얼마나 컸으면,..

좋은 수필 2021.10.11

헌책방을 읽다/김이랑

헌책방을 읽다 김이랑(김동수) 텅 빈 가게, 빛바랜 간판만이 여기가 한때 버림받은 책들의 처소였음을 알린다. 아무런 안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지도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발품을 보태 법서를 사던 시절부터 허기를 채워준 곳인데, 허전한 걸음으로 나는 다른 보물섬을 찾아 떠난다. 헌책방의 질서는 뒤죽박죽이다. 정해진 자리는 형식일 뿐 계급이나 서열이 없다. 펄벅의 대지 위에 한국의 야생화가 피고 백과사전에 눌린 시집이 숨을 못 쉬겠다고 엄살을 떠는가 하면, 돈키호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창을 겨누며 어서 칼을 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큰스님의 어깨에 발을 척 걸친 동화를 보며 명랑만화가 깔깔거리고 명심보감이 옆에서 웃음을 꾹 참으며 앉아있다. 법전을 깔고 앉은 사형수의 참회록과 명작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좋은 수필 2021.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