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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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 박기옥

발 / 박기옥 신문을 보니 미수(88세)를 맞은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을 위해 발장갑을 뜨고 있는 사진이 나와 있다. 남편의 발이 하루하루 차가워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뜨개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연세 또한 가볍지 않으신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돋보기를 걸치고 남편을 위해 한 코씩 힘들게 뜨개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에스키모인들의 풍습 하나를 떠올린다. 그들의 신발은 장화다. 추운 지방에서 발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그 폐쇄성 신발은 발목을 감싸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해변이나 빙설(氷雪), 진흙, 모래땅에서 매몰되거나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벗기다 불편하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의 발을 구두 속에서 뽑아내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좋은 수필 2021.09.23

발/류귀숙

발/류귀숙 어둠이 산그늘처럼 내려와 앉으면 종종대던 하루가 저물어 간다. 골목길 돌아온 바람결 따라 지친 발을 끌고 하루를 마감한다. 떡시루 같은 지하철을 빠져나오며 헝클어졌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본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한 발이 숨죽이며 간신히 뱉어내는 신음 소리가 들린다. 통통 부은 두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그날의 피로를 날려 보낸다. 손으로 살살 문지르고, 꾹꾹 누른다. 발가락 하나하나를 펴서 그 속에 묻어있는 시름의 때를 벗겨낸다. 아무리 봐도 예쁜 곳을 찾을 수 없다. 자꾸만 불어나는 나의 체중을 받쳐 들고 얼마나 먼 길을 왔는가! 멋없이 커 버린 발이 항변할 것 같아 타박하는 말을 입속에다 가두고 문을 잠근다. 엄지발가락 아래로 조금 내려오니 낙타 등같이 불룩한 등걸이 혹처럼 붙어 있다...

좋은 수필 2021.09.22

뒤웅박 / 윤 미 애

뒤웅박 / 윤 미 애 풍경 밖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감빛 노을이 발묵처럼 번지고 먼 산은 조금씩 어스름에 잠긴다. 뒤란 대숲에 내려앉은 바람의 옷자락이 차갑다. 아비의 손을 잡은 아이가 구름 위의 새떼를 올려다본다. 이윽고 초가 한 칸이 느티나무 뒤에서 고즈넉해질 때, 닭 울음소리가 길게 낙관을 찍는다. 나는 그제야 붓을 내려놓으며 훅!하고 참았던 숨을 뱉어낸다. 유년의 고향 집 싸리 울타리엔 크고 작은 박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이른 봄, 씨앗을 심기 무섭게 새싹이 나면서 넌출은 가뿐하게 울을 넘었다. 초가지붕 위로 올라간 덩굴은 초여름쯤엔 꽃단장하듯 흰 꽃을 수놓았다. 긴 장마와 따가운 햇살을 이기고 가을이 되면, 박들이 울타리며 처마 끝에 박쥐처럼 올망졸망 매달리곤 했다. 아버지는 서둘러 박을 따 내..

좋은 수필 2021.09.21

화로/허숙영

화로 / 허숙영 전통 찻집 장식장 안에 정좌하고 있는 놋쇠 화로를 들여다본다. 화로는 텅 비었으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듯하다. 거리를 뒤채는 낙엽은 죄다 쓸어버릴 기세의 겨울바람에 등 떠밀려 들어간 그곳에서 화로는 차향보다 먼저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동그랗게 부른 배 둘레를 돋을새김한 당초문이 허리띠를 두르고 세 개의 발로 당당하다. 부식이 시작되어 우둘두둘한 생의 에움 흔적은 힘든 세월을 이겨냈다는 증거이자 훈장이다. 한때는 불덩어리를 가슴에 품은 채 아이들의 발갛게 언 볼과 곱은 손을 펴주는 일에 열정을 쏟은 화로였다. 마음깊이 꾹꾹 눌러 다져넣은 상처야말로 그를 한없이 강하게 만들어 주저앉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보다. 어쩌면 대장간 모루 위에서 담금질 될 때부터 예견된 일생이었는지도 ..

좋은 수필 2021.09.21

자두의 계절이 돌아왔다/김정화

자두의 계절이 돌아왔다/김정화 일 년을 기다렸다가 먹는 과일이 있다. 딸기의 계절을 거쳐 수박과 포도의 배릿함을 가로지르고 오는 어질어질한 향이다. 풋여름 노을빛을 닮은 색, 한 입 베어 물면 코끝이 찌릿하고 눈허리가 시어온다. 그 과육은 혹독했던 입덧의 기억까지 소환시키는 힘을 지녔다. 자두의 계절이 왔다.우리나라 자두는 유월 중순이면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해마다 달력의 하짓날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첫 자두인 대석 자두를 기다린다. 대석 자두는 알이 작고 딴딴한데 아삭하고 새콤달콤하여 내겐 이것이 진정한 자두의 맛이다. 하지만 출하 시기가 짧아 때를 놓쳐버리면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첫 자두 맛을 넘기면 속살이 연한 후무사 자두가 입을 즐겁게 해 준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

좋은 수필 2021.09.21

오막살이 집 한 채 / 김정화

오막살이 집 한 채 / 김정화 올 여름. 나는 뜻밖의 횡재를 했다. 늘상 마음 속으로만 갈망해 왔던 오막살이 집 한 채를 갖게 된 것이다. 마당 앞으론 청계류가 흐르고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그림 같은 집이다. 지붕 위에 크고 작은 박들이 소담하게 열려 있고, 장독대엔 올망졸망 항아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는 풍광은, 오매불망 꿈속에서 그리워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금방이라도 정지문이 열리면서 하얀 무명베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할머니가 함지박 가득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옥수수를 담아 들고 나올 것만 같고, 갓 바른 탱글탱글한 창지문을 열고 하얀 수염의 산신령 같은 할아버지가 봉당으로 내려설 것도 같았다. 아니 까마득한 내 유년이 거기 냇물 속에, 장독대에, 창호문에 그대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가는 ..

좋은 수필 2021.09.21

달을 새기다 / 김정화

달을 새기다 / 김정화 주인장이 기막히게 전을 구워낸다. 지인을 따라왔다가 알게 된 이곳은 애주가라면 지나는 길에 한잔 걸치기 딱 좋은 선술집이다. 집 근처에 있어 반가운 손님이라도 오면 저절로 찾게 되는 곳이다. 드문드문 들렀으나 한 번도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이 나는 참으로 편하다. 주로 말을 하는 직업이다 보니 술집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싶은 심정을 헤아려 주기라도 하듯이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안줏거리 장만에만 손길이 바쁘다. 그러니 민얼굴에 보풀진 스웨터만 걸쳐도 민망치 아니하고 누구와 가든 무슨 대화를 나누든 눈치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면 딱히 튀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내 외양이 무척 다행이라 여겨본다. 나 또한 기억력이 흐릿하고 눈썰미가 신통찮다. 사람이나 물고기나 나무의 생김새를 들..

좋은 수필 2021.09.21

누군가의 남해/박지웅

누군가의 남해 박지웅 꽃분을 깼다 삽시간에 신발 벗겨진 꽃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꽃은 생전 처음 제 발을 보았다 사막으로 쫓겨난 쓸쓸한 발이었다 마당 밖까지 맨발로 내쫓긴 날 나는 풀어진 보자기 같은 발로 겨우 꽃나무 아래까지 걸어갔다 발등에 하염없이 꽃그늘을 얹도록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길을 두고 머뭇거리는 일이 잦았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밀어내느라 그랬을 테지만 발아래 애먼 흙바닥만 문지르던 날 나도 누군가의 길을 허물었을 것이다 저 꽃분 속에도 꽃이 연 길이 있을 것이다 가만히 꽃의 발을 모아 신발을 신겨준다 헐거운 신에 맞추느라 꽃이 뒤꿈치를 몇 번이나 들었다가 놓는다 매실나무 아래 꽃신 한 짝 내려주는데 꽃배 같았을까 목깃에 묻은 흙 털어주니 때맞춰 멀리 나갔던 매실그늘이 돌아..

좋은 시 2021.09.21

자루의 등뼈/이정희

자루의 등뼈 이정희 커다란 입 하나 가진 자루는 바닥의 비애를 잘 안다 바닥의 바닥이 중심을 잃는다 등을 곧추세우는 것은 바닥을 헤어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 자루는 먹어치운 만큼 고스란히 토해놓는다 그건, 그의 일 입 하나로 하루를 산다 등의 너머는 그의 것이 아니어서 힘껏 달려가면 늘 뒷걸음친다 한 뼘의 직립도 세우기 힘든데 억지로 세운 등뼈는 가끔 고꾸라진다 그때마다 하루는 쭈글거린다 무얼 담아도 묵묵한 자루 마음껏 먹어도 체하지 않는다 자루에서 뼛조각 서걱거린다 혼자 세울 수 없는 헐렁한 뼈들 여럿이 함께 기대면 쉽게 세워진다 하루치의 시간과 바람이 들어 팽팽하게 조여 올 때 질기고 억센 바닥을 딛고 가파른 등뼈를 세운다 ​알고 보면 밤과 낮도 자루의 먹이다

좋은 시 2021.09.21

풍차 / 김영식

풍차 / 김영식 바람을 독법 하는 저 수직의 삶이라니. 표표한 공중의 벼랑에 뜨거운 심장을 걸어놓고 제 삶의 중심을 응시하는 고독한 아나키스트. 거인처럼 우뚝 솟아 수평선 너머를 예지하는 수도승의 모습으로. 바람의 시원始原이자 바람의 완결자인 그는 바람이 머무는 육체이자 바람의 정신을 이루는 뇌다. 찰나 속에서 영원을 꿈꾸며 영원 속에서 찰나를 완성하는 은둔의 철학자이다.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과 강하고 약함과 생성과 소멸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는 시간의 아메바다. 빛나는 비굴절의 이마를 가진 그는 한 번도 삶을 등지거나 회피하거나 우회한 적이 없다. 직립의 우직함은 언제나 정공법을 선택한다. 변화지향주의자인 구름은 그런 그를 보고 평면적이라거나 비타협적이라며 비판하지만 그건 천성이 정직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 2021.09.19

혀, 큰주부홍부전나비 한 마리/김영식

혀, 큰주홍부전나비 한 마리 / 김영식 이 나비는 입속에 살고 있다. 큰주홍부전나비 한 마리. 날개가 하나 뿐인, 외눈박이 키클롭스처럼. 그 날개에 찍힌 자줏빛 돌기. 모든 돌기는 외롭다. 천 길 벼랑 끝에 둥지를 틀고 날마다 잃어버린 제 날개를 찾아디니는. 비익조는 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여서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 날지 못하는 새, 날지 못하는 나비, 평생 한쪽 날개로만 살아가는 것들의 지난한 운명. 선천적 슬픔. 외날개를 가진 큰주홍부전나비는 언제부터 캄캄한 어둠 속에 혈거穴居하고 있었던 걸까?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수컷은 앞, 뒷날개 외연을 제외한 전체가 주황색으로 되어 있어 무늬가 없다. 풀 잎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자주 일광욕을 즐긴다. 암컷은 앞날개 윗면에 검은점무늬..

좋은 수필 2021.09.19

소라 여인숙/김영식

소라 여인숙 / 김영식 여인숙이 많은 시절을 건너왔다. 지금은 여관이나 모텔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내가 살던 항구도시에는 여인숙이 즐비했다. 삶에 대해 고뇌하던 이십대의 한때 외딴 바닷가 여인숙에 잠시 투숙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처럼 삶에 대해 진지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시간을 떠올리며 쓴 시가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인 `소라 여인숙'이다. ​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여인숙에 한 번도 들지 못한 사람과는 生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채송화며 봉선화 핀 마당을 지날 때면 발자국마다 따라오던 둥근 파도 소리. 등 굽은 여주인이 시큰둥하게 내미는 숙박계에 세상에 없는 주소를 꾹꾹 눌러 적을 땐 낡은 페이지마다 푸드득! 수천 마리..

좋은 수필 2021.09.19

나도 수필작가가 될 수 있다/대전시민대학강좌

※ 2021년 대전시민대학 4학기 수강신청 알립니다※ 강좌: 나도 수필작가가 될 수 있다 수필은 우리의 삶을 의미화하는 문학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나를 찾고 자아실현를 할 수 있습니다. 강돈묵 교수님의 지도 아래, 자신의 삶을 글로 펼치실 분, 인생을 재발견 하실 분 환영합니다. 대전시민대학 이론반 : 2021.10.14(목)~2021.12.2(목)/총 8주 수업시간: 목요일 오전 10:00~12:00 강좌명: 나도 수필 작가가 될 수 있다 *수강신청기간 : 9월 27(월) 09:00~10.6(수) 17: 00까지 *개설확정: 신청인원 7명 이상 개설 *신청방법: 인터넷접수 (http://www.dile.or.kr/CrsCreCrsHome.do?cmd=listSmCourse&svcCd=SM) 연구실 심화..

좋은 수필 2021.09.17

밤을 주우며 / 김만년

밤을 주우며 / 김만년 이맘때의 숲은 풍성하다. 열매들은 실팍하게 살이 오르고 다람쥐들은 겨울 양식을 모으느라 분주하다. 툭툭, 시간의 여백을 타고 알밤들이 떨어진다. 몇 알은 개울로 굴러가고 몇 알은 여뀌 풀 틈새로 숨는다. 나는 밤의 행방을 쫓아 풀섶으로 몸을 낮춘다. 반지르르 윤기 나는 놈은 금방 출타한 알밤이다. 어쩌다가 삼형제 밤이라도 만나면 횡재를 한 기분이다. 성급하게 떨어진 밤송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아직 설 여물었는지 밤은 두피를 바짝 밀착시키고 완강하게 버틴다. 밤송이가 손마디를 따끔따끔 찌른다. 가시를 세우는 폼이 둘째 녀석의 모습과 흡사하다. "여보 우리도 반려견이나 한 마리 키울까. 반려견은 꼬리치는 맛이라도 있잖아." 얼마 전 퇴근 무렵 아내가 나에게 불쑥 던진 말이다. 평소에..

좋은 수필 2021.09.16

조선 개똥이 / 이난호

조선 개똥이 / 이난호 ​ ​ 언제부터인가 일상용어 속에서 알게 모르게 금기시되어 자취를 감춘 단어 중에 '조선'이란 말이 있다. 어떤 단어 앞에 이 '조선'이란 말이 붙으면, 마냥 소박한 것, 가장 우리 것다운 것으로 쑥 다가왔고 얼마쯤은 진국이라는 다소 예스런 의미의 어떤 향수까지 묻혀와 단박 유년기 저쪽을 기웃거릴 수 있었는데, 가령 '조선 참외' 하면 개구리참외나 작고 동글반반하고 샛노란 참외를, '조선무' 하면 짤막하고 통통하고 속이 단단해서 날것으로 먹기는 맵고 빡빡하지만 일단 김치류로 갈무리되면 긴 겨울을 나고도 다음해 한여름까지 생생하니 든든한 밑반찬으로 버텨주는 무를 일컬었던 것이다. 조선간장은 어떤가. 햇콩을 오래 삶아 빚어 띄운 메주로 역시 제 입맛에 간 맞춰 담근 재래식 장, 이곳에..

좋은 수필 2021.09.16

비대면시대의 수필문학/강돈묵

비대면시대의 수필문학 강 돈 묵 dmkang892@hanmail.net 1. 들어가기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리고 그것은 천고의 진리로 여기며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의 문화가 태동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다 쇠퇴하게 되면 경쟁관계에 있던 새로운 문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일찍이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헬레니즘 문화가 한 시대를 끌고 가다가 쇠락하자 신 중심(神中心)의 헤브라이즘 문화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고, 다시 인간 중심, 신 중심의 사상이 순번을 바꾸어가며 이어져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바로 역사가 돌고 돈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실례로 여겨졌다. 그동안 이러한 사조 내지 문화의 교체는 장기간의 세월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나, 최근에 와서는 그 패러다임마저 무너..

수필 이론 2021.09.15

굴뚝새/강돈묵

굴뚝새/강돈묵 떨기나무의 키를 넘지 않는다. 바위의 옆구리를 스치듯 질주해도 허리쯤을 가로지른다.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그 이상 높이 나는 법이 없다. 이런 낮은 자세는 제어된 삶 탓인지, 스스로 겸손의 길로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전생의 죄 때문인가. 이생의 허물이 너무 큰 탓인가. 언제나 고개 숙이고 땅만 바라보며 나댈 뿐이다. 그것도 대낮에 나대는 일은 거의 없고, 저녁 무렵 남들 다 귀가한 후에 골바람처럼 지나간다. 저녁연기 자욱한 부엌 궁둥이로 돌아간다. 늘 칙칙하고 음습한 곳만 찾아다닌다. 몸에 두른 옷가지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그을음 가득한 굴뚝에서 빠져나왔는지 몸빛이 어둡다. 작은 몸뚱이지만, 늘 꼬리를 추켜세우고 촐싹거리는 모습이 바라보는 눈까지 불안하게 한다. 금시 큰일이라도..

좋은 수필 2021.09.15

칠七의 생각 / 강돈묵

칠七의 생각 / 강돈묵 분명 이는 십진법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 배운 이 십진법은 지금까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십十이면 가득 찬다. 아니 가득 찬 것은 모두 십으로 보인다. 만족도 십이고, 기쁨도 십이고, 슬픔도 십이다. 백두산도 십이고, 남극도 십이고, 북극도 십이다. 보름달도 십이니, 삶도 십이다. 그래서 나는 아홉만 되어도 포만감이 밀려와 나머지 공간 하나에 애착을 갖게 된다. 이런 까닭에 칠七을 만나면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굳이 꽉 차는 것보다야 좀 여유가 있는 칠이 훨씬 멋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안타까움은 감출 수가 없다. 가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십진법을 배우지 않고, 십이진법이나 십사진법 정도를 익혀서 가슴에 ..

좋은 수필 2021.09.15

선/강돈묵

선 강 돈 묵 점들이 모여서 손을 잡으면 선이 된다. 그 점들이 하나의 통제 속에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모이면 직선이 되고, 자유분방하게 어깨동무하면 곡선이 된다. 그래서 직선은 경직되어있고, 곡선은 자유와 부드러움을 표방한다. 직선은 언제나 최대치를 요구한다. 직선은 일정한 수의 점들이 모여서 가장 길게 늘어설 수 있는 것을 바라고, 그 대열에서 이탈하면 질서에는 엄청난 파괴를 초래한다. 직선에 가담된 점들은 이토록 긴장된 안주를 위하여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 된다. 곡선은 직선과는 전혀 다르다. 언제나 느긋한 마음이어서 경직이란 찾아볼 수 없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최소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개성을 발휘한다. 언뜻 보기에는 질서라고는 없는 듯하면서도 선의 끝남이 없이 이어진다...

좋은 수필 2021.09.15

모음삼각도/강돈묵

모음삼각도 강 돈 묵 dmkang892@hanmail.net 한글사전을 들여다본다. 자음들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줄을 서 있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열 네 개의 자음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본자이든, 가획자이든, 아니 이체자이든 다른 것의 자리를 넘보거나 탐하지 않는다. 그들이 꼼지락거리면서도 사전 속에서 자리한 모습은 개미의 질서처럼 신기하다. 한참을 훔쳐보던 나는 신기하게도 지켜야 하는 규율을 무시하고 제 맘대로 나서는 놈을 발견한다. 맨 뒤에로 밀렸던 ㄲ, ㄸ, ㅃ, ㅆ, ㅉ 등이 본실 소생의 ㄱ, ㄷ, ㅂ, ㅅ, ㅈ의 곁으로 가서 서출을 숨기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빙긋이 웃는다.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모음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

좋은 수필 2021.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