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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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동행 / 조현미

느린 동행 / 조현미 내겐 아주 오랜 벗이 하나 있습니다. 사는 일이 버겁거나 외따로 선 나무처럼 쓸쓸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입니다. 잡념이 너무 웃자라 부려놓을 곳이 필요할 때도 그 친구를 찾아갑니다. 마치 피접하듯 말입니다. 최상의 위로는 가만히 들어주는 게 아닐는지요. 일찍이 나의 외로움을 읽은 그는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입니다. 등을 쓰다듬거나 찬 이마랑 뺨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안아줄 뿐입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안아주는', 어쩌면 그것이 그이만의 '사랑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살아오는 동안 참 많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한때, 사랑보다 우정을 앞세운 날도 있었고요. 서로를 지란芝蘭에 견주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청할 수 있는, 김치 냄새가 나더라도 흉보지 않..

좋은 수필 2021.09.09

나침반/김순애

나침반 김순애 여행 가방에서 나온 꾸러미가 제법 묵직해 보였다. 얼마나 정성 들여 포장을 했을까. 겹겹이 싸인 비닐을 풀고 포장지를 벗기는 남편의 손놀림이 조심스럽다. 상기된 낯빛이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와 같다. 나침반이었다. 하나같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된 것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무와 구리로 만들어진, 갈색 빛이 도는 크고 작은 나침반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모양, 거북이 모양, 북극성이 박힌 것, 해시계가 달린 것, 심지어 그 하나에 백 년의 달력이 새겨진 것도 있었다. 저것들을 구하려고 얼마나 거리를 누비고 다녔을까. 이국땅 낯선 골목을 떠도는 남편의 형상이 나침반 바늘과 겹쳐졌다. 남편은 4년째 인도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처음 인도 발령이 났을 때 그는 많이 망설였다...

좋은 수필 2021.09.08

뾰족구두 외

뾰족구두 / 김남섭 그녀는 잠자리 꼬리 닮은 장대 위를 걷는다 걸음걸이가 부자유스럽다는 것 말고는 장딴지의 알통만큼이나 생이 당당하다 뒤축이 공중부양 할 때마다 현기증이 날 때도 있지만, 편안한 발꿈치 저 편에는 골병 든 발가락들이 넝쿨처럼 엉켜서 산다 걷기만하면 보도블럭에 딱총을 쏘는 여자 민들레처럼 낮아, 찔레처럼 치솟고 싶은 여자 증거처럼 발자국소리 내 던져버리고 발가락을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여자 세상을 휘저으며 걸을 때마다 삶의 껍데기를 곰보딱지로 만드는 여자 신발 / 이종완 오고감이 선명한 먼지 꽃 피어나는 그 길 위에 찍힌 발자국 지우고 또 새기며 가을빛 곱게 물들어 가는 어느 날 오후 그대도 나와 같이 단풍잎 같은 발자국 찍으며 숲길을 걸어갑니다 박물관에서 / 최준선 고요하게 앉아서 주인..

좋은 시 2021.09.07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안도현

라 마 승 1983, 148*92 / 운보 김기창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안 도 현 밤새워 화투판에서 밑천 다 날리고 새벽 마루 끝에 앉아 냉수 한 사발 들이키는 사람처럼, 다 벗어던지고 몸뚱이 하나 남은 겨울나무처럼 스스로 벌거벗기 위해 서 있는 것들이 있으니, 오로지 뼈만 남아 몸 하나가 밑천인 것들이 있으니, 2009년 올해 당신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것으로 부터 버림 받았다고 해도, 희망 같은 것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절망이 많으니, 절망을 재산으로 삼고, 절망으로 밥을 해먹고, 절망으로 국을 끓일 각오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는 흔쾌히 반성문을 쓰고, 살아갈 날들을 위해서는 빛나는 예지의 선언문을 쓰고, 누가 뭐라 해도 후진하는 ..

좋은 시 2021.09.07

발/권기만

발 권기만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권기만: 1959년 경북 봉화 출생. 2012년 '시산맥' 등단. 시집 '발 달린 벌'. 최치원신인문학상, 월명문학상, 울산문학 작품상 수상. 김감우 시인 '발'은 울림소리로 끝난다. 그래서인지 발이란 말의 동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글자의 끝은 느낌이 ..

좋은 시 2021.09.06

굳은살/김정임

굳은살/김정임 그는 내 무릎에 발을 올려놓고 잠이 들 었다. 남편의 발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었던가. 억세게 보이는 발꿈치에는 온통 굳은살이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나중에 보게 되는 것이 발이 아닐까.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될 때쯤 발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의 낯선 뒷모습을 보듯 가만히 그의 굳은살을 살펴본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잠시 낮잠에 빠져든 남편, 굳은살은 그의 발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말하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가슴 한구석에 층층이 굳은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잠든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굵은 주름이 지난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아침이 되면 남편은 정확한 시계처럼 출근을 한다. 가끔 그의 구두를 닦을 때마다 구두 뒤축..

좋은 수필 2021.09.06

발가락들이 손가락들한테/윤근택

발가락들이 손가락들한테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62년 동안 살아오면서 왜 그걸 여태 깊이 깨닫지 못했던고? 오늘 새벽, 산골 외딴 농막을 나서다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관찰자로서만 바라보고 듣고 하였을 따름. 발가락들이 입 모아 손가락들한테 말했다. “그래, 우리 같은 ‘끝’은 늘 시려. ‘말단(末端)’은 늘 시려. 너희도 마찬가지지?” 그러자, 손가락 열이 화답(和答)했다. “ 맞어. 과부 심정 홀아비가 안다더니 ... . ” 손가락 열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을 그렇게 달리 말했다. 발가락들은 다시 손가락들한테 고마움을 표했다. “ 그런데 너희들 말이야! 아까 방을 나서기 전에 우리네가 얼세라, 양말을 두 켤레씩이나 겹으로 끼워주었어. 너희들도 시릴 ..

좋은 수필 2021.09.03

만무방골목/박시윤

만무방골목/박시윤 골목 들머리에 간판도 없는 용역회사가 있다. 사람들은 그곳을 인력시장이라 부른다. 벌써 십 년이 훌쩍 넘도록 이 골목을 지나 다녔지만 나는 아직 용역회사의 업주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출근하는 여덟시 무렵이면 용역회사는 벌써 하루를 마무리한 듯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늦게 나왔거나 운이 좋지 않거나​, 무슨 연유로든 일감을 얻지 못한 인부들은 공친 하루를 원망하며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줄담배를 피거나 욕지거리를 해댄다. 인부들의 입은 다소 거칠다. 처음과 끝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절반이고, 설사 알아듣는다 해도 귀를 의심할 만큼 험악하다. 벌써 사흘째 일감을 얻지 못한 인부의 그을린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곧 시작될 장마에 그나마 있던 일감도 줄어들 터이고, 마른 날만이라도 일..

좋은 수필 2021.09.02

물염勿染/고경서

물염勿染/고경석 이곳은 '물염정'이다. 물염勿染이라는 호를 가진 선비가 낙향하여 지은 정자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 제 살을 깎아낸 암벽치고는 평온한 표정이다. 희끄무레한 바위틈에서 소나무가 웅크린 자세로 벼랑 아래 강물을 굽어본다. 때마침 불어온 칼바람이 절대 고독을 외치는 솔가지를 흔들어, 산의 적요를 몰아 동복댐 쪽으로 빠져나간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풍경이 무심한 듯 진솔하다. 나는 숨을 고르는 적벽을 건너다본다. 편액에 누대로부터 내려온 풍경이 붙들려 있다. 당대의 시인 묵객들이 노래한 시문들이다. 꿈쩍 않는 풍경도 나이를 먹는지 너른 강은 물줄기가 약해졌고, 산과 들은 속속들이 비우고, 채우는 아픔을 강물에 내비치면서 조금씩 닮아 온 듯하다. 그러나 옛 선비들의 예리한 감성만은 시간의 거리를 넘어..

좋은 수필 2021.09.02

손의 연금술/서은영

손의 연금술 / 서은영 "내가 손을 잡았어? 그거 내 술버릇이야." 이미 그에게 손뿐 아니라 마음조차 잡힌 후였는데, 그는 웃으며 의미 두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의 손가락은 유난히 길다.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나머지 중지, 약지, 소지는 삼발이 다리가 되어 초록색 당구대 위에서 뻗을 때는 살색 타이즈를 신은 발레리노 다리 같았다. 붉은 공과 흰 공이 연신 삼각형을 그리며 도는 당구대 위에서 뻗었다 접었다 하는 그의 손가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동물의 앞발이 몇 천만 년을 진화해야 저렇게 아름다운 손가락이 될까?' 그의 손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날마다 나의 손은 호주머니 속에 단단히 감추어져 있었다. 나의 손가락 마디는 굵고 주름투성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엄마는 '반찬값'이라며 갖..

좋은 수필 2021.09.02

영혼의 성소(聖所) / 김애자

영혼의 성소(聖所) / 김애자 내게 있어 문학은 갈애渴愛의 파도다. 40대 후반에 만난 이 조화로운 물결은 끊임없이 가슴속으로 밀려와선 나를 옴짝도 못하게 하였다. 아니 물결이 나를 옴짝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파도를 더 갈애하였으므로 스스로 옭아매어지기를 바란 비장한 선택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이 비장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냥 입때껏 저 나른한 삶의 권태로움에 빠져 허구한 날 사는 게 왜 이모양 이 꼴이냐며 신세타령이나 늘어놓는 한심한 여자로 죽치고 앉아 세월만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어질머리 이는 내 나이 마흔일곱 살 적 혼란과 변화를 잊지 못한다. 그 해 봄은 참으로 시절도 수상하였다. 자고 나면 수 백 명의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죄..

좋은 수필 2021.09.02

능소화 / 김애자

능소화 / 김애자 임금과 하룻밤을 지낸 소화라는 후궁의 기다림이 꽃이 되었다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피는 귀한 꽃이지만 지금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출처도 분명치 않은 능소화 한 그루가 대문 옆에 서 똬리를 틀더니 곁눈 한번 주지 않는 향나무 허리를 뱀처럼 휘감는다. 목걸이를 한 암캐의 부러움을 딛고 하늘을 감을 태세로 올라가는 줄기마다 처녀의 볼기짝만한 꽃잎이 요염하게 웃는다. 6월이 되면 능소화와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집 안에서 얌전을 피라고 줄기를 담장 안으로 옮겨 놓으면 잽사게 문 밖으로 나가 서성거린다. 까치발로 목을 빼고 누군가 하염없이 기다리다 소리 없이 떨어진다. 한 여름의 태양을 이고 의기양양하게 떨치는 능소화의 화려함은 여인네의 치마 속까지 무단횡단하..

좋은 수필 2021.09.02

빈 집에 뜬 달/도창회

빈 집에 뜬 달/도창회 오지 마을 빈집이 산짐승처럼 흉물스런 얼굴로 서있다. 한때는 사람이 기거하던 처소였건만 어찌 저리 버려졌는가. 폐허를 절감하는 순간이다. 빈집 마당은 온갖 잡풀들이 우거져 키를 재고, 대청마루는 흙먼지가 덕지덕지 쌓여 있다. 창호의돌쩌귀가 빠져 바람에 덜컹댄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난장판 그대로다. 온기 잃은 고가구들이 허섭쓰레기와 함께 나뒹굴고 또한 부엌간의 살벌한 꼴이란 그 기막힘이 눈살을 찌푸리기에 족하다. 부엌 아궁이가 꺼멍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여기저기 내 시력이 닿는 곳마다 마음이 내장 속을 훑는다. 이 집은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 몹시 궁금타. 여긴 전북 장수 계남 백화산白華山구릉지,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느 두메 마을. 이 오지 동리만 ..

좋은 수필 2021.09.02

소리에 관하여 / 고경숙

소리에 관하여 / 고경숙 창밖에는 고작 너댓 명의 아이들뿐이다. 우르를 떼지어 몰려다니는 것도 아닌데 날뛰던 고함소리는 오간데 없다. 롤러브레이드를 타면서 내지르던 함성이 비명처럼 귓바퀴에 실릴 뿐이다. 잘못 들었을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리가 소리를 껴안고 먹구름처럼 부풀어올라 아파트를 휩사고 돌았는데 말이다. 급기야 나는 그 소리로 신경이 곤두섰으며, 읽고 있던 책마저 덮지 않았던가. 아이들과 놀 때는 소리도 덩달아 기분 좋게 뛰놀고, 침묵하는 마음에서는 소리 역시 심드렁해지는 모양이다. 아직도 귀에는 쫙쫙 퍼붓는 장대비소리가 내리치고 있다. 사방이 고층 아파트로 밀집된 탓인지 하늘조차 운신이 벅찬지 잔뜩 흐려 있다. 후덥지근한 바람의 꽁무니에 매달려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라는 풀 포기같은 아이..

좋은 수필 2021.09.02

장항리 절터를 찾아서/고경숙

장항리 절터를 찾아서/고경숙 강물도 시들었는지 시냇물로 흐른다. 한때는 소용돌이치는 급류에 휘말렸을 대종천의 우람한 지류다. 날카롭게 모난 바위들을 아우르기도 했던 강은 바닥을 보이고, 빛 바랜 돌덩이들만 뼈대를 드러낸 강가에 나뒹굴고 있다. 물소리가 독경소리로 흐르던 옛 영화를 바위 틈 가녀린 물길이 뒤따라오며 길을 풀어낸다. 울창한 잡목이 윤기를 잃어가는 토함산 자락이다.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라 했던가. 역사의 향기가 물씬나는 산길을 가파른 마음이 먼저 오른다. 우듬지가 꺾인 돌배나무에 몸을 기대자 핼쓱해진 이파리사이로 숨은 듯 서 있던 석탑이 반기는 눈치다.깍아지른 절벽 아래로 석축을 쌓았지만 엄습하는 아찔한 두려움은 새로 조성한 콘크리트 길 때문이다. 홍 수가 질 때마다 제 뿌리를..

좋은 수필 2021.09.02

신라의 미소, 수막새 기와/고경숙

신라의 미소, 수막새 기와/고경숙 수막새 기와 한 점을 샀다. 진열장 속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불빛을 이리저리 당기며 웃음의 각도를 재엇다. 얼굴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보일 때가 이목구비의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표정도 살아났다. 돋을새김한 미소도 한결 선명해진다. 못에 매달아 놓을 끈에 손가락을 집어 넣고 보니 웃음이 나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천년의 미소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흐르는 콧잔등이며 무슨 생각에 골몰한 듯 아래로 내리감은 눈, 반쯤 깨진 얇은 입술엔 미소가 묻어 나오고, 도톰한 볼에선 금방이라도 파안대소를 터뜨릴것만 같다. 영락없이 어질고 순박한 옛 어머니의 모습이다. 마음은..

좋은 수필 2021.09.02

모리국수/김은주

모리국수/김은주 좁은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처마 낮은 선술집이 있고 우물 속같이 깊은 그 길 끝, 모리국수집이 있다. 모리집은 하루 중, 해거름에 찾아야 그 맛이 제격이다. 해가 서산으로 막 기울기 시작할 무렵, 어둠과 밝음이 적당히 공존하는 시간, 배는 허기가 밀려오고 내 두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울 때 이 골목을 찾아야 한다. 긴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르게 켠 홍시 빛 가로등이 안온하게 나를 반긴다. 선술집 처마 밑으로 불콰하게 술이 오른 뱃사람들의 목소리가 고조될 즈음 골목길은 저 홀로 살아 꿈틀거린다. 반쯤 열린 술집 처마 밑으로 지글거리며 안주 익는 소리와 칼칼한 양념 냄새가 가다서는 내 발길을 잡는다. "나는 니가 무섭다."라는 말을 남기고 피붙이 같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목숨 부지한 동..

좋은 수필 2021.09.02

젓봇대/강여울

젓봇대/강여울 조용히 비가 내리는 길, 가로수들 사이에 외롭게 전봇대가 서 있다. 전봇대는 양 팔을 나란히 뻗어 몸에 버거울 것 같은 전선을 받치고 있다. 나무들은 제 선 자리에서 꽃과 잎도 피고 진다. 그러나 전봇대는 푸른 잎 하나 피우지 못하는 콘크리트 나무다. 일생 뿌리 내린 그 자리만을 지키며 그가 거느린 전선들은 사방으로 멀리 뻗어 보낸다. 항시 맨몸으로 지키는 전선들이 그의 꽃이며 잎이고 열매가. 전봇대는 오로지 자신을 의지히 뻗어나간 가지들을 지키는 일에만 전심전력이다. 제 몸을 키우지도 못하고, 꽃 한 송이 피울 수도 없는 슬픈 나무지만, 그에게서 뻗어나가는 전선들은 새들의 쉼터도 되고 어둠을 물리치는 등불이 되기도 한다. 내 맘이 새처럼 꿈속을 유영하던 열 살 무렵, 새마을 운동의 물결을..

좋은 수필 2021.09.02

푸른 방/서숙

푸른 방/서숙 푸른 바다가 천장에서 바닥까지 한 벽에 가득하다. 뤽 베송의 영화 『그랑 블루』의 커다란 포스터 덕분이다. 연한 하늘색의 벽지가 하얀 책상 뒤에서, 시원한 청색의 양탄자가 흰 커튼 자락 밑에서 더욱 파랗다. 꽃병도 거울 장식도 문구들도 덩달아 제각기 다른 파란 빛을 지니고 여기저기 섬처럼 놓여 있는 이 방을 나는 '푸른 방'이라고 부른다. 코발트 블루, 인디고 블루, 클라인 블루, 울트라 블루, 시아닌 블루… 온갖 톤의 이다지도 많은 블루에 둘러싸여서 나는 그 모든 블루가 좋다. 물에 빠졌던 적이 있다. 여섯 살 아이는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떠 있는 듯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는데, 처음 겪는 무중력의 세계가 이상하게 편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완벽한 고요 가운데, 아이의 몸 주위로 ..

좋은 수필 2021.09.02

칡/박현숙

칡/박현숙 상처 입은 어린 생명들이 녹색피를 흘리며 신음하다 서서히 일어선다. 한낮의 열기가 섞인 쌉싸래한 풀내음은 코띁에 아찔하게 스며든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것들은 쓰러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으깨어지고 다시 일어서보려 애써보지만 내리쬐는 태양이 마지막 남은 수분을 살뜰하게 거두어간다. 성성한 칡넝쿨은 더 성해져서 벚나무를 휘감아 타고 오르는데 애꿎은 어린 새싹들만 떠나갔다. 무섭도록 성해지는 칡의 뿌리를 찾아 태양을 이고 헤맨다. 몸속의 수분도 다 증발해 버릴 것만 같다. 줄기를 힘차게 뻗치는 칡의 근본은 내 팔뚝보다 굵고 튼실하다. 남편과 함께 톱으로, 낫으로 열심히 잘라내고 제초제를 듬뿍 뿌렸다. 작년 여름에 꽤 실한 벚나무 두 그루가 칡넝쿨에 휘감겨 죽었다. 남은 벚나무와 느티..

좋은 수필 202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