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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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 법정스님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 법정스님 이 가을 들어, 처음 절에 들어와 배우고 익힌 글들을 다시 들추고 있다. 그때는 깊은 뜻도 모르고 건성으로 외우면서 관념적인 이해에 그쳤었는데, 외떨어져 살면서 옛글을 다시 챙겨보니 크게 공감하게 된다. 글이나 사상은 그 저자의 정신연령에 이르러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활환경이 비슷해야 더욱 공감할 수 있다. ​ 야운野雲스님의 '스스로 경책하는 글​ [自警文]'에 이런 시가 있다. 나물 뿌리와 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송락과 풀옷으로 이 몸을 가리며 들에 사는 학과 뜬 구름으로 벗을 삼아 깊은 산 골짜기에서 남은 세월 보내리. ​ 몸과 마음 선정에 들어 흔들리지 않고 오두막에 묵묵히 앉아 왕래를 끊는다. 적적하고 고요해서 아무 일 없으니 이..

좋은 수필 2021.08.02

즐거운 오역/허림

즐거운 오역 허림 오늘은 들어가지 말아 줬음 해 네 시 사 십 칠 분에 받은 문자 움직이는 말이 다섯 개씩이나 이어지는 문자 '줬음'이 맘을 잡네. 이유 없이 더군다나 들어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말았으면도 아닌 말아 줬음 한다는, 그렇게 나는 이유 없이 망설이며 맘 설렌다 구름처럼 노을처럼 서로 애절하게 물드는 연봉다리를 건너갔다 남산다리를 건너오며 산마루에 걸린 저녁 해와 미끄러지면서도 얼음 위로 애절애절 올라서려는 흰뺨검둥오리를 바라보다 여섯 시 사 십 팔 분 오막에 들어 별 하나 띄운다 오늘은 오막에 들어와 줬음 해 그대도 오역하기를 ―허림(1959~ ) ' 오막'에 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촌입니다. 솔 그늘에 바람 소리가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까닭이 있겠으나 무소유자입니다. 그림자마저..

좋은 시 2021.08.01

염천(炎天) / 마경덕

염천(炎天) / 마경덕 산기슭 콩밭에 매미울음 떨어진다 울음을 받아먹은 밭고랑 열무 바짝 약이 올랐다 상수리 그늘에 앉아 쓰르 쓰르 속 쓰려, 쓰려 혼자서는 속 쓰려 못산다고 짝을 찾는 쓰르라미 울음이 대낮 콩밭보다 뜨겁다 이놈아 그만 울어! 불볕에 속곳까지 흠뻑 젖은 할망구 등 긁어줄 영감 지심* 맬 딸년도 없어 더 속이 쓰리다 호미 날에 바랭이 쇠비름 명아주 떨려 나가고 청상으로 키운 아들이 죽고 콩밭짓거리**로 김치 담가 올린 외며느리에게서 떨려 나온 할멈도 쓰름쓰름 다리 뻗고 울고 싶은데 그동안 쏟아버린 눈물이 얼마인지, 평생 울지 못하는 암매미처럼 입 붙이고 살아온 세월 슬픔도 늙어 당최 마음도 젖지 않고 콩 여물듯 땡글땡글 할멈도 여물어서 이젠 염천 땡볕도 겁나지 않는다 팔자 센 할멈이나 돌밭..

좋은 시 2021.07.30

책무덤/마경덕

​ 책 무덤 마경덕 주소를 달고 누런 봉투에 그대로 갇힌 책 닫힌 책은 입이 사라지고 한 묶음의 침묵이 된다 냄비받침이나 기우뚱한 의자 다리에 깔려 죽어가거나 낱장으로 뜯겨 딱지가 되거나 끝내 고물상의 폐지가 되거나 한 번도 세상을 만나지 못한 시 그대로 잊히는 소설 종이의 뼈가 누렇게 휘어진 고서(古書)가 되도록 살아남을 수는 없을까 작가의 쓰라린 눈물이 밤새 펄펄 끓던 시인의 심장이 식어가는데, 갇힌 저 글자들은 언제 무덤을 열고 나오나 미친 듯이 책은 쏟아지고 쏟아진다 오늘도 무덤을 향해 [출처] 책 무덤 / 마경덕|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2021.07.30

존재자들의 머리카락을 찾아서

월간 2021. 7월호 평론 부문 당선작 존재자들의 머리카락을 찾아서 ―마경덕 시인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신원석 (시인. 평론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집과 직장에서, 학교. 때론 커피숍이나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스물네 시간을 보낸다. 적어도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 기상(起床)과 동시에 우리들에게는 또 다른 하루치의 세상이 주어진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최초의 사건들이 또 하루치만큼 줄지어 달려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생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지금껏 우리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내일이 버젓이 살아 있지만, 우리는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깊이 회의한다. ‘지겹다’는 푸념이 공식처럼 따라붙는 것도 다반사. 이런 반복적 일..

수필 이론 2021.07.30

결초보은結草報恩/방윤후

결초보은結草報恩 방윤후 신호등 빨간불 맞춰 차들이 횡단보도 흰 선 뒤에 멈춰 있다 結초보恩, 이 은혜는 꼭 나중에 다른 초보 분께 갚도록 하겠습니다 자동차 뒤창에 붙어 있는 글귀가 선명하다 모든 초보에게 은혜가 있다니 입가 미소에 농도가 짙어진다 어쩌면 가로수는 구름에게 빚지고 구름은 태양에게 빚졌던 걸까 횡단보도 안전하게 건넌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은혜를 갚는 일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는 사이 아버지는 생전에 내게 묻곤 했다 키워 주고 가르쳐 주니 나한데 빚진 것 언제 갚을래? 커서 다 갚을 게요, 양손을 크게 벌린 어린 딸을 흐뭇하게 내다보듯, 이제 막 출발할 저 차에게도 순순한 길이 이어질까 도시에 빌딩들은 길을 헤아려 조금씩 비껴서고 고층에 가린 그늘에도 햇살이 머물다 갈 사랑이 있을 것이다 초..

좋은 시 2021.07.30

개똥쑥/한희숙

개똥쑥 한희숙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이 항암효과 성인병예방 당뇨병 등 만병에 효험이 있다며 끓는 물에 삶기도 하고 설탕에 버무려 항아리 속에 눌러 담기도 하면서 눈에 보이기만 하면 뿌리째 뽑혀 나갔습니다. 이러다간 멸종이 될 것 같아 불안했지만 우리는 암말도 안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인가 부터는 인증이 안 된 낭설이라 효험이 없다며 우리를 못 본 척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암말도 안했습니다. 좋다고 했던 것도, 아니라고 했던 것도 모두 저들 마음의 흔들림이었던 것을 우리들이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암말도 안했습니다. 애시 당초 개똥 쑥이라 이름 지어져 불릴 때에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때도 우리는 암말도 안했으니까요. [출처] 개똥쑥 / 한희숙|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2021.07.30

발목/안태현

발목 안태현 파스 좀 붙여다오 아흔일곱 노모가 퉁퉁 불어서 생의 물금이 희미해진 푸르스름한 발목을 내밀었다 가출한 내 행방을 찾아 불갑사 일주문까지 한걸음에 내달리고 눈보라 치는 날 종종거리며 장꾼들 국밥을 말던 그 발목이었다 한국동란 피난길에 죽을 고비가 몇 번 있었는데 어린 자식을 안고 쇳덩이처럼 무겁게 끌고 가던 그 발목이었다 해방되던 날 거리에 나가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부르더 고무신 한 짝을 잃어버린 것도 몰랐던 그 발목이었다 일본 순사에 쫓겨서 겨울 바닷가 채취선에 고양이처럼 숨어들어 있다가 담배 보따리와 함께 석고처럼 굳어버린 그 발목이었다 이제 더는 발목 잡힐 일 없는 삭정이 같은 마지막 발목이었다 [출처] 발목 / 안태현 |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2021.07.30

빨래/김혜숙

빨래 빨래로 널려야지 부끄럼 한 점 없는 나는 빨래로 널려야지. 피얼룩 기름때 숨어 살던 눈물 또 서툰 사랑도 이젠 다 떨어버려야지. 다시 살아나야지. 밝은 햇볕 아래 종횡무진 바람 속에 젖은 몸 다 말리고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김혜숙(1937∼ ) 봄인가 했다가 봄이구나 한다. 봄은 코로나가 끝나야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어쩌겠는가. 맞이할 준비가 늦었으니 서둘러야지. 찾아오시는 봄을 바라보는 마음은 절망보다는 희망 쪽이다. 햇볕이 밝은 탓에 자꾸 그렇게 된다. ‘따가운 봄볕에 다 타버려라. 코로나는 모두 모두 소독되어 버려라.’ 이런 희망마저 갖게 된다. 그런데 햇볕에 소독되고 싶은 건 이 시대의 우리만은 아니었나 보다. 오늘은 시대를 넘어 공감..

좋은 시 2021.07.30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박형준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박형준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한밤중 나를 깨워/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등목을 청하던 어머니,/물을 한바가지 끼얹을 때마다/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까맣게 탄 등에/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어머니의 등에 기어다니는/반짝이는 개미들을/한 마리씩 한 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 (후략) ―박형준(1966∼ ) 요즘은 카톡을 시작할 때 ‘이 더위에 잘 지내십니까’라고 인사한다. 메일에서 끝맺음 인사를 할 때도 ‘더위에도 건강하시길’ 덧붙인다. 적어도 말복 때까지는 ‘덥다, 더워’라는 말이 내내 입에 붙어 있을 예정이다. 너무 더운 한여름이라는 사실은 박형준의 시를 읽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좋은 시 2021.07.30

폐타이어/함민복

폐타이어 ​ 함민복 ​ ​ 구르기 위해 태어난 타이어 급히 굽은 길가에 박혀 있다 ​ 아직 가 보고 싶은 길 더 있어 길 벗어나기도 하는 바퀴들 이탈 막아주려 ​ 몸 속 탱탱히 품었던 공기 바람에 풀고 움직이지 않는 길의 바퀴가 되어 ​ 움직이는 것들의 바퀴인 길은 달빛의 바퀴라고 ​ 길에 닳아버린 살거죽 모여 모여 ​ 몸 반 묻고 드디어 길이 된

좋은 시 2021.07.28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종점, 길은 언제나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막막하게 생의 변두리를 도는 자 외곽에서 중심을 구하는 자의 배경에는 벌판과 바람 길은 휘어져 어디에 닿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삶은 단지 스쳐가거나 봄볕에 살을 말리는 뿌연 것, 어느날 아주 먼 어느날 우리가 인연이라 말하던 순간도 다 쓰고 나면 바람 빠진 폐타이어 닳아진 허울만 남아 한곳에 쌓일 것이다 재생의 날을 기다리며 우연한 봄날의 담에 기대다 보면 지나온 길의 어디쯤 진실도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덤프트럭이 지나고 갓 스물의 청춘이 노래한다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들판의 한끝 희망은 그런 대로 연명하기에 좋았으나 몸의 바퀴가 닳아 멈추었을 때 내 앞에 놓인 밥그릇 하나, 햇살이 가득 담긴 사발을 놓고 조..

좋은 시 2021.07.28

폐(廢)타이어​/김종현

폐(廢)타이어 ​ 김종현 ​ ​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

좋은 시 2021.07.28

콩나물의 물음표/김승희

콩나물의 물음표 김승희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씩 금빛으로 터져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목을 갸웃 내밀고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

좋은 시 2021.07.27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 / 문태준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 / 문태준 얼굴이 푸석푸석하던, 누룩 띄운 독 같던 나무들이 봄이 되어 빛깔을 받는다. 매화와 산수유나무가 우선 그렇다. 불꽃을 받는다. 나는 지난 겨울 보고 들었다, 빈집의 마음을, 바람의 노래를, 얼음의 언어들을, 침묵의 세계를. 요즘 해금 같은 가늘은 소리가, 숨결이 나무에게서는 난다. 새순 한 촉을 땅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참혹했을까? 새순 돋는 나무에게는 회오리가 있다. 새순 돋는 나무들을 보면 나에게 중대사는 무엇인가 묻게 된다. 등짝을 뚫고 나오는 시, 아래로 아래로 땅을 파고 들어가 처음 만난 한 줄기 샘물 같은 그런 시를 받아낸 적이 있는지 묻게 된다. 봄이 오는 산길 들길을 걸으면 그래서 내 마음은 더더욱 오갈 데 없는, 춘설 분..

좋은 수필 2021.07.26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떨켜가 드디어 잎자루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체념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별리의 가을이 못내 아쉬워 흘리는 나무의 눈물이다. 열정의 구멍이 스르르 닫혀버린 내 몸에서 떨어진 잎들이 생의 겨울이 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의지, 도전, 끈기, 인내, 용기, 목표 그리고 믿음의 잎들. 결기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 잎자루를 야멸치게 내치는 수문장, 떨켜. 떨켜가 수문의 기척을 낼 때까지 봄은 준산빙벽을 오르내리며 오기와 극기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눈 속의 노란 복수초와 매화의 안위를 살피는 눈, 동장군보다 매서운 봄이다. 내 열정의 구멍마다 풍구를 돌려보지만 기척도 않는다. 구멍이 한 생명을 키우거나 버린다는 것을 생의 구멍을 진중히 여닫아본 사람만이 안다. 다람쥐, 청설모도 ..

좋은 수필 2021.07.23

참깨송(頌) / 이옥자

참깨송(頌) / 이옥자 한 알의 무게는 작은 새의 깃털과 같고, 크기는 모래알 다음 가나, 향미(香味)로는 따를 것이 없어 이 세상 으뜸이다. 부부의 정이 도탑거나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면 '깨가 쏟아진다'하고, 배알이 뒤틀릴 때 상대방이 코 깨질 일이라도 생기면 '깨소금 맛'이라 함은 그 까닭이다. 고기 맛만 최고인가, 산 녘과 들녘에 지천인 나물을 뜯어 삶아 참기름 한 방울 치면 밥 한 그릇도 뚝딱, 그도 저도 마땅찮을 때는 맨 간장에라도 한 방울 둘러치면 그 맛도 괜찮다. 상찬에도 깨맛과 참기름 향이 빠지면 맨송맨송 하찬으로 등락하고, 하찬도 참기름 진향(珍香)이 돌면 상찬이 된다. 곡물이나, 기묘한 향미로 그 값은 천정이다. 금값이나 사향 값보다야 못하지만, 곡물로는 최상으로 매겨지니 물물교환에 고..

좋은 수필 2021.07.22

김영미 시 모음

김영미 시모음 저물녘1 김영미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뒤란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아버지가 싸리꽃을 좋아하시던지 달이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두고 얘기하는 것을 몰래 들으시는가 했다 어둠이 성큼 마당을 기웃거릴 때 가을비속에 뒤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잔잔한 빗줄기가 오리나무를 성글게 빗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레빗은 수그린 머리와 잔등을 쓸어내리며 네 사는 건 어떤가 묻는 것이었다 나무는 잔기침을 하며 오소소 떨 뿐이었다 외등으로는 자꾸만 낡아 허물어지는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어둠을, 물리치지 못했으므로 저물어간다는 것이 왠지 두려웠고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 생각 없는 생각을 했다 싸리꽃은 내 그림자위에 붉게붉게 꽃을 토해내고 달그림자는 세상과 화해하지 ..

좋은 시 2021.07.15

누나의 붓꽃/손광성

누나의 붓꽃 손광성 시집가기 싫다고 누나가 말했다. 시집은 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싫다고 조그만 소리로 누나가 말했다. 그 사람이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먹기 싫은 밥은 먹어도 살기 싫은 사람하고는 못 사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어머니였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날 어머니는 평소의 어머니보다 훨씬 커 보였고, 그래서 그날은 어머니가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무슨 천둥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 위세에 눌려 어머니는 다시 평소처럼 조그만 헝겊인형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열 일곱 살 누나는 가망 없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누나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열 살짜리 나는 너무나 작..

좋은 수필 2021.07.15

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가끔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멸치를 깐다. 멸치볶음을 좋아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목마른 짐승 샘물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 멸치를 까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한 마리당 세 단계로 작업은 종료된다. 먼저 대가리를 딴 다음 엄지손톱으로 등을 가른다. 그 다음에 내장을 들어낸다. 그래야만 깔끔하게 끝난다. 내장이 뱃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부분을 뒤적거리다가는 낭패를 본다. 잘 갈라지지도 않지만 제일 맛있는 부분이 부스러지기 때문이다. 멸치를 까다 보면 잠시 마음이 짠할 때가 있다. 어느 한 놈도 내장이 까마헥 타지 않은 것이 없어서이다.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저지경이 되었을까 싶다. 짠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편안히 죽은 놈은 한 마리도 없다. 모두 뒤틀려 있다. 끓는 ..

좋은 수필 2021.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