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86

울지 않는 반딧불이 / 박일천

울지 않는 반딧불이 / 박일천 시골집 대문 안에 들어서자 텃밭에서 푸성귀를 솎아내던 시어머니께서 흙 묻은 손을 털고 일어서며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신다. 가끔 다녀가는 자식들이 적적함을 밀어내는 말동무이리라. 이것저것 물어보며 세상 밖 이야기에 귀 기울이신다. 밭에서 솎은 어린 배추로 얼갈이김치를 담고 챙겨간 찬거리로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귀뚜라미 소리에 이끌려 그이와 함께 개울가로 나갔다. 동구 밖을 지나 갈대가 사운거리는 둑길을 따라 걸었다. 동산 너머로 열나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벼들이 그득 찬 들녘은 달빛에 젖어 희붐하다. 내 키보다 큰 갈대들은 냇둑 위에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다. 갈대밭 언저리로 작은 불빛 하나가 깜박거리다 사라진다. 잘못 보았을까. 내 눈을 의심하기도 전에 또 다른..

좋은 수필 2021.08.18

말(馬) / 박시윤

말(馬) / 박시윤 말이 달린다. 굽 소리가 사위를 가른다. 장엄하게 뻗어 나가는 소리, 지하 깊숙이 매몰된 거대한 말굽의 역사를 깨우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지각변동 같은 파장이 꿈틀댄다. 말이 달린다.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 빈 들을 지나, 사막을 넘어, 광야를 찾아 쉼없이 달린다. 모래바람 동공을 찌르고, 가시가 몸통에 박히고, 냉기 품은 파편이 꽂혀도 말은 달린다. 닳아빠진 관절 깊숙이 시큰한 통증이 움을 틀어도 말은 멈추지 않는다.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아파하지 않으리라.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리라. 은백색의 갈기가 바람에 휘날린다. 무릎의 마디가 꺾이고 펴질 때마다, 굽소리가 우렁차게 대지를 울린다. 대륙의 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광야를 목마르게 찾아 떠돌았던 태초의 땀 냄새가 난다. 닳..

좋은 수필 2021.08.17

쇠똥구리 / 김애자

쇠똥구리 / 김애자 굴리고 또 굴린다. 작은 덩어리를 크게 불리려면 쉴 수가 없다. 손톱만 한 몸뚱이에 철갑옷을 두르고 머리통을 찍어 붙인 까만 눈은 온종일 남의 배설물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억센 팔다리로 쇠똥더미를 점령한 녀석은 쇠똥에 주둥이를 처박고 이리저리 헤집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피 한 방울 침 한 모금 섞어 앞다리 갈퀴와 뒷다리 톱니로 조물조물 뭉쳐 종자 씨를 만든다. 빈 하루가 등짝에 업힌다. 샛별을 지고 나선 가장의 어깨에 하루 치 짐이 천형처럼 누른다. 쭈그러진 자루를 부풀리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비틀어진 골목길을 잽싸게 달린다. 먹고 자고 새끼 쳐 키울 둥지라도 마련하려면 퍼질러진 똥 더미의 잔해를 헤집는 것쯤은 각오한 일이 아니던가. 쇠똥구리가 눈을 반짝인다. 녀석은 화등잔만큼 ..

좋은 수필 2021.08.17

둥근 것은 굴러야 한다 / 최장순

둥근 것은 굴러야 한다 / 최장순 바람 빠진 바퀴만큼이나 바람 빠진 오후다. 생기 돌던 시간은 어느새 네 시를 향해 절뚝거린다. 마구 달려가고 싶은데 소진된 기운은 좀체 굴러가려 하지 않는다. 봄날의 나른함이다. 바람 가르던 눈부심이 저만큼 사라졌다. 먼지 앉은 자전거들이 적막하다. 값나가는 자전거들은 아파트 현관 안에 모셔두지만 아파트 출입구 보관대에서 묵묵히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자전거들. 내달리지 못할 때 자전거는 자전거가 아니다. 길은 영영 사라진 듯 보인다. 보다 못한 관리실이 처분하겠다는 안내장을 걸어도 요지부동이더니 어느 날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스스로 굴러간 것이 아니라 폐기처분된 것이다. 자전거 페달에 겨우 발끝이 닿은 내가 균형을 잡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모든 ‘첫’은 긴장과 위험이..

좋은 수필 2021.08.17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명왕성 유일 전파사 ​ 김향숙 ​ ​ 모든 가전家電엔 명왕성冥王星 하나 두둥실 들어있다고 했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하는 것이 제명이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는 모르는 게 없다 이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 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공구들의 명칭마다엔 알파벳 하나씩 휘어지고 벗겨진 곳곳에 일본식 표현이 살짝 묻어있다 ​ 오일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배운 적 없는 어깨너머의 기술로 만지작거리면 고장 난 밥솥이 빨간 눈을 켜고, 커피포트 녹음기 선풍기와 마음 고장 심하게 난 이웃까지 불러 앉혀놓고 막걸리 한 잔 따라주면서 다독다독 고친다 ​ 십자와 일자, 플러스와 마이너스만 있으면 퇴출당한 명왕성도 거뜬히 고친다고 큰소리치는 명왕성 유일..

좋은 시 2021.08.16

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김향숙

사진카페에서 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 김향숙 산 1번지로 시작하는 경사진 주소들을 이곳 사람들은 등에 지고 다녔다 옆집이 옆집을 붙잡고 견디는 집들은 조금씩 침범한 측량선으로 서로 묶여있다 옆집의 질문에 그 옆집이 대답하는 얇고 낮은 말소리들 여차하면 굴러갈 주소들을 꽁꽁 묶어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 다녔다 그런 주소를 가진 사람들은 점점 가팔라졌지만 흐린 날엔 지붕을 달리는 폐타이어들을 손보곤 했다 낮은 동네의 사람들이 양손 가득 봄 햇살이나 납작한 소식들을 들고 찾아오면 덩달아 따뜻해지곤 했다 이곳 사람들은 번지수를 등에 지고 다녔다 집배원들은 옆집과 옆집을 섞어 배달했지만 목련나무나 수돗가나 허물어진 담이 서로 섞여 번지수를 대신하고 했다 평생 헉헉거리는 오르막을 껴입고 다닌 사람들 자주 흘리거나 ..

좋은 시 2021.08.16

글쓰기 방법론: 쓰라고?/김서령(자유기고가)

글쓰기 방법론: 쓰라고? 김서령(자유기고가) 글을 써라. 어떻게? 그냥 써라. 아니 어떻게 그냥? 무조건 써라. 아니 어떻게 무조건?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건 시작이다. 도무지 뭘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할 때 무조건, 그냥 , 아무렇게나! 한 문장을 시작해버려라. 눈에 보이는 아무 단어나 우선 써 버려라. 이렇게! 그게 바로 오늘의 글감이다. 글감은 당신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가 당신이 원할 때 얌전하게 차곡차곡 순서대로 나타나 줄만큼 인심좋지가 않다. 되려 떠올리려 할수록 천리만리 도망가 버리는 심술쟁이다. 뭘 쓸까? 막연히 살아온 모든 날을 뒤지면서 백날 엎드려 있어 봐도 떠오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책상 서랍을 다 뒤집어엎고 밀린 빨래를 다 치대서 널어도 뾰죽한 생각이라곤 단 한 개가..

수필 이론 2021.08.16

공감하다 / 고경서(경숙)

공감하다 / 고경서(경숙) 밤바다와 마주선다. 어둠 속이라 바다는 보이지 않고, 광포한 파도소리만 고막을 때린다. 여전히 강풍에 장대비가 쏟아진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설문대할망이 빠져죽은 가마솥처럼 들끓는다. 제 어미를 먹어치운 자식들의 비통한 울음인지 모를 파도소리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갯바위를 치대며 밀회를 즐기던 하르방도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신들의 암투가 아니고서야 이런 야밤에 길길이 날뛰며 돌진해온 바다가 나를, 내 잠을 사정없이 집어삼킬 이유가 없다. 그리움의 바다가 악천후 속에서 제대로 울고 있다. 먹먹한 가슴으로 뛰어든 아우성이 낯설면서도 경이롭다. 이곳은 큰엉 해안이다. 밤늦어서야 찾아든 숙소다. 새벽녘에 갑자기 폭풍경보가 발효되었다. 조천해안도로를 타고 김녕 서포구, 산양 검은 모래..

좋은 수필 2021.08.14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은 한 번도 무엇을 밟고 일어선 적이 없다. 태곳적부터 오체투지의 자세로 모든 존재의 무게를 떠받들고 산다. 퇴화된 눈으로 세상을 보나 말하지 못하는 입을 가졌고, 우격다짐으로 삼킨 눈물은 귓바퀴를 두드리다 돌아나간다. 날선 울음으로 온몸을 곧추세우고, 묵상에 잠긴 밤하늘의 독백을 듣는다. 농밀한 어둠은 본능적으로 감지할 뿐 함부로 건드렸다간 절벽 아래로 처박히는 수가 있다. 조심하라. 붉은 심장의 박동소리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지렁이 한 마리가 땅속 집을 빠져나와 용케 차도로 기어오른다. 화물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헐떡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한나절 땡볕에 달궈진 지열이 화끈거리는지 길을 움츠렸다 폈다, 배밀이하듯 끌고 간다..

좋은 수필 2021.08.14

길 /최민자

길 /최민자 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 뭇 생명의 발원지가 바다이듯, 길도 오래 전 바다에서 올라왔다. 믿기지 않는가. 지금 당장 그대가 서 있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 보라. 한 끝이 바다에 닿아있을 것이다. 바다는 미분화된 원형질, 신화가 꿈틀대는 생명의 카오스다. 그 꿈틀거림 속에 길이 되지 못한 뱀들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왁자하게 우글대고 있다. 바다가 쉬지 않고 요동치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로운 흙내에 투명한 실뱀 같은 길의 유충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어서이다. 수천 겹 물의 허물을 벗고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 근질거리는 살갗을 비비적거리고 있어서이다. 운이 좋으면 지금도 동해나 서해 어디쯤에서 길들이 부화하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물과 흙, 소금으로 반죽된 거무죽죽한 개펄 어..

좋은 수필 2021.08.14

봉인해제 / 정아경

봉인해제 / 정아경 입춘이다. 그런데 전국이 꽁꽁 얼었다. ‘입춘대길’이라도 써 붙이려 대문을 나선다면 찬바람에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무색해질 것 같다. 그 찬바람을 맞으며 밀린 잔잔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오전 내내 쏘다녔다. 가는 곳마다 들이는 음악은 음악에 문외한인 내 입에서도 흥얼거리게 했다. “Let it go~Let it go~”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HROZEN)’의 주제곡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이 원작이다. 올 겨울 대한민국은 ‘겨울왕국’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는 듯하다. 빌보드 음원차트 1위라니 전 세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가서는 뮤지컬을 방불케 하는 음악에 반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우리 옛이야기처럼 권선징악을 주제로 설정해 놓고..

카테고리 없음 2021.08.12

달팽이 뒷간/노혜숙

달팽이 뒷간/노혜숙 ‘달팽이 뒷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붕 대신 한 평 하늘을 들였고, 문 대신 서원 뜰 한 자락을 들였다. 이끼 낀 진흙돌담은 달팽이처럼 안으로 휘었고, 풍화의 흔적이 스민 잿빛 이엉은 서원 지붕과 어우러져 한 풍경을 이루었다. 그 옛날 머슴들의 배설과 애환이 질펀하게 부려지던 ‘통시’의 공간. 뒷간 옆엔 배롱나무 꽃이 천연스럽게 붉었다. 10리 길을 걸어 들어가야 진면목을 알게 된다던가. 팔월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몽환적이었다. 염천의 농익은 볕처럼 붉은 꽃들이 서원 안팎에 흐드러져 피었다. 풍경 속에 건물이 있고 건물 속에 풍경이 들어와 한통속이 된 듯 조화로운 전경이었다. 입교당(立敎堂)에 올라 바라보는 만대루 풍광은 서원의 백미였다. 시선을 들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선..

좋은 수필 2021.08.12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 안도현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 안도현 1 소싯적에 나는 외갓집 툇마루 끝에 앉아 혼자서 시간 보내는 걸 아주 좋아했다. 그 마루 끝에 오래도록 앉아 있으면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곤 하였다. 굼벵이는 왜 썩은 초가지붕 속에 웅크리고 사는지, 매미는 왜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울어대는지, 장마철 산에 나는 버섯은 왜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것일수록 화려한 빛깔을 띠는지, 단풍은 왜 산꼭대기부터 붉은 물을 들이면서 산 아래로 내려오는지, 속이 벌어진 석류를 볼 때마다 왜 옆집 누나가 화들짝 웃을 때의 잇몸이 겹쳐지는지,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재미난 생각들이 꼬리에 고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동무들하고 어울려 노는 대신에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는 것도 싫지 않았다...

좋은 수필 2021.08.09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 김응숙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 김응숙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제 곧 김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순간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부산행 KTX를 타고 가다 대전역에서 충동적으로 내렸을 때 이미 여정은 꼬인 셈이었다. 대전에서 환승을 해 김천에 오기까지 한 시간 반이 더 걸렸다. 차창 밖으로 ‘김천’이라 써진 표지판이 지나갔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 덜컥이며 기차가 멈추고 나는 기차에서 내렸다. 애초 예정에는 없던 김천행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었다. 역 앞 광장에서 군밤을 구워 파는 아주머니 옆으로 택시 몇 대가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 앞으로 큰길이 있고 그 건너편은 시장이었다. 골목 앞 여인숙 간판 너머로 큰 모텔 건물들도 보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

좋은 수필 2021.08.09

나와 구두의 관계/ 안도현

나와 구두의 관계/ 안도현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면 적어도 4, 5년은 신고 다닌다. 나한테 한 번 걸린 구두는 참으로 고생이 많다. 구두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처절하게 끌려다녀야 한다. 굽이 닳으면 수선가게에 가서 갈아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자주 구두약을 발라 윤이 나게 닦아주는 것도 아니다.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빗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라면 죽자사자 신발로서 그저 묵묵히 고된 노역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구두한테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것은 나의 검소한 생활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구두를 애지중지 아껴가면서 신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내 구두는 늘 꾀죄죄하고 우중충하고 우글쭈글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오는 구두는 미리 몸을 망칠 준비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쉽게 ..

좋은 수필 2021.08.07

기대고 싶은 날/장미숙

기대고 싶은 날/장미숙 언제부터였을까. 매일 보는 사물이 어느 날 달라 보일 때가 있다. 그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책을 읽는 것에 다독, 정독, 속독이 있듯이 본다는 것에도 다시, 정시, 속시가 있는 것 같다. 빠르게 보고 지나쳐버리는 것도 있고, 많이 보지만 별로 잡히지 않는 게 있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장면이나 풍경도 있다. 시선이 꽂히면 주위 사물들은 흐릿해진다. 오직 보고자 하는 장면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그런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작정한 게 아닌 만큼, 마음이 흔들리거나 존재의 의미에 한껏 고양되기도 하나 보다. 오늘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무심코 거실 벽 쪽에 놓아둔 화초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순간, 화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모양이 이상했다. 화초의 중심..

좋은 수필 2021.08.05

스치듯 겹쳐지면서/황진숙

스치듯 겹쳐지면서/황진숙 해가 스러지자 어스름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도시의 얼굴마담인 전광판은 허공으로 쉴 새 없이 자막을 흘려보낸다. 뒤늦게 도로를 건너는 이들에게 신호등은 경보음을 울리며 야멸차게 채근한다. 바닥은 개업을 알리는 전단지로 포장되어 낯빛을 알아볼 수 없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호객을 위한 상인의 목청소리,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뒤섞여 소란하게 들끓는다. 네온사인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자 터미널을 찾아가는 내 발걸음이 분주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스티로폼 상자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길가 한구석에 플라스틱 바가지 네댓 개를 펼쳐놓은 채, 강마른 손으로 마늘을 까고 있는 모습이 생경하다. 한 평의 공간도 어..

발표작 2021.08.04

쳇다리/황진숙

쳇다리/황진숙 정지문을 연다. 볕살 몇 조각이 고개를 들이민다. 어두컴컴한 시야에 들어오는 부뚜막이 휑뎅그렁하다. 터줏대감인 가마솥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고물상에 팔려 간 지 오래다. 이빨 빠진 잇몸처럼 돌아오지 못할 짝을 기다리는 아궁이가 스산하다. 종지를 놓아두던 살강이며 찬장이 사라진 곳에 쌓인 먼지와 처진 거미줄로 이미 부엌은 풍화에 들었다. 그을음이 까맣게 내려앉은 흙벽마저 기울고 있어 한때는 이곳이 부엌이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지려나 보다. 밥물이 끓어 넘치는 소리, 타닥거리는 장작불 소리, 도마질 소리를 떠올리기가 왠지 객쩍어진다. 서늘한 기운에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낯익은 기물이 눈에 들어온다. 기력이 다한 듯 한쪽 귀퉁이에 기대어 있는 쳇다리다. 사시랑이 몸으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

발표작 2021.08.04

줄탁동시 외 4편/최해숙

줄탁동시 외 4편 최 해 숙 아이 방 창문을 닫는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시원하다. 여름날 차디찬 우물물을 마신 것처럼 달다. 사람살이도 막힐 일 없이 이리 시원하고 달작지근하면 얼마나 좋을까. 방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입을 움직거리며 미간을 찡그린다. 꿈이라도 꾸는가. 꿈속에서 저를 힘들게 하는 존재는 이 어미가 아니어야 할 텐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던 남편이 병아리를 사 왔다.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한 마음을 움직여야 할 병아리가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황토에 모래를 섞어 벽을 바른 집에서 살았는데, 손길이 자주 닿는 부분의 벽지가 찢어졌다. 방 안이 제 놀이터였던 병아리는 날마다 벽지가 찢어진 부분에 부리를 대..

좋은 수필 2021.08.03

무릇, 똥 / 문경희

무릇, 똥 / 문경희 길이 아니라 아예 똥밭이다. 대충만 쓸어 담아도 한 자루는 족히 되겠다. 이렇게 많은 똥을, 하필이면 길목을 따라 싸질러 놓다니. 매너 한 번 똥 같다. 춥다는 핑계로 한동안을 칩거하다 뒷산을 오르는 중이다. 걸음걸음 똥이 밟힌다. 서리태처럼 까맣고 단단한 똥. 똥. 똥. 간만의 산보에 황감할 틈도 없이 난데없는 똥세례에 발밑이 조심스럽다. 임자 없는 똥은 없을지니, 겨울의 적막강산을 헤집고 어느 목숨 하나가 이 길 위에서 부단히 근심을 풀어解憂내었던가 보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족적으로 보건데, 밤만 되면 집 근처로 내려와 그악스럽게 어둠을 찢어발기던 고라니의 소행이 분명하다. 인도의 정치가 간디는 '독립보다 화장실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는데, 고라니들에게도 화장실 한 칸 마련해 ..

좋은 수필 2021.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