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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김향숙

에세이향기 2021. 8. 16. 11:42

 

                                                  사진<다음>카페에서

 

 

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

 

김향숙

 

산 1번지로 시작하는 경사진 주소들을

이곳 사람들은 등에 지고 다녔다

옆집이 옆집을 붙잡고 견디는 집들은

조금씩 침범한 측량선으로 서로 묶여있다

옆집의 질문에 그 옆집이 대답하는

얇고 낮은 말소리들

 

여차하면 굴러갈 주소들을

꽁꽁 묶어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 다녔다

그런 주소를 가진 사람들은 점점 가팔라졌지만

흐린 날엔 지붕을 달리는 폐타이어들을 손보곤 했다

낮은 동네의 사람들이 양손 가득

봄 햇살이나 납작한 소식들을 들고 찾아오면

덩달아 따뜻해지곤 했다

 

이곳 사람들은 번지수를 등에 지고 다녔다

집배원들은 옆집과 옆집을 섞어 배달했지만

목련나무나 수돗가나 허물어진 담이 서로 섞여

번지수를 대신하고 했다

평생 헉헉거리는 오르막을 껴입고 다닌 사람들

자주 흘리거나 찢어진 까만 봉지의 난감한 속들이

저 아래로 굴러가곤 했다

 

제비들은 처마 밑이라는 주소가 있지만

산비탈 아래 판잣집은 문패도 번지수도 없다

밤하늘의 별빛과 별빛을 이어붙이면

꼭짓점마다 당신이 살고 그중 어딘가에

내가 살던 경사진 집이 있었다

[출처] 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 / 김향숙 |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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